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65화
“제갈세가의 천장건(千丈鍵)!”
이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입에서 제갈수현의 손에 들린 묵색 봉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제갈수현으로선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멈칫 멈춰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묵색 봉과 이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천장건(千丈鍵).
지금 이드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은 세가의 물건이었다.
더구나 단순한 묵색의 봉이 아니라 천장건이란 거창한 이름답게 세가의 소가주를 나타내는 신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천장건은 평범한 봉이 아니었는데, 단봉(短棒)과 같은 단순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재질이 심해철목(深海鐵木)임과 동시에 그 사이사이에 가늘은 한철(寒鐵)이 아로 박혀 있어 그 탄성과 강도가 웬만한 보검 이상이다.
만약 상대가 천장건을 단순한 단봉으로 보고 덤볐다가는 그만한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단단하다는 것만으로 소가주의 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다음 두 가지인데, 첫째가 그 이름 그대로 천장(千丈)—실제로는 오장(五丈- 약 15.15m)이지만, 단봉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기관진법 하면 제갈세가를 떠올리는 만큼 제갈가의 인물들은 대개가 진법에 능통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여러 진법과 기관을 살펴야 했는데, 아무리 진법에 능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기관을 자신이 직접 만질 수는 없는 일이다.
대신 손에 쥔 검이나 막대로 기관을 살피는데, 이때 이 천장건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해철목과 한철로 만들어져 놀라운 탄성과 강도를 자랑하는 만큼 이만한 장비도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둘째가 천장건에 아로 박혀 있는 한철이었다.
이 한철은 단순히 탄성과 강도를 높인다는 명목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철이 박혀 있는 위치가 이루는 하나의 진세가 더욱 중요했다.
반법륜세(反法輪勢)라는 이 진법은 제갈세가의 독문진세로서 사상(四象)과 팔괘(八卦)를 기본으로 이뤄진 진세에 반대되는 기운을 뿜어내기에 진법의 공부가 얕은 진세는 반법륜세의 기세 앞에 본래의 위력을 전혀 내비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상진(四象陣)이나 팔괘윤회진(八卦輪廻陣) 등의 가벼운 진세는 풀기 위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몇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강호사대세가라는 말과 제갈세가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동안 천장건에 대한 내용은 완전히 잊혀진 지 오래였다.
헌데,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이드라는 예쁘장한 소년이 그런 천장건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눈에 알아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제갈수현 자신조차 가주를 통해 처음 보았을 때 그 정체를 알지 못했던 천장건을 말이다.
“어떻게…. 그걸….”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제갈수현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표정을 떠올리게 만든 이드는 대단하단 표정으로 제갈수현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장건을 가지고 있다니…. 제갈 형이 세가의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소가주일 줄은 몰랐는데요.”
“아, 아니야. 내가 소가주라니…. 무슨 말을, 내가 천장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건 이번 임무의 위험성 때문에 가주께서 특별히 내리신 거야…. 아니, 그것보다 이드 네가 어떻게 이 천장건을 알고 있는 거지?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알아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 어디까지나 예외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천장건에 대해선 저도 할아버지께 전해 들었던 것뿐이에요.
거기다 제갈 형이 가지고 있길래….”
“… 그래도 천장건을 한눈에 알아보기가…..”
이드의 대답에 그래도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던 제갈수현이었지만,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제갈수현을 중심으로 그 자리에 서버린 일행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런 문제보다 경운석부의 발굴이 더욱 급한 문제라는 생각에 잠시 궁금증을 접은 제갈수현은 손에 든 천장건을 슬쩍 흔들어 그 길이를 삼장(三丈) 정도로 늘린 후 그 끝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여 사방을 천천히 살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숨만을 내쉬며 뒤따랐다.
기관을 찾는 일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자는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행들의 협조 덕분이었을까.
일행들이 출발하여 이백여 미터를 막 넘었을 때였다.
앞으로 뻗은 천장건을 순간적으로 거두어들인 제갈수현이 급히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진법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행여나 한 사람이라도 움직일까 급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갈수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들의 발은 땅에 붙어 버린 듯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이드 역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는 전방 통로의 한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제갈수현의 신호가 있기 전 이드는 천장건이 지나간 허공의 한 지점이 여름날 아지랑이가 일어나듯 일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덕분에 제갈수현의 말이 있기도 전에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일행들을 멈춰 세운 제갈수현은 손에 든 천장건의 길이를 한 장 더 늘려 신중한 자세로 앞길을 막고 있는 진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행동은 진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그들로 하여금 “미친 사람 아니야?”라는 의문이 절로 들게 할 정도로 엉뚱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 행동을 이해할 사람은 없었다.
이드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록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구궁진이나 미환진 등의 간단한 진세를 펼치고 거둘 줄 아는 이드였기에 제갈수현과 같이 앞에 나타난 진을 살펴볼 수 있었다.
“…. 어려운 진법이네요. 우선은 삼재(三才)가 들어 있는 것 같긴 한데….”
