왜란종결자 6권 – 2화 : 은동의 괴로움


은동의 괴로움

김덕령과 유정은 다시 각기 살던 곳으로 돌아갔고 흑호는 까무러친 은동을 데리고 전라좌수영으로 돌 아왔다. 태을사자는 은동이 반죽음이 되어 있는 것 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흑호로부터 호유화가 은동 과 흑호를 공격했으며 은동의 아버지 강효식을 죽였 다는 이야기를 듣고더더욱 놀랐다. 항상 냉정하고 사리판단을 잘하는 태을사자였지만 이 일만은 절 대 이해가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정말 그것이 호유화 맞았 나? 마수의 변장 아니었는가?”

그러자 흑호가 말했다.

“제 아무리 둔갑을 잘해도 풍겨나는 요기는 지울 수 없는 거유. 그렇지 않수?”

“그건 그렇네만………….”

“분명 호유화였수. 풍기는 기운이 바로 환수의 기운 이었고, 그 법력도 호유화였음이 분명하우. 내가 당한 것 좀 보슈.”

흑호는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그슬린 자신의 털과 호유화에게서 얻어맞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유화는 주로 꼬리가 변한 백발을 이용하여 주로 싸우지 않던가? 그런 불의 술수나 직접치고 차는 술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호유화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수? 나는 원래 생 계의 금수고 당신은 사계의 존재이니 불을 안 쓰지 만 호유화는 환계의 존재니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거 유.”

“그리고 호유화라면 고니시가 가까이 왔다고 하여 그를 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고니시와부하들이 조금 있다 하여 호유화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거야 낸들 아우?”

“흠…… 그러나 호유화는 성계에서 대모님께 치료를 받고 있지 않았던가? 호유화가 하계로내려갔다면 그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지 않을 리 없는데?”

“흠….그럼 하일지달을 찾아 물어볼까?”

흑호는 독각도깨비를 시켜 하일지달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독각도깨비 녀석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나타났다. 그 녀석의 입에서도 또한 놀라운 소리가 나왔 다.

흑호가 급히 은동의 몸을 가지고 사라진 다음, 독각 도깨비도 호유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독각도깨비가 묘사하는 용모나 느껴지는 기운은 호유화임이 틀림 없었다.

흑호와 태을사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호유화가 여기를 찾아왔다가 흑호 자네를 보고 평양으로 따라간 것이 분명하군.”

“좌우간 하일지달을 찾아 물어봅시다. 안 그러면 확 신할 수가 없잖수?”

결국 한참 뒤 독각도깨비는 하일지달에게 고별을 했고 놀란 하일지달은 즉각 흑호에게 날아왔다.

“아니… 세상에……..어찌 그럴 수가……………”

하일지달은 흑호와 태을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좌우간 일이 이렇수.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보 슈. 호유화가 정말 중간계에 있수? 없수?”

“호유화는…… 음…… 그러니 며칠 전에 하계로 내 려간다고 하고 떠났어. 꽤 지났는데…………….”

흑호와 태을사자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결국 우려 했던 일이 사실이 된 것이다. 태을사자의낯빛은 더 더욱 푸르게 변했고 흑호는 몸을 계속 부들부들 떨 었다.

“호유화의 상처가 낫는데는 생계 시간으로 6년이나 걸렸어. 그러나 중간계는 시간의 조절이자유로우니 사실 생계에서는 며칠 지나지 않도록 시간 흐름을 수백 배로 느리게 하셨지. 모두가 대모님의 호의셨 어. 그러나 호유화는 공손하게, 생각한 것이 있으니 자신이 일어났다는것을 절대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 탁하고 생계로 내려갔거든…… 우리는 그냥 호유화 가 무슨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구나 싶기도 하 고…………. 또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뜻에서 알리 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그럴 줄이야…….”

그러나 태을사자는 얼굴빛이 창백해졌음에도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하일지달, 당신들은 마수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아니 묻겠소.”

“말 해봐.”

“마수가 요기나 마기를 근본적으로 감추어서……. 그러니까 환계의 기운과 똑같이 만들면서둔갑을 할 수가 있소?”

그러자 하일지달은 고개를 저었다.

“마수로서는 안 될걸?”

“어째서? 과거 백면귀마는 사계의 판관으로 둔갑을 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했지 않소?”

“사계는 음기만의 지역이라 마계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그리고 생계는 몸을 지닌 곳이라 둔갑을 감쪽같이 할 수 있고. 그러나 환계의 기운은 정사반 반(正邪)이고 음양도 각각이라 다른 계의 존재 가 흉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마계의 기운은 사악 함과 음기로만 이루어져 있거든. 자신과 같은 기운 이 애당초 깃들어 있지 않은 존재로 고스란히 변 할 수는없는 노릇이잖아?”

“그렇다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둔갑은 불가능하단 말씀이오?”

“…. ……마계의 존재가 사계나 유계의 존재로 둔갑 한다거나 환계의 존재가 다른 계의 존재로는 둔갑 이 가능해도 마계는 그러지 못할 거야. 마계가 그렇 게 기운을 숨길 수 있다면 너희들도 마수들의 존재 를 알 수 없었지 않았겠어? 그러니….. 음…….. 이 일은 아마 호유화가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

셋은 다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은 할말이 없었 다. 한참 지난 후 흑호가 탄식하듯 말했다.

“호유화는 은동이한테 그렇게 정이 깊었는데・・・……도대체 정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악독하게변했을 까……. 에휴……..”

