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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73화


그와 동시에 천천히 들어 올려진 ‘종속의 인장’의 인장이 일행들을 겨냥했다.

“이 ‘종속의 인장’이 가진 능력은 한 가지. 하지만 그 한 가지가 아주 쓸모 있지. 전해들은 것이지만 이 인장의 인(印)을 사용하면, 사용자보다 정신력이 약한 자, 힘이 약한 자, 의지가 약한 자는 자신에게 인장을 새겨 넣은 존재의 종복이 되어 복종을 강요당하게 된다더군. 하지만 평소의 정신은 살아있기 때문에 옛날 봉인 이전에 인간들 중 반란을 걱정하는 능력 없는 왕들이 가장 탐했던 물건이라 더군요.”

“그럼 저 벽화가 말하는 것이….”

“물론, 이 인장에 대한 능력을 표시한 벽화라오.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이 그다지 유쾌한 얼굴들은 아니니까 말이오.”

그의 말에 따라 빈들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지더니 다시 구겨졌다. 저 말대로라면, 자신들 중 몇몇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은 저 ‘종속의 인장’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타카하라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동료였던 사람들이 적이 될 것이기에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인 것이다.

‘젠장….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왠지 마족들이 하는 ‘피의 각인’과 상당히 비슷한데요.’

속으로 투덜대던 이드는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신도 그림을 봤을 때 그 내용이 슬쩍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저 보석이 ‘피의 각인’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을 줄이야. 이드는 기회만 되면 베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타카하라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타카하라는 땅에 곤두박질 치고 난 후부터 빈과 이야기 중에도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이드를 알고 있다는 듯. 덕분에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때 뭔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라미아가 마음속으로 이드를 불렀다.

‘이드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봉인 세계에 대해 저렇게 알고 있는 거죠? 게다가 저 ‘종속의 인’에 대해서까지요. 그냥 오다가다 발견한 던젼에 들어선 사람이 저렇게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엇! 그러고 보니…. 봉인 이전의 기록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타카하라를 경계하느라 그의 말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저 타카하라도 누군가에게서 들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누군가 봉인 이전 시대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봐요. 당신이 말하는 것 중에 궁금한 게 있는데… 도대체 그 이야기 누구한테서 전해 들었죠? 내가 알기론 봉인 이전의 시대에 대한 기록은 몇 가지를 빼고는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드의 말에 빈들도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흠…. 궁금한 모양이군. 뭐, 엄중한 비밀은 아니니 알려줄 수도 있지. 자네가 내 및으로 들어온다면 말이야. 그래 줄 텐가?”

“쳇, 말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시지? 게다가 이제 그걸 사용할 모양인데… 그렇게 쉽게는 안 넘어가.”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던지듯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타카하라를 목표로 날아든 붉은색 검기는 그가 시전한 실드에 막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머지 일행들도 각자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그가 ‘종속의 인장’을 사용하기 전에 빼앗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타카하라는 이미 ‘종속의 인장’을 사용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한쪽 손가락은 어느새 베었는지 붉은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어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종속의 인장’ 뒷부분에 피로 약속된 문장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된 듯 지금까지 한 번도 짓지 않은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주문을 외는 타카하라였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내 및으로 들어와도 당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까 말이오. 피의 주인. 종속의 빛. 그 약속된 힘으로 눈앞의 존재에게 그 빛을 피에 심어라. 그대의 진정한 주인 될 자. 그 대리자의 이름으로 나의 힘을 증명한다. 종속의 인장이여 그 빛을 발하라. 아투스 카라비아 에테!! 너희들의 주인 된 자의 이름으로 말한다. 에테 아투스. 멈춰라!!”

쿠콰쾅… 콰앙…. 카카캉….

순간 타카하라의 명령과 동시에 일행들의 공격이 일제히 타카하라의 실드에 부딪혔다. 동시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내며 실드가 깨어졌다. 그 와중에 이드는 자신의 실드가 깨어지는 것엔 신경도 쓰지 않고서 아무런 반응도 없이 침묵하고 있는 ‘종속의 인장’을 바라보고 있는 타카하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몸을 목표로 쏘아진 검기와 마법들은 그의 몸 곳곳을 뚫고 지나가며 순식간에 그를 혈인(血人)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정작 타카하라 본인은 검은 핏덩이를 꾸역꾸역 토해내면서도 그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반드시 그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던 ‘종속의 인장’이 침묵한 데 대한 충격과 그 이유를 찾는 일이 그에겐 더욱 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손바닥을 가르는 듯한 섬뜩한 검기를 느낌과 동시에 손에 고이 모시고 있던 ‘종속의 인장’이 아니, ‘종속의 인장’이라 믿었던 보석이 산산조각 부셔져 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포착한 이드는 급히 공격을 거두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더 이상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종속의 인장’이라 생각했던 보석이 가짜였던 것이다.