“…. 맞아, 거기에 오행(五行)이 숨어있지. 하하하…. 이드 너 대단하다. 진법도 볼 줄 아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의견을 구하는 듯한 이드의 말을 들은 제갈수현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칭찬의 말을 건네며 지금까지 딱딱히 굳히고 있던 표정을 조금 풀어 보였다.
이드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기관진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몰린 것 같았지만 지금의 말로 그 부담감이 조금 줄어드는 느낌을 받은 제갈수현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부담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것 몇 가지만 배웠어요. 진법이란 게 여간 어려워야 말이죠.
근데, 삼재에 오행을 숨긴 진이라면…. 무슨 진이죠?”
이드는 제갈수현의 말에 간단히 답하며 진법의 정체를 물었다.
혹시나 파해법을 알고 있는 진이 아닌가 해서였다.
“… 오행망원삼재진(五行忘源三才陣)….. 아마 그 이름이 맞을 거야.
위험하진 않은 진인데… 대신에 엄청 까다로운 녀석이지.”
“후움… 이름만 들어도 그런 것 같네요.”
이드는 그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들어보지 못한 진세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진을 푸는 건 전부 제갈수현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 진에 들어서면 우선 삼재미로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세 갈래의 길로 흩어지게 돼.
하지만 곧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필히 되돌아가려고 하게 되거든.
하지만 그게 함정이야. 사람들이 돌아서는 순간 삼재미로의 진은 오행망원의 진으로 바뀌어 한 번 더 사람들을 다섯 갈래의 길로 흩어 버린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사람들은 하나하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거지.”
진법에 대해 설명하는 제갈수현의 말은 곧 통역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황당하단 시선으로 전방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진법이라지만 저 일직선의 통로에서 어떻게 뿔뿔이 흩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진법이란 게 그런 것.
통로에서 시선을 거둔 일행들은 기대의 시선으로 제갈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대표해서 문옥련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어왔다.
“파해 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까다롭기만 할 뿐 특별히 위험한 점은 없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파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나머지 분들은 잠시 뒤로 물러서 있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드, 넌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당연하죠.”
이드는 제갈수현의 말에 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갈수현의 옆에 서서 오행망원삼재진을 차례차례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제갈수현의 말이 맞았던지 그와 이리저리 돌을 던져보고 두드려 보길 수차례 행한 결과 오행망원삼재진의 파해 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드는 뒤쪽에 서 있는 라미아를 자신 쪽으로 불렀다.
진을 파해하기 위해서였다.
“내 말 잘 들어, 라미아.
제갈 형이 신호하는 동시에 내가 지금 지명하는 다섯 곳을 파괴시켜야 돼.”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죠. 슬레이닝 쥬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내뻗은 라미아의 손 앞으로 큼직한 알사탕 크기의 은빛 구슬이 모습을 보였다.
반짝반짝이는 것이 마치 보석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제갈수현은 오히려 그 점이 걱정되는지 이드를 바라보며 우려를 표했다.
“저 정도 마법으로 괜찮겠나? 진을 파해하기 위해선 여덟 개의 지점을 한 번에 파괴해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저 마법은….”
이드는 그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어넘기며 걱정 말라는 식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잡았다.
슬레이닝 쥬웰.
이곳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래이드론의 지식을 받은 자신은 저 마법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지식대로라면 저 마법으로 필요로 하는 파괴력을 충분히 얻고도 남을 것이다.
“저 마법이면 충분하니까 걱정 말고 신호나 해줘요. 나도 준비 다 됐으니까…”
그런 이드의 양손 중지는 취을난지(就乙亂指)의 지력이 모여 맑은 청옥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이드 네가 가장 중요해.
자신 있다고 해서 맡기긴 하지만…. 네가 맞은 곳이 벽 뒤라는 거 명심해야 된다.”
…. 바로 벽 뒤쪽이었다.
“걱정 말고 제갈형이나 제대로 해요.
그리고 빨리 신호 안 해줘요?”
“…. 지금 한다. 둘 다 준비하고…. 지금!! 뇌건천개(腦鍵天開)!”
순간 그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천장건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며 통로의 한 지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뒤를 촌각의 차이를 두며 다섯 개의 은빛 구슬과 청옥빛을 내는 두 개의 구슬이 따라 나서며 각자의 목표를 향해 흩어져 날아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목표물에 부딪혀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실행했다.
푸하악….. 쿠궁…. 쿠웅……..
통로의 여덟 군데에서 동시에 폭발음과 묵직한 관통음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통로 전체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기이하게 일렁였다.
제갈수현은 그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성공이다.
여러분 이제….. 허억… 뭐야!!”
“엇…. 뒤로 물러나요.”
푸하아아악………..
만족스런 모습으로 돌아서던 제갈수현과 이드는 갑자기 자신들이 공격했던 여덟 군데의 구덩이로부터 하얀색의 분말이 터져 나오자 라미아의 허리를 감싸며 급히 뒤쪽으로 물러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