“나도 이해는 가지 않아. 하지만………… 정이라는 것은 그런 독(毒)으로 작용할 때도 간혹 있는것 같아. 그 러나 이건 너무……………”

하일지달은 은동이 가엾다는 듯 한 번 은동의 누워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태을사자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구려… 호유화가 은동을 그리 악랄하게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호유 화의 둔갑술은 거의 우주 제일이고 법력 또한 상대 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니..”

“우리 둘이 은동이 곁에서 떨어지지 맙시다. 우리도 법력이 많이 증강되었으니 상대는 되겠지.”

그러나 태을사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 다.

하일지달이 걱정하며 돌아간 다음, 며칠간은 아무 일이 없이 흘러갔다. 흑호는 상처가 좀 심한 편인데다가 법력도 고갈되어 며칠간 꼼짝 못하고 쉴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은 은 동이 쪽이었다. 려가 마지막 발악으로 걸은 저주의 병은 은동에게 매번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 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은동은 조금도 아픈 것 을 내색하지 않았고, 태을사자나 흑호도 걱정은 되 었으나 뭐라고 말을할 수가 없었다.

은동이 제 상태가 아니자 이순신은 하일지달이 맡아 서 치료하기로 하여서 별 문제는 생기지않았으며, 오히려 이순신은 은동의 상태를 염려하곤 했다. 그 러나 려의 저주로 생긴 병이 인간의 의술로 나을 리 없어서 하일지달은 자신이 치료를 하겠노라며 정중 하게 사양했다.

좌우간 은동은 그날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채 혼자 비틀거리면서 해변가를 거닐곤 했다. 오엽이가 은동의 옆을 계속 졸졸 따라 다녔으나 은동은 오엽에게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엽이는 은동의 아픈 듯하고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고 뭔가 감을 잡은 듯, 가끔은 눈물을흘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은동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기도 했고, 가끔 이유도 없이 울면서 은동에게 그러지 말라고 대들기도 했다.

그 정성이 하도 눈물겨워서 감정이 메마른 태을사자 조차도 뭔가 뭉클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은동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닫아 건 것 같았다. 분명 병 때문에몸이 몹시 아파 보이 는데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흑호가 은동에게 허준에게 가서 병을 보이 자고 했으나 은동은 대꾸도 않고 조용히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지만 흑호와 태을사자는 은동의 충격이 큰 것을 알고는 일부러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은동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태을사자는 사계로 돌아갔던 그 의원에게 무슨 방도 가 없나 궁금해했으나 사계에서도 별다른 고별은 오지 않았다. 단 한 번, 의원의 영이 다른 저승사자 에게 부탁해 전갈을 보내기를,은동의 저주는 빛을 쏘이면 악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을사자와 흑 호는 은동에게 바깥출입을 가급적 삼가라고 말했지 만 은동은 그 말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흑호가 다시 밖으로 나가 커다란 산삼을 두 뿌리 캐 어다 주었지만 은동은 그것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 고 홀로 괴로워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을 사자와 흑호는 둘 다 어떻게할 방법이 없어서 속만 태울 뿐이었다.

좌수영 앞 바다 돌산도에 건너오는 난민들은 그 수 효가 날로 늘어갔다. 이제는 무인도였던 돌산도는 백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설 정도가 되었다. 과거 이순신은 전투에서 노획물을 얻을 때마다 우선 적으로 백성들에게 돌리곤 했는데, 그 소문이 퍼져 이제 난민들은 이순신을 몹시 우러러보며 공경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순신은 너그럽고, 행정능력이 치밀하여 조 금의 빈틈도 없는데다가 불패의 명장이라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하여 난민들은 이순 신의 명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랐으며, 이순신의 일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발벗고 나서서 돕곤 했다. 수많은 난민 남정네들이 이순신의 수군에 자원하겠 다고 나섰으나 이순신은 그 중 일부만 거두어들이고 물에숙련되지 않은 사람들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 등 등은 모두 돌려보냈다.

지금 좌수영 부근에서는 많은 함선이 새로 건조되고 있었다. 이순신의 부하인 정걸과 나대용 등의 지시 로 미래를 대비하여 많은 배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 대부분은 몰려온 난민들의 노동력에 기인하 는 바가 컸다. 배를 만드는 데에는 짧아도 몇 달, 길면 일이 년은 걸리는 큰 작업이라 몇몇 부하들은 지금 배를 만들어서 무엇에 쓰겠냐고 했으나 이순신 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미 늦은 것은 알지만, 늦었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편이 낫네.”

이순신은 바야흐로 그가 전에 구상했던 이백오십 척 의 전선단을 만들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 다. 이백오십 척의 전선이 있고 그 전선에 화포를 장비하여 작전을 한다면 패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 순신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단 몇 척의 전선과 협선부터 건조하는 작업을 시작기에 이르렀다.

겨우 일개 전라좌수영에서 그런 대역사를 감당한 다 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였으나 난민들은 이순신 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따랐다. 그리고 총포의 제조를 위하여 난민들은 철광산도개발하였으며 염초의 제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 에 이순신은 심기를너무 써서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흑호는 몸이 낫자 지난번에 고니시에게서 들었 던 인자와의 대화를 해독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다시 염왕령을 발동하여 왜국의 저승사 자 한 명을 붙여 통역을 시켰다. 그 결과를 듣고 태 을사자와 흑호는 모두 깜짝 놀랐다. 물론 그들은 은 동도 그 자리에 불러 함께 내용을 들었으나 은동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어허, 이거 큰일이네. 큰일이야. 마수 놈들은 진작 부터 왜국에 손을 뻗고 있었구먼 그려. 그래서 난리 가 난 거구.”

흑호가 탄식하자 태을사자는 조용히 말했다.