“모두 그만!! 멈춰요. 보석이 가짜예요.”

“헛… 공격중지. 죽으면 안 된다. 공격중지!!”

이드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빈이었다. 그는 책임자답게 급히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드와 빈의 두 번에 이르는 명령에 일행들 대부분이 이미 공격을 거두었다. 하지만 타카하라가 엄중한 부상을 입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바닥에 붉게 물들이며 저쪽 벽에 처박혀 있었다. 여기저기 부러진 듯 움푹 꺼진 곳이 있는가 하면 뼈가 밖으로 튀어나온 곳도 있어 방금 전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의 중상이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아마 다시는 그 퉁명스런 어조로 말하지 못하리라. 아무튼 서로 ‘종속의 인장’이 진짜라고 알았던 덕분에 황당할 정도로 쉽게 상황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런…. 너무 심한데….. 세이아양, 밀레니아양 두 분께서 수고 좀 해주셔야겠소.”

타카하라를 심문해 볼 생각이었던 빈은 일행들 중 신관인 두 명의 이름을 부르며 지팡이를 들고 뛰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신법을 사용했다. 타카하라에게 봉인 이전의 이야기를 해준 것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빈을 지나쳐 타카하라 앞으로 다가선 이드는 우선 그의 상처 중 출혈이 심한 부위의 혈을 점혈해 출혈을 멈추게 만들었다.

“으음…”

타카하라에게서 작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두 신관이 다가오는 걸 본 이드는 타카하라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하아.. 하아…. 지혈은 된 듯한데, 정말 심한걸… 그렇지만 이대론 치료를 못해요.”

“맞아요. 세이아님 말대로 아무리 신성력이라지만 이렇게 어긋난 뼈를 놔둔 채 치료할 순 없어요.”

두 여 신관이 타카하라의 상태에 얼굴을 찡그리며 급히 다가온 빈을 바라보았다. 이드는 그 말에 두 신관 사이로 끼어 들어 살을 뚫고 튀어나온 팔을 살폈다. 부러진 면이 깨끗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살갗을 절개하지 않고도 끼워 맞추는 것은 가능할 듯싶었다.

“괜찮아요. 제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드의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펴졌다. 뼈라는 게 아무나 맞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저렇게 살을 뚫고 나온 경우는 더욱 그랬다. 조금이라도 잘못 맞춰질 경우 정상적으로 팔을 놀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다시 절단하여 맞추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잘됐다. 그럼 부탁할게. 우리 두 사람은 우선 다른 상처를 치유할 테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누구 침 가지고 있는 사람 있어요?”

이드는 그레센 대륙에서 실프를 침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을 생각하며 몰려든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응, 있어. 하지만 다른 건 없고 장침만 열 개 정도뿐인데… 괜찮겠니?”

호연소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볼펜 케이스 모양의 침통을 꺼내 보였다.

이드는 충분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침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엔 열 개의 은색 장침이 반짝이며 정갈히 꽂혀 있었다. 꺼내든 장침으로부터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아마 소독과 병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순양초(醇陽草)즙을 침통에 넣어 놓았을 것이다.

“소저…. 아니, 호연소 누나도 의술에 꽤나 조예가 있나 보네요. 침을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걸 보면…”

이드는 꺼내든 침으로 부러진 팔의 손목과 팔꿈치 주변을 기점으로 침을 꽂아 나가며 지나가듯이 질문을 던졌다. 도중에 무심코 소저란 말이 나왔지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야, 그건 이번 일에 나간다고 사부님이 챙겨주신 거야. 나는 그냥 어떤 때 침을 어디 꽂아야 된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야.”

“네…. 그럼 사부님께서 의술에 조예가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요. 흐읍…..”

즈거거걱….

뼈가 묘하게 갈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맞춰졌다. 뼈를 맞춘 이드는 그 뼈가 튀어나온 자리로 뭉클뭉클 솟아나는 피를 지열하고는 급히 꽂았던 침을 뽑아들고 다리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리를 본 다음 다시 가슴, 다시 어깨로.

도중 차라리 절단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 상처도 있었다. 하지만 절단하지 않고 꼼꼼히 맞추어 놓았다. 옛날과는 달리 지금 이곳엔 신의 힘을 발휘하는 신관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드와 두 명의 신관은 별로 크지도 않은 타카하라의 몸 주위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길 십여 분.

겉으로 보이는 타카하라의 모습은 단순히 동네 깡패에게 두드려 맞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호전되어 있었다. 두 명의 여 신관이 한쪽에 늘어지면서 만들어낸 성과였다. 정말 부상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신성력이었다.

“그런데 ‘종속의 인장’이 수정이라니…. 우리에게 다행이긴 하지만, 이상하네요.”

