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67화
“어? 저기 좀 봐요. 저 벽엔 그림 대신 뭔가 새겨져 있는데요….”
“응? 어디….?”
중앙에 모여 사방을 꺼림직한 시선으로 둘러보던 사람들의 귓가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따라 일행들은 정면, 그러니까 일행들이 들어선 입구의 정면에 위치한 석벽으로 시선을 모았다.
과연 그곳엔 다른 곳과는 달리 조각이 아닌 아주 깊게 새겨진 유려한 모양의 한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석벽 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 들었던 제갈수현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드의 낭랑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더욱더 가까이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가만히 이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경운석부에 들어선 그대 연자에게 남기노라. 본인은 그대들이 들어선 경운석부의 주인으로 강호 사람들이 만추자(巒諏子)라 부르는 늙은이다. 만약, 석부에 들어선 연자가 경운석부의 이름이나 본인의 외호를 기억한다면 아래 글을 더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니. 아마도 지금 당장에 그 발길을 돌릴 것이다. 라는데…. 혹시 만추자라는 외호 아는 사람…. 없죠?”
중국의 가디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드의 모습에 문옥련은 제갈수현 등에게 물어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로 하여금 빨리 읽기를 재촉했다.
“험…. 선자불래(善者不來) 래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다. 아직 나가지 않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필시 그 뜻이 좋지 못한 자이거나, 본인의 외호와 석부의 이름을 모르는 인물일터…. 내 작은 바램이지만, 연자가 후자의 인물이길 바라며 이 글을 남긴다. 연자가 이 석실로 들어서기 위해 지나왔을 기관을 생각해 본다면 알겠지만 본인은 이 석부 안으로 그 어떠한 사람도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해서 그런 지독한 기관들을 설치한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을 괴팍한 늙은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 참혈마귀(慘血魔鬼)와…. 백혈수라….. 마…. 강시(白血修羅魔疆屍)??!!!!…. 뭐얏!!!!”
“차, 참혈마귀? 왜 그런 게 여기 있는 거야?”
어느 부분에 이르러 점점 커지던 이드의 눈은 어느 한 구절에 이르러 완전히 퉁방울만 해져서는 석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경악성을 토해냈다.
그런 갑작스런 이드의 경악성에 반사적으로 경계태세를 갖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연이어진 제갈수현의 고함소리에 무슨 일이냐는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래?”
“…. 참혈마귀는 뭐고 백혈수라마강시란 건 또 뭐야?”
경악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웅성임이 나왔다. 그 분위기에 문옥련이 나서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며 당황해하고 있는 제갈수현을 향해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도 뭔가 당혹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이 참혈마귀나 백혈수라마강시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제갈 소협…. 참혈마귀라니요. 설마 제가 알고 있는 참혈강시(慘血疆屍)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백혈수라마강시는 또 뭐죠? 이봐요. 제갈 소협!!”
문옥련은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제갈수현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석벽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제갈수현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문옥련은 그런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강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그렇게 문옥련을 바라본 제갈수현은 다시 잠시 기다리란 말과 함께 석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일행들은 왜인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두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난 후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린 제갈수현이 일행들을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아, 잠시 실례를 범했습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선자님, 방금 참혈마귀에 대해 물으셨죠?”
“그래요. 참혈마귀라는 게 제가 알고 있는 참혈강시인지 물었어요. 그리고 백혈수라마강시는 또 뭔지.”
문옥련의 대답에 제갈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이드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 백혈수라마강시라는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혈마귀에 대해서 대답해 드리자면, 선자님이 생각하시는 대로라는 것입니다. 참혈마귀가 바로 참혈강시입니다. 그리고 그에 덧붙이자면, 지금 이 안으로는 그 참혈마귀 팔백 구와 백혈수라마강시라는 참혈마귀보다 더욱 무서운 강시 삼백 구 정도가 가만히 잠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진 제갈수현의 말에 문옥련은 낮게 숨을 들이쉬며 경악이란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그려 보이며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자신의 옆과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상황이냐는 의문을 가득 담은 라미아와 일행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원하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머리를 슬쩍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허험… 앞에 오간 이야기로 대충의 상황은 알고 계실 테니, 참혈마귀와 백혈수라마강시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할게요. 우선 둘 다 만드는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강시입니다. 강시가 뭔지는 다들 아시겠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두 강시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좀비 비슷한 그런 평범한 위력을 보이는 강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참혈마귀라는 녀석만 해도 보통의 칼은 이도 들어가지 않는 철골철피(鐵骨鐵皮)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 철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가히 무시무시하지요. 대신 움직이는 조금 부자연스럽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이 가진 힘을 생각한다면 별달리 참고할 건 못 됩니다. 덕분에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강호인들부터이고,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류라는 소리를 듣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그런 그들도 최소한 백여 합은 겨루어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녀석들이 팔백이나 누워 있다니 저 두 분이 저렇게 놀라는 거죠…..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따로 있는데…”
“그 백혈수라마강시라는 것 말이겠지? 도대체 그게 뭔가? 석벽에도 참혈마귀보다 끔찍한 지옥의 인형이란 말만 나와 있는데…”
어느새 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제갈수현의 물음이었다. 제갈수현은 이드에게 그렇게 의문을 표한 후 아직 석벽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일행들을 향해 그 내용을 간단히 추려 알려주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만추자 생존 당시의 강호상에 정사공적으로 지목되어 멸문되어 버린 문파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사파에 속한 그 문파는 사공문(邪恐門)이란 이름으로 무공보다는 술법을 이용한 사법(邪法)에 능통했었다.