“더더욱 큰 문제는 고니시가 이순신을 암살하려 한 다는 것일세. 그것은 마수가 개입된 것도아니고, 인 간을 시켜 하는 것이니 우리로서는 그것을 막을 방 법이 없네. 다만…….”

그 말에 흑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동이라면..?”

순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동은 냉랭한 목 소리로 외쳤다.

“난 못 해요!”

너무나 단호한 말투였기에 태을사자와 흑호는 조금 멍해 있었다. 그러다가 흑호가 은근한목소리로 말 을 건넸다.

“은동아…………. 네 맘은 이해하지만…….”

“난 못 해!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은동은 흑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외쳤다.

“흠…”

“천기를 위한다고 한 것의 대가가 이런 건가요? 아 버지도 죽고, 호유화는 배신하고! 나는 이런 병에 걸려서 바깥도 나가지 못하고!”

울면서 은동은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밖으로 나 가면 안 된다고 흑호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태 을사자와 흑호는 그런 은동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 다.

“저런저런……. 은동이가 영 변해 버렸네 그려…………. 이거 참.”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먼……. 흠흠..”

태을사자와 흑호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다만 기다 리는 것밖에는・・・・・・・

은동은 밖으로 달려나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힘든 일을 짊어져야만하는 것일 까? 도대체 왜? 처음에는 재미도 있고 신나기도 했 지만, 이제는 만사가 다 귀찮고괴로울 뿐이었다. 가 뜩이나 심기가 산란한데 몸까지 아프니 은동은 정말 로 버티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제는 몸이 검푸르게 변해가면서 군데군 데에서 썩어 가는 듯한 악취를 풍겼다.하지만 은동 은 누구에게도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아프니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괴로워・・・・・・괴로워…………. 그렇지만 이건 저주로 걸린병이니 세 상의 누가 고쳐줄 수 있겠어? 빛을 쐬면 안 된다 니……. 나가지도 못하고 나을지안 나을지도 모르 고…… 대체 이게 뭐야! 죽어야 나을까?’

은동은 바닷가로 나가 다시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은동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절벽에앉아 돌 하 나를 바다에 던졌다.

‘어머니…………….’

왜병에게 죽음을 당해 코만 남은 어머니. 은동은 돌 이 풍덩 하고 가라앉는 것을 보고 다시또 돌을 던 졌다.

‘아버지………….’

호유화에게 맞아 온몸이 으스러지고 고니시의 부하 들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 은동은 또 하나의 돌을 던졌다.

‘무애스님…….’

려충에 온몸이 뚫려 벌집이 되고 몸에 불이 붙은 채 려를 껴안아 태우던 무애스님. 그리고자신이 화살을 쏘아 려와 함께 무애스님을 죽게 만들었다. 이번에 은동은 유달리 큰 돌을집어 던졌다.

‘그리고 호유화…………….’

자신을 좋아했다고 하면서도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 과 흑호를 공격한 호유화. 거기에다가 저승에서 사 라져 버렸다는 울달과 불솔, 백면귀마에게 죽은 금 옥 누나, 그리고 이제는 술법도바닥났고 죽어도 고 치지 못할 몹쓸 병까지 걸린 자신에 이르기까지………… 숱한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은동은 도래질을 치면서 그 자리에 다시 엎어져 울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멀리 가버렸 어. 모두 다…………. 나는 재수없는 놈인가봐………….’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등을 툭 건 드렸다. 은동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생글생 글 웃고 있는 오엽이었다.

“의원 나리 왜 울고 있나요? 날씨도 이리 좋은데. 울지 말아요.”

그러나 은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엽이는 그런 은동을 보고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리 고 오엽이는 은동에게서 조금 떨어진 앞에 앉아 은 동을 바라보았다.

“울지 마세요…… 나으리 같은 분이 울면 어떻게 해요? 신통한 재주를 많이도 지니신 분이 슬퍼하시면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무엇을 보고 살라고.”

오엽은 말하고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언제 오엽이 가 그렇게 예뻐졌는지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얼굴이 었으나 은동은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 러자 오엽은 은동에게 풀죽은목소리로 말했다.

“힘든 일 겪으신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처져 있으면 어떻게 해요. 세상 걱정을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네?”

오엽의 말에 은동은 무뚝뚝하게 되받았다.

“세상 걱정을 혼자 다 짊어져서 그래.”

오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은동은 오엽이 귀찮아졌다. 기분 같아서는 오엽이에 게 자신의 일들을 모조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은동 은 그것도 귀찮아서 나오려던 말을 꿀꺽 도로 삼켰 다. 그리고 한 마디만 했다.

“내 곁에 오지 마. 내 곁에 오는 자는 전부 불길해 져.”

“에이, 설마・・・・・・ . 나는 믿지 않아요.”

“나중에 후회 말고 썩 물러가! 병이 옮으면 어쩌려구!”

“무섭지 않아요! 제가 간호라도 해드릴………….”

“귀찮아!”

은동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오엽은 울상이 되어서는 흑 소리를내며 뛰어 갔다. 은동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으나 곧 다시 괴 로워졌다. 자신을 두고 돌아가는이 모든 일들을 도 저히 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은동은 오엽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벼랑 아래로 갔다. 아래에 철썩거리며 파도가 치는것이 보였다. 물은 무척이나 맑고 시원할 것 같았다.

‘시원하겠구나…..’

은동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벼랑 끝으 로 발길을 옮겼다. 가슴이 두근두근했으나 그보다 는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을 메운 허무함과 괴로움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다.