치료가 끝나자 타카하라의 손에 남은 수정 조각을 눈앞에서 돌리며 말하는 제갈수현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반짝임은 없지만 투명한 것이 저기 천장과 바닥에 깔려 있는 수정 조각이었다.

“그럼 혹시 그 ‘종복의 인장’이란 게 가짜가 아닐까? 꾸며낸 이야기 말이야.”

“에라이 놈아. 꾸며낸 이야기면 여기 있는 이 던전과 저기 저 석상은 뭐냐? 생각 좀 해가며 말을 해 임마!”

“흠, 흠… 그, 그런가…. 그러면 그냥 말로 하지 왜 사람을 치고 난리야?”

스티브의 뒤통수를 두드려준 저스틴은 자신에게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그를 무시해버리고는 석상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혹시 말이야. 이건 또 한 번의 함정 아닐까? 가령 눈에 보이는 곳에 가짜를 두고 진짜는 여기 어디 숨겨두는 것 말이야.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요런 경우가 자주 있잖아. 안 그래?”

꽤나 엉뚱한 곳에 근거를 둔 이야기였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고작 장난치자고 이런 던전을 만들었겠는가. 아니면 먼저 들어온 사람이 인장을 가져가고 허전해서 수정을 깎아 올려놓았겠는가.

“그럼 어디에 숨겨뒀을 것 같냐?”

“… 그거야 찾아봐야지. 찾아보면 설마 안 나오겠냐?”

“이 자식아. 무턱대고 그런 게 어디 있냐? 너 같으면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겠냐? 앙?”

잠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는 듯하던 두 사람이 다시 투닥거리자 일행들은 조용한 한숨으로 외면해버렸다. 하지만 귀가 솔깃한 그 말에 빈은 타카하라를 감시할 베어낸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로 하여금 단서를 찾게 만들었다. 분명 짚더미에서 바늘 찾기 식이지만…. 마냥 한자리에 서 있는 것보단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종속의 인장’이란 것에 대해선 그 기능과 모양만 아는 상태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아낸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처음 얼마간 흥미 있게 여기저기 뒤지던 사람들도 하나둘 흥미를 잃어가더니 한 시간 후엔 모두들 힘없이 돌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쯤 타카하라 옆에 앉아 빈둥거리던 베어낸의 목소리가 모두를 불러모았다.

“어이, 대장. 이 녀석 깨어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음? 그런가?”

과연 그의 말대로 타카하라가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며 끙끙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저스틴과 같이 서 있던 브렌이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나쁜 악당이 잘 되는 꼴을 못 봤어. 괜히 저기 붙었다가는 나도 저 꼴이 나겠지? 그렇지 밀레니아. 내가 결정 하나는 잘했지?”

당당한 표정의 그 모습에 저스틴이 못 볼 꼴을 본다는 얼굴로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악당이 잘 되는 꼴을 못 보긴 뭘 못 봐? 솔직히 말해서 돈 못 받아서 그런 거잖아. 안 그래? 게다가 지금 아니라지만 그렇게 쉽게 의뢰인에게 등을 돌려도 되냐? 양심에 찔리지 않냐?”

“물론,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단 말씀. 게다가 악당은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의 등도 찌르는 놈들. 저런 놈들을 위해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단 말이야. 만화나 소설을 봐라. 거기서 용사가 악당들에게 거짓말한다고 욕을 먹는가… 안 그래?”

“하아~~ 너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도 만화영화 찾아보지? 악당들 나오고, 로봇 나오고, 변신하고… 세계를 구하고, 그런 거 말이야.”

“어? 어떻게 알았냐? 지금도 꼬박꼬박 찾아 보지. 요즘엔 토스카니란 만화가 꽤나 재밌더라고. 의뢰 맞아서 나오기 전에 예약을 해놓긴 했는데… 벌써 온 지 이틀이나 지났으니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봐야지.”

“그래, 그래… 많이 봐라. 정말 처음의 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밀레니아 씨, 정말 힘들겠어요.”

일행들은 두 사람의 되지도 않는 수다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는 동안 타카하라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별다른 반항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일행들의 행동을 따를 뿐이었다. 대신 빈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쥐었던 ‘종속의 인장’이 가짜란 것이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빈은 그에게서 별로 알아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선 일행들과 헤어졌던 곳으로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리고 저스틴과 브렌, 그리고 사이좋은 두 사람에게 타카하라의 부축과 감시를 맡겼다.

“자, 모두 철수하도록.”

“후~ 이 아름다운 걸 그냥 두고 가야 한다니… 아, 아까워라…. 응? 이게… 저기 대장님?”

빈의 말에 그냥 나가기가 아쉽다는 심정으로 석실 중앙의 수정대를 쓰다듬던 쿠라야미는 자신의 손가락이 한 곳에 쑥 빠져 버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가락이 들어가 있는 속은 수정대의 중심으로, 그곳엔 깔때기 모양의 홈이 파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깔때기 모양은 인장의 모양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가 급히 빈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뭔가? 쿠라야미 군.”