그러던 어느 때인가 강호상에 사공문에서 천인공노할 사법이 시술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에 정사 양측에서 조사한 결과 사실로 판명되자 합공을 감행하여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번에 그 일대를 강아지 한 마리 남김없이 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위급 중에 탈출한 인물이 몇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십 년 후 멸문된 사공문의 호법을 자처하는 자가 구천에 이르는 참혈마귀와 백혈수라마강시를 강호상에 퍼트리며 무림멸망을 외치고는 자진해버린 것이었다.
그 일에 정사양측은 다시 한번 손을 잡고 구천구에 이르는 강시들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그 강시들이 보통 강시가 아닌 만큼 무림의 피해도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계책을 이용하기로 한 무림인들은 이곳 평정산으로 그들을 유인, 그때까지 살아 움직이는 사천가량의 강시 중 삼천은 계곡에서 폭약으로 묻어버리고 나머지는 이곳 경운석부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경운석부에 들어선 사람은 곧 발길을 되돌려 달라는 부탁의 말이 적혀 있었다.
제갈수현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설명을 들은 이상 참혈마귀보다 더 끔찍하다는 백혈수라마강시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석부의 용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는데 참고해야 할 사항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석실 벽으로 돌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백혈수라마강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흠…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음, 복잡하게 생각하실 건 없어요. 이 백혈수라마강시도 강시인 만큼 어떻게 보면 참혈마귀의 완전 강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참혈마귀와 같이 철골에 무식한 힘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점 때문에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이란 것이 없고 그 빠르기 또한 강호의 일류 고수 수준에 이르죠.
하지만 그것만 보고 끔찍하단 말은 안 하죠. 문제는 이 녀석의 핍니다. 이 녀석의 피는 이름 그대로 하얀색인데…. 아주 강렬한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실수로 그 피를 접하게 되면 해독할 시간도 없이 중독돼 절명해 버리게 되죠. 이 정도면 끔찍하다고 말할 만하죠?”
“…. 그런 것 같네.”
“하지만 현대 장비와 마법을 사용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맞아, 알아채기 전에 큰 거 한 방 날려버리면 지깐 게 어떻게 알겠어? 안 그래?”
“하지만 그 정도로 빠르면 맞추기 힘들 것 같은데….”
이드의 설명에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문옥련과 각 가디언 팀의 대장들은 이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안으로 더 들어가 볼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나온 결과는 석벽의 글과는 정반대인 석부 안쪽으로의 진입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결정에 뭔가 반대의견을 표하려던 이드였지만 곧 생각을 바꾸고는 라미아와 뒤쪽으로 빠졌다. 생각해보니 통역을 위해 따라온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무공만을 사용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마법과 정령술, 염력이 있으니…. 강시들을 쉽게 상대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행동이 결정되자 제갈수현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기관을 열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런 내용이 석벽에 적혀 있었다.
정히 말을 듣지 않고 들어서겠다면 석실 정 중앙에 자리한 청강석을 부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제갈수현이 아니었기에 여기저기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역시, 위험하다고 그렇게 당부하던 사람이 쉽게 들여보내 줄 리가 없지…. 이건 함정이고 진짜는 저 석벽입니다. 저 석벽을 부수면 어디서 나타나도 문이 나타날 겁니다.”
“어디서 나타나도 나타난다니…. 그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은 뭐예요?”
“쳇, 나라고 다 알고 있으란 법은 없잖아?”
이드의 장난스런 말에 제갈수현이 답하는 사이 문옥련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의 한 쪽 손엔 여인의 노리개처럼 보이는 청옥빛의 작은 소도가 들려 있었다. 석벽을 부수려는 그녀의 모습에 다른 일행들은 뒤로 물러서며 기대감이 깃든 눈으로 그녀의 손과 석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소도를 든 문옥련의 팔이 느릿하게 펴지며 그녀의 손위에 들려 있던 소도가 한순간 그 모습을 감추었다.
“소월참이(素月斬移)….”
슈가가가각….
그녀의 손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소도는 석벽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느 사이에 만들었는지 석벽 위로 깨끗하게 잘려진 몇 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막 가로로 길게 그어 내린 소도는 다시금 그 모습을 감추며 문옥련의 손위로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 길다란 상처를 가진 석벽이 그대로 허물어져 내리며 제법 묵직한 충격음을 흘려냈다.
그런 그녀의 솜씨에 대단하다는 눈길로 석벽을 바라보던 일행들이었으나 깨끗이 무너진 석벽 뒤로 보이는 또 다른 석벽 위에 남아 있는 내용에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 과연 이곳까지 온 만큼 내 말에 속지 않고 이 기관을 열었구나. 하지만 그 실력을 칭찬해 줄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아마 잠시 후면 그대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우선은 그대가 들어설 곳에 잠들어 있는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그 본보기를 보여줄 것이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아마도 발길을 돌리겠지. 라니. 젠장, 제갈형 정말 확실하게 문이라고 찾아낸 거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