죽자. 저승에 가서 아버지도 만나고 어머니도 만나 자. 그리고 저승에 가면 호유화를 만나지않아도 되 고,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 말려들지도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이미 저승에도 가 보았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천천히 천천히………평지를 걷는 것과 똑같이]…….’

두어 발자국을 더 내딛자 발밑이 문득 허전해졌다. 은동은 찌르르 하고 울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이제는 고통도 없고 괴로 운 것도 없겠지 하는 생각을하면서………….

그날 밤, 밖을 한 번 둘러보고 오겠노라고 나갔던 흑호가 갑자기 방으로 뛰어드는 바람에태을사자는 깜짝 놀랐다. 둘은 모두 좌수영 내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둔갑을 하여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큰일이우. 아무래두 낌새가 이상허우.”

“무슨 낌새가 말인가?”

“전에 고니시가 보낸다던 자객 말이우. 놈들이 온것 같수.”

“뭣이?”

태을사자도 잠시 난감해졌다. 그들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건 마수들이 시킨 일도 아니고 인간들이 한 일이 니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구 보고만 있을 거유? 이순신이야말 로 왜란종결자인데 이순신이 죽으면 어쩌란 말유!”

“흠… 그때를 대비하여 은동이가 있는 것 아닌 가?”

“하지만…….”

흑호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방문이 열리며 오엽이 가 뛰어 들어왔다. 흑호는 조금 놀랐지만 태을사자 는 침착했다. 둘 다 인간 모습으로 둔갑을 하고 있 었기에 염려될 것이 없었던것이다.

“아이구! 야단 났어요!”

“무슨 야단이 났다고 그러느냐?”

“은동이……………. 아니, 의원 나으리가…………….”

“엉? 은동이가 뭘 어째?”

흑호, 아니 범쇠가 눈을 부릅뜨자 오엽이는 흑흑 흐느꼈다.

“의원님이 바다에 뛰어 빠졌나 봐요! 지금 해변가에 밀려나와 있는 걸 보았어요!”

“뭐 ・・……뭐라구!”

흑호가 대번에 방문을 박차고 둔갑법을 써서 나가려는 것을 태을사자가 붙잡았다.

– 조심하게! 저 아이가 보고 있는데 술법을 사용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 저 아이는 괜찮어.

– 뭐가?

– 우리 정체를 대충은 안다니깐?

– 어허, 그래도!

태을사자는 흑호를 나무라고는 오엽에게 말했다.

“어디냐! 앞장서거라!”

그리고 흑호도 따라나서려는 것을 태을사자가 말렸 다.

– 지금 이순신을 해치려는 자객이 오고 있다고 하 지 않았나? 그 자객을 좀 자세히 살피게.하필 이럴 때 은동이가 물에 빠졌다니… 그래도 개입하지는 말고 급해지면 내게 알리게.

흑호는 당황한 끝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 오엽이는 태을사자와 함께 은동이가떠밀려 왔다 는 해변으로 달려갔다. 과연 은동이는 해변가에 떠 밀려 와 있었다.

오엽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먹였고 태을사자는 급히 은동의 숨이 붙어 있는가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은동은 죽지 않았으며 몸이 좀 젖은 것 외에는 특별히 상처를 입지도 않은듯했다.

“어때요? 네?”

오엽이가 다시 다급하게 묻자 태을사자는 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염려 말아라. 별 일 없을 것 같다.”

서둘러 태을사자는 은동의 몸을 들쳐업었다. 그때 태을사자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음?”

그것은 바로 하얗고 길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이었 다. 그것은 은동의 몸에 붙어 있었는데 태을사자는 그것을 보고는 얼굴색이 변했다. 그것은 바로 호유 화의 머리카락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오엽이 묻자 태을사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얼버 무렸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그 머리카락을 다시 만 져보며 틀림없이 호유화의 것인지 기운을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몹시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호유화가 은동을 물에 빠뜨렸단 말인가? 아니면 호유화가 은동을 구해 주었단 말인가? 그러 나두 가지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치려 했으면 굳이 물에 빠뜨릴 필요도 없었을 것 이고…… 은동의 아버지까지 죽인 판에은동이를 구 해주었을 리도 없으니…… 괴이한 일이로구나……………’

아무튼 태을사자는 은동이를 업으며 오엽이에게 물 었다.

“이 아이를 발견했을 때 이상한 것을 보지 못했느냐?”

“음…… 그러니까… 음…… 잘못 본 거 같은데 ・・・・・・ . “

“개의치 말고 어서 말해 보거라.”

“음… 희미하게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을 본 것 같아요. 그래서 놀라서 해변 아래로 내려 가본 거예요. 근데 아무도 없었어요. 허깨빈 줄 알 았는데…………. 에구, 무서워라.”

그 말을 듣고 태을사자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호유화가 은동을 구해준 것이 틀림없는데…………. 도대체 호유화는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러는 것일까?

“되었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그리고 공연히 소란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안 된다.알겠느냐?”

“예…………….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정말?”

“괜찮을 것이니 너는 먼저 달려가서 방을 좀 치우고 더운물을 준비하거라.”

“예!”

오엽은 대답을 하자마자 쪼르르 뛰어갔다. 그것을 보고 태을사자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도 은동이를 끔찍하게 따르는구나. 거참…….’

기왕지사 호유화가 적이 되었으니 저 아이가 장차 은동이와 함께 살면 어떨까 하고 태을사자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김새도 꽤나 예쁘장한데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여 좋은 배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엽이가 사라지자 태을사자는 곧 법력을 조금 넣어 은동의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은동은금방 정신을 차렸으나 병마에 시달리고 물에 까지 빠진 그 모습 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신이 드느냐?”