빈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돌아섰다. 타카하라의 시선까지.

“아무래도 그 단서라는 걸 지금 막 발견한 것 같은데요.”

“…. 뭐?”

쿠라야미의 말은 모두의 발길을 돌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축 처져 있던 타카하라의 경우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양쪽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저스틴과 브렌을 떨쳐낼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이미 마법이 봉인당한 그가 그 두 사람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 곧 잠잠해지며 기린처럼 목만 길게 늘일 뿐이었다.

“단서라니, ‘종속의 인장’에 대한 단서 말인가? 어이, 자네 둘, 그 사람을 잘 지키고 있도록.”

빈은 급히 다가와 쿠라야미가 붙잡고 있는 수정대의 한 부분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 크기와 모습이 동상 위에 올려져 있던 인장의 크기와 비슷해 보였다.

“흐음… 그럼, 이거 동상 위에 있던 수정을 끼워 넣으라는 말인가요?”

어느새 수정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이드가 물었다.

그 말에 쿠라야미는 일행들을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자신 없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 수정은 깨진 지 오래잖아요.”

이드 옆에 붙어 있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밀레니아가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큼직한 수정 한 조각을 들어 보였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어차피 깨진 것도 수정. 제 손에 있는 이것도 수정. 그럼 이 수정을 여기에 맞는 크기로 깎아 끼워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오~!!”

밀레니아의 기발한 생각에 일행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어차피 수정이라면 주위에 있는 수정을 깎아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꼭 만들어 놓은 것을 사용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빈은 밀레니아의 손 위에 올려진 수정을 집어 이드에게 내밀었다.

“다시 한 번 부탁하네, 가능하겠지? 이드 군.”

그의 말에 빙긋 웃는 얼굴로 수정을 건네받아 일라이져를 빼든 지 삼십 분 만에, 이드는 누가 봐도 동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수정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원추형 모양의 투명한 수정을 빈에게 당당히 내밀었다.

빈은 건네받은 수정을 수정대 위에 슬쩍 맞춰 보고는 일행들을 원래 석문이 있던 곳 밖으로 나가 있게 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빈 자신도 나머지 일행들과 함께 석문이 있던 곳 밖으로 물러서야 했다.

“그런 달리기 실력으로 뭔 일이 터지면 어떻게 피하시려고요? 차라리 신법을 사용하는 제가 낫지. 이리 주고 저리 나가게 세요.”

이 한 마디에 찍소리도 못하고 이드에게 수정을 건네고 쫓겨난 빈이었다.

모두가 충분히 피했다는 것을 확인한 이드는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천천히 수정대의 홈 부분에 원추형의 수정을 끼워 넣었다.

키잉…..

수정과 수정이 닿는 맑은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이드는 왠지 자신이 서 있는 부분이 아주 밝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라미아와 동료들의 고함 소리에 슬쩍 고개를 쳐든 이드는 천정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의 밝기가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사방으로 퍼져 있던 원통형의 수정봉들이 모여들며 수정대 쪽을 향하는 것도.

파아아아아…..

“으윽….”

순간 달빛을 한곳에 모은 듯 수정의 빛이 하나로 합쳐져 수정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엄청난 광도에 이드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상당히 잘 만들어진 장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드의 귓가로 웅성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젠장, 빛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주위를 살피려던 이드는 조금만 손을 치워도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쉽게 손을 뗄 수 없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드는 곧 정면의 쏟아져 내리는 빛을 등졌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눈앞에 어둠이 어리는 듯했지만 곧 회복되었다.

손을 천천히 내린 이드의 눈에 보인 것은 일행들이 서 있는 면을 제외한 삼면을 채우고 있는 황금빛 문양들이었다.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더구나 저 문장처럼 보이는 것은 상당히 눈에 익어 보였다.

“…. 어디서… 그래! 그때 롯데월드 지하에서…. 그런데 무슨 내용이지? 내용을 알아야 인장을 찾든지 단서를 찾든지 할 거 아냐.”

이드는 그때 지하에서 봤던 책들을 떠올렸다.

마계의 글을 사용한 일기장을 제외하고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글씨들.

해독은 틀렸다는 생각에 이드는 다시 꽂아 넣었던 수정을 빼기 위해서 수정대 위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 이드와 라미아들의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퉁명스러운 타카하라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까지 듣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탁기가 깃든 그의 목소리가 석실 안을 울렸다.

“영광을 취한 자…. 권능을 사용할 지혜를 증명한 자. 그대 얻을 것이다. 저 환희에 밝아오는 새벽 창공을 누비는 아홉 마리 독수리의 축복을 얻을지니. 그대에게 영광이 머무르리라. 란 말이지. 크크크…. 과연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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