태을사자가 묻자 은동은 눈을 번쩍 뜨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몹시 어두운 안색이 되어 서 다시 눈을 감았다.

“사자님이 날 구했나요?”

“아니다.”

“그럼 누구죠?”

태을사자는 묵묵히 은동의 손에 호유화의 흰 머리털 을 쥐어 주었다. 그것을 보고 은동은 앗하는 듯했지 만 다시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어째서 호유화가 자신을 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아직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머리가 자유롭게 돌지를 않았 다.

“너 어쩌다가 물에 빠졌느냐?”

“왜 살렸죠? 그냥 놔두지…….”

“음…… 그러면 네가 스스로 물에 뛰어든 게냐?”

그러자 은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랬느냐? 그토록 괴로웠느냐?”

은동은 눈을 감고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괴롭다고 죽으려 드느냐? 죽으면 편할 줄 아느냐?”

태을사자가 힐책하자 은동이 버럭 소리쳤다.

“죽어보아야 별 거 아니잖아요! 저승에 가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둘 중 하나 아닌가요!”

그러자 태을사자는 천천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 다.

“너는 저승을 구경해 보아서 죽어도 별것이 아닐 줄 알았느냐?”

은동은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조용히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안 되는 것을 그랬구나. 역시 너처럼 어린아이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랬구나…….”

그러다가 태사자는 갑자기 은동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저승을 바깥에서 잠깐 구경해 보았다고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 고 할 수 있느냐! 네가 누구냐? 은동이지? 죽으면 은동이는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영혼이 불멸이고 윤회한다고 해도 죽으면 어쨌든 은동이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거야. 영혼이 있고 윤회한다고 죽음이 아닌 줄 아느냐?”

“저승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만나도 너를 알아보 기도 어려울 것이고 너도 알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살은 큰 죄이니 아무리 공을 세운 너라도 지옥에서 끝없이 시달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구요? 어째서요!”

“인간이 죽으면 대부분 그 기억도 씻어지는 것이다. 영혼이 불멸이더라도 죽은 사람은 심판을 거친 뒤에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영혼이 불멸이더라도 은동의 아버지 강효 식이란 사람은 없는 것이란 말이다! 네가 죽어도 그것은 마찬가지!”

“안 돼요! 그럴 수는・・・・・・.”

은동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흐느끼다가 다시 소리를 쳤다.

“제기랄! 신도 나쁘고 다 나빠! 왜 인간을 그리 해 놓은 거야! 난 차라리 마수들의 편을 들거야!”

“그만!”

태을사자가 무섭게 소리치자 은동은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너무도 힘들고 너무도겁나고 너무 도 괴로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일까? 무 엇을 해야 할 것인가?

태을사자는 후 하고 한숨을 쉰 다음 조용히 말을 건 넸다.

“은동아, 저기 불빛을 봐라.”

태을사자는 돌산도 앞바다의 불빛을 가리켰다. 그곳 에 모여든 난민들의 마을에서 점점이 흐릿한 불빛들 이 눈에 들어왔다.

“은동아,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있던 자이 다. 사람들은 그래서 나를 무섭고 꺼려하는 존재로 여기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나는 죽음과 가까 이 있어서 누구보다도 인간의 삶을 사랑해 왔고 동경 해왔다고 여긴다. ……………인간의 삶은 짧아. 그리고 숱한 이별과 고통과슬픔이 있지. 그러나 그것은 무 한히 계속되어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되는 우리 같은 존재들의 삶보다는 나은 것이란다. 적어도 인 간적인 감정으로는 말이다.”

말하면서 태을사자는 다시 바다를 가리켜 보였다.

“삶이란 무엇일까? 저 불빛들을 보아라. 저들은 이 난리 때문에 모두 너같이, 또는 너보다심하게 슬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치 고 병들고 굶주린 가엾은 존재들이지. 그래도 그들 은 살아가려 한단다. 앞으로의 삶이 더 힘들고 어렵 고 슬픈지도 모르지만그들은 살아가려고 해. 그것 이 삶의 위대함이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라 고 나는 믿는단다……………..”

“죽는 게 무서울 뿐이겠죠, 그들은…….”

은동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태을사자는 고개 를 저었다.

“그럴까? 모두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사실이 지. 하지만 죽음이 왜 무서운 것일까? 살려는 맹목 적인 의지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살려는 의지는 뭘까? 은동아, 죽음은 삶이끝나는 그 순간일 뿐이란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 것이고, 그 때 문에 죽음은 오히려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 는 것이 될 수도 있단다…….”

태을사자는 잠시 쉬었다가 계속 말했다.

“너는 느낀 적이 없느냐?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 며 무엇인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 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주어진 것이 얼 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생각해본적 있느냐? 물론 인생은 짧다면 짧은 것이지. 그러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 들을 기억하고 좋아할 수 있는지…………. 그래, 죽음은 두려울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고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일수록 죽음은 더더욱 두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닐 까? 그런 삶의 기회를 잃고, 삶의 기회를스스로 팽 개치는 짓을 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여기니?”

“나는・・・・・・.”

은동이 대답을 잘 하지 못하자 태을사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저승에서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믿느 냐? 행한 죄를 따져 상벌을 주는 것이라여기느냐? 그래, 그것도 있지. 그러나 그 잘하고 못한 것은 얼 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는가 하는 것과 비슷하단다. 인간의 관점과도 비슷하지만, 또 다른 면이 있지.”

“어떻게요?”

은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을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령 너는 꼭두각시놀이나 사당패들의 탈춤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 무대는 바로 이세상, 생계 와 같은 것이지. 이건 비유일 뿐이다만……. 어떤 인형이나 탈은 멋지게 만들어져서 많이 나오는 경우 도 있고, 어떤 인형이나 탈은 급하고 조잡하게 만들 어져서 잠깐 나오고들어가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면 그 조잡하고 조금만 나오는 탈이나 인형은 아무런 가치도없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배역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주인공도 빛을 발하지 못하며 어떤 놀이라도 재미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란다. 결국 보는 사람들은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줄 알겠지만, 사실은모두가 똑같이 중요 한 거야. 아무리 작고 조잡해 보이는 탈이나 한 대목밖에 나오지 않는작은 인형이어도 말이다. 알겠 니?

뭐 비유가 좀 이상하기는 하다만, 생이란 건 그런 거야. 인간의 삶에 있어서 슬픔과 기쁨의크기는 누 구에게나 거의 같단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즐겁고 잘 사는 것 같은 인간이라도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고, 아무리 비참한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기쁨 과 즐거움이 있는법이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 하지 않는다면 그 크기는 반드시 지켜진단다. 그것 은 바로우주를 지배하는 인과의 법도이기도 해.”

그러자 은동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는 무슨 잘못을 해서 그렇게 죽어야 했나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도 대체 그분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었다는 거예요?”

은동이 항의를 했으나 태을사자는 차근차근 계속 이 야기했다.

“물론 슬프고 안된 일이다. 나같이 상막하고 냉정한 놈도 그런 정도는 물론 알지. 그러나 말이다. 그분 들이 정말 살아가면서 별다른 기쁨이 없었던 것 같 으냐? 그분들은 너 같은 훌륭한 아들을 두지 않았 느냐?”

그 말을 듣자 은동은 화가 났지만 저절로 얼굴이 붉 어지는 것 같았다. 태을사자는 그런 은동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생계에는 다른 어느 계에서도 볼 수 없는 기적이있단다. 자신 들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나서 그 생명이 계속 살아 나가는 신비함 말이다……………닮았으면서도 같지는 않 은 또 다른 존재가 계속 뒤를 잇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 우주를 지탱하는 원동력이고 기둥이기도 하단다. 변화와 발전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 는 것이니까….”

그러나 은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은동은 그 런 어려운 이야기를 듣자 다시 화가 나고 슬퍼졌 다.

“나는・・・・・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런 것은 몰라 요. 좌우간 나에게는 부모님이 계셨는데두 분 다 비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 나는 결국 고치지도 못 할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는 것.그리고…… 그리고…… “

“말해 보거라.”

“좋아하던 누나….. 아니, 아줌마………… 아니 할머니 가 있었는데 그 요물이 원수가 되었다는것…. 그 리고 나를 해치려 했다는 것 말이에요. 그런데 또 날 구한 게 호유화라구요? 도대체 왜 그런 거죠? 그리고 뭔지는 잘 몰라도 일이 이렇게 크고 중대한 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것밖에는요…………….”

은동은 다시 울먹였다.

“몰라요, 모르겠어요.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고, 괴 로워 죽겠어요.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왜내가 이 난리를 짊어진 이수사님을, 아니 이 생계와 우주를 책임져야 하죠? 왜 내가, 이 꼬락서니가 된 내가 말이에요…..”

“은동아…….”

태을사자가 불렀으나 은동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 다. 뭔가 생각하는 듯 눈빛이 빛났다. 태을사자가 궁금해하며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멀리서 흑호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구! 큰일이우! 놈들은 대단하우!

– 왜 그러나?

– 놈들은 파수꾼들을 다 따돌리구 좌수영으로 금방 이라도 들어갈 것 같수! 이대루라면 금방 들어가 서 이순신을 죽이고 말 것 같으우! 아이구, 답답해 미치겠네!

– 조금만 기다리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 내가 사람들을 좀 깨우는 것만도 안 되겠수? 이대로면 이순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구말 거여!

“왜요……?”

태을사자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은동이 물었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은동에게 말했다.

“이순신을 노리고 자객들이 온다는구나. 네가 어떻 게 좀 해줄 수 없겠느냐?”

그러자 은동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이제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었는데 또뭔가 하라는 것인가? 은동은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그 순간 이 순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명장으로서의 이순신이 아 닌, 예전에 자신은 손주처럼 귀여워해 주던 모습. 그리고 난민들을걱정하던 모습. 그리고 병상에 누 워서 신음하던 모습…….

하지만 은동은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드디어이번만은 이순신을 구해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갈게요.”

그러자 태을사자는 두말 않고 은동에게 둔갑법을 걸어 속히 뛰어가게 했다. 은동과 태을사자가 좌수영에 막 도달했을 때, 태을사자는 전심법으로 흑호를 불렀다.

– 자객은 어디에 있나?

– 막 이순신의 관사로 들어가려는 중이우. 그 집 지붕에 있수.

– 몇 명인가?

– 두 명뿐이우. 그런데 몸놀림이 대단허우!

– 급하게 되었군!

태을사자는 원래 은동으로 하여금 소리라도 지르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선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그 자객이 그 사이에 이순신의 관사에 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시간이 늦을지도 몰랐다.

태을사자는 급히 은동에게 전심법으로 사태를 일러 주려는데 흑호가 나타났다.

“제길! 이러고 있으면 어쩐단 말유! 은동아! 어서 가랏!”

흑호는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무지막지하게도 은동의 몸을 잡고 집어 던져 버렸다. 돌연 은동은 흑호의 무지한 힘에 의해 지붕 위를 지나며 날아가려 했 다. 그것을 보고 태을사자가놀라서 법력을 발하여 은동의 몸은 간신히 허공에서 멈추어졌다.

“흑호! 은동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제길, 태을 당신은 허수아비유? 다 그럴 줄 알구 그랬지. 급한 걸 어떡해?”

더 이야기를 할 틈도 없었다. 은동은 얼결에 지붕 위로 올라서기는 했으나 아직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붕 위에 있던 자객인 겐키와 다른 동료 인 자는 난데없이 아이 한 명이 지붕 위로떨어져 내리 자 깜짝 놀랐다. 은동이도 겐키의 모습을 보고는 놀 라서 잠시 균형을 잃고 하마터면 지붕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일류 인자인 겐키의 행동은 과연 재빨랐다. 겐키는 재빨리 은동에게 다가들면서 품에서 날카로 운 비수를 꺼냈다. 또 다른 한 명은 쇠사슬이 달린 낫을 휙하고 휘둘렀다. 그 비수의 빛이 달빛에 반사 되어 번쩍이는 순간, 은동은 두려움에 질려 버렸다. 아무 것도 할 수없었다. 오직 한 가지말고는・・・・・・・

막 겐키의 비수 날이 은동의 목에 닿는 순간, 겐키 의 몸이 멈칫했다. 눈만 남기고 얼굴 전체를 감싼 검은 천 너머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겐키의 눈빛이 출렁였다. 그리고 겐키는 곧뻣뻣한 시체가 되어 지붕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인자도 쓰러져 지붕 아래로 굴렀다.

은동은 목에서 가는 피를 한 줄기 흘리면서 부들부 들 몸을 떨었다. 겐키의 행동이 너무나빨랐기 때문 에 흑호와 태을사자도 은동이 위험하다고만 여겼지,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들도 겐키가 지붕 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난 다음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태을사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은동아, 괜찮으냐?”

“나…… 나…… 주문…… 주문을…….”

은동이 부들부들 떨며 말하자 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대왕이 가르쳐 준 주문을 외웠구나. 흠…… 잘 했다.”

그 사이에 흑호는 곧 아래로 내려가서 겐키의 시체 를 마치 헝겊인형처럼 가볍게 뒤적거렸다.

“즉사했구먼. 헌데 역시 내가 구했던 그 왜병이로군…………참으로 묘한 운명이구먼…”

태을사자는 은동의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냐? 은동아? 괜찮으냐?”

“내………… 내가…… 저 사람들을………… 저 사람들을……”

은동은 계속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은동은 막 주문을 외우는 순간 겐키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긴장되어 살기를 품던 그 눈빛이 허탈해지면 서 풀려나가는 모습을 은동은똑똑히 기억하고 있었 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웠다.

‘죽음……. 이것이 죽음인가? 이게…………?’

은동은 몸을 떨면서 지붕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 다. 저주로 인해 몸이 아팠지만 신력이 있는지라 그 정도는 수월한 일이었다. 은동은 죽어 몸이 굳어가 고 있는 겐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비록 적이 었지만 방금 전까지 펄펄하게 움직이고 있던 몸이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 굳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의 인자도 마찬가지였다.

은동은 원래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잘했다, 은동아. 안 그랬으면 네가 위험했을 거여.”

흑호의 말을 들으며 은동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겐 키의 죽은 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했다구? 그래… 잘한 걸까? 이 사람은….. 죽으면서 나를 원망했겠지. ・・・・그리고 이사람의 아 들이 있다면 나를 원수로 알겠지. 호유화가 내 원수 인 것처럼….. 그리고…….’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거짓말! 거짓말! 죽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큰 거 라면 왜 이 사람을 죽이게 했죠? 사는 게그렇게 중요하다 해놓고는!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왜군들 과 마수들이 나쁜 거라고 말해 놓고서는!”

은동은 다시 생각이 얽히기 시작했다. 태을사자는 은동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은동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건가요? 이런 병에 걸리 고 다 죽어가고 부모님도 없는 나를…………? 그것도 모 자라서 이젠 살인자, 왜군, 마수들과 똑같은 놈으로 만들었어! 나빠! 다 나빠!”

“은동아…….”

태을사자는 은동을 타이르려 했지만 은동은 순식간 에 뒤로 몸을 돌려 흑호와 태을사자를 보지도 않고 달려가 버렸다.

원수…… 죽음………… 호유화…. 아버지………. 자 객…… 천기… 난리……. 은동의 머릿속은뒤죽박 죽 되어갔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정말로 미쳐 버 릴 것만 같았다.

다음날 겐키와 이름모를 인자의 시체는 녹도만호인 정운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운은이순신의 신 경이 다시 쇠약해질까 봐 그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 하고는 이순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팎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여 이순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 해 애썼다.

그리하여 일본 최고의 인자이며 마수들의 공격에서 도 버텨낸 겐키가 열살 남짓한 한 소년에의해 죽음 을 당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일이 생겼다. 은동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은동은 태을사자와 흑호 가 겐키의 뒤처리를 지켜보는 틈을 타서 짧은 낙서 같은 글줄기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사라져 버렸 다. 거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다운 서툰 필체로 다음 과 같이 적혀 있었다.태을사자와 흑호는 다른 사람 들이 볼까 봐 뒷산으로 올라가서 편지를 뜯어보았 다.

– 어제는 미안했어요. 나는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생각해 보려 합니다. 걱정 하지 마세요. 죽지는 않을 거예요. 태을사자님이 해주신 말씀 잊지 않고 있습니다.내 몸에는 빛을 쐬면 나쁘다면서요? 그러니 빛을 안 쐬고 좀 생각 해볼게요.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어 요. 너무 어려서 그런 것인지, 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 다. 빨리 크고 싶습니다. 어른이되면 이해할 수 있 을까요? 알 수 있을까요? 뭔가 결심을 할 때까지 나는 아무 것도 하지않을 작정입니다. 억지로 시키 지 말아주세요. 이제 저는 더 잃을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요.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어디로 가더라도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발요. 흑호 아저씨와 하일지달님께도 안부전해 주세요. 이만.

“어허…….”

그 편지를 보고 흑호는 탄식했다. 그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한 번 사방을 둘러보다가 태을사자 에게 말했다.

“불쌍하게두….. 이거 어떡해야 하나? 응?”

태을사자는 역시 침울한 목소리지만 짧게 말했다.

“할 수 없지. 그냥 놓아두세.”

흑호는 분에 못 이겨 쾅 하고 땅바닥을 내리쳤다.

“제기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여! 빌어 먹을! 제기럴! 은동이는 어린 나이에 너무가엾게 되었잖어! 이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결정이라구!”

“그건 그러네.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되다니…………. 하지만………… 하지만 말이네..”

태을사자는 들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덧 붙였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네. 은동이는 너무 어려. 그리고 너무 큰책임을 졌 고, 너무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짧은 시간에 겪었 네. 은동이도 스스로를 되돌아볼시간이 필요하다 네. 물론 은동이는 참으로 총명하고 좋은 아이일세. 하지만 이제껏 은동이는스스로 생각해서 무엇을 할 만큼 크지 않았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를 돌이켜 볼 만한 때도되지 않았을까?”

“제길! 하지만 난리는 어떡하라구! 마수들은 어떡 하라구!”

“우리는 너무 은동이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워왔네. 하지만 그렇다고 은동이에게 이해하지도못하는 일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아이는 천성 이 몹시 선하고 마음도 여리네. 그런 어린아이에게 벌써부터, 스스로 뭔가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살인을 하라고 시키고 무시무시한 일들을 겪 으라고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흑호는 갑자기 그 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허어…… 내 잘못이우. 내가 그렇게 만들었수…..”

흑호는 어제 은동이를 자객에게 집어던져 은동이가 그런 중요한 생각의 고비에 살인을 하게만든 것을 깊이 뉘우치는 것 같았다. 그 모양을 보고 태을사자 는 흑호를 달랬다.

“그만두게… 나는 믿네. 분명 애쓰고 노력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야……. 그것을 나는 믿네.”

“무슨 말이유?”

“전에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작은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은 그릇된 것 같고 올바르지못한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네. 하지만 천기는 옳다 고 나는 믿네. 천기는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옳은 방 향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고 믿는다는 말일세. 모두가 노력하고 애쓴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리될 걸세. 은동이도 어떤 것인지는 몰라 도 반드시 옳은 결단을 내리고 옳은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야…….”

“하지만 은동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쩌우?”

흑호는 대들 듯이 물었지만 태을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것이 옳은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제기랄, 나는 모르겠수. 그러면 우리 둘만 애써야 한다는 건데? 우리 둘만 가지고 될까? 호유화도 우 리편이 아니고, 인간이 무슨 짓을 하건 우리는 더 이상 간섭할 수 없는 것 아니우!”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호유화가 다시 은동이를 해치려 한다면 어쩌우? 응?”

“그러지는 않을 것 같네.”

그러면서 태을사자는 그때 바다로 뛰어내린 은동을 구한 것이 호유화였을 거라는 사실을 흑호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흑호도 놀랐다.

“어째 그런 일이? 도대체 알 수가 없구먼. 호유화 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지……………. 혹시 살려 두고서 실컷 놀리고 괴롭히다가 없애려고 마음을 바 꾼 건 아닐까? 거 왜 있잖수, 고양이도 쥐를 가지고 놀다가………….”

태을사자가 안색을 바꾸며 흑호의 말을 막았다.

“그만두게.”

흑호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자 태을사자는 다시 천천 히 말했다.

“어쨌건 호유화가 은동을 해칠 의사는 없다고 나는 생각되네. 좌우간 우리도 은동이 곁에무언가 보내 어 은동이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 보기는 해야 겠지. 저승사자를 몇 명 보낼생각이네.”

“나두! 나두 도깨비랑 금수들을 좀 풀어야겠수.”

“그래……..”

흑호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태을사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은동이를 생각하는 것은 나 못지않은 것 같 은데………… 냉정하신 저승사자께서 웬일이시우? 꼭 천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태을사자는 정말 오래간만에 수줍은 듯한 미소를 살짝, 아주 살짝 지어 보였다.

“그러는 자네는?”

태을사자가 되묻자 흑호는 껄껄 한바탕 웃었다.

“나두유・・・・・・ 처음에는 마수 놈들이 밉고…… 일족의 원수도 갚아야겠다고 해서 끼어들었지만…………. 물론 지금도 그걸 잊은 건 아니우. 하지만…… 지금은 왠 지 또 모를 것이……. 제길, 말이 안 되누먼. 허 …….”

흑호가 말꼬리를 슬그머니 흐리자 태을사자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도 그렇네. 좌우간 은동이가 무사해야 할텐 데…………. 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네. 그러나 어쩌겠는가? 스스로의 길은 스스로가 정하 는 것이니……………”

태을사자의 말에 흑호는 푸욱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외쳤다.

“은동아. 어딜 가든 무사하기만 해라! 항상 편안해다우! 그리구…… 그리구 꼭 돌아오너라!”

흑호의 말은 메아리가 되어 산에 여기저기 울려퍼지다가 힘없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