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74화
크크크…. 과연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크윽….”
“뭐, 뭐야, 젠장!!”
완전하게 변해버린 타카하라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검고 사악한 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마기의 반탄력에 타카하라를 양쪽에서 잡고 있던 두 사람은 급히 욕지기를 뱉어내며 급히 양측으로 떨어졌다.
이드는 타카하라의 몸에서 솟아오른 마기가 한데 뭉치며 하나의 형태를 가지는 모습에 양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밝은 남색 머리에, 뾰족한 귀 그리고 탁한 목소리.
마족이란 무서운 이미지와 달리 자신에게 초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애송이 모습만 보인 녀석.
“초보 마족, 역시 그때 도망쳤구나. 그런데 도대체 네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것도 그 사람 몸에 붙어서 말이다.”
이드는 자신의 말에 이쪽을 바라보는 보르파의 눈이 저번에 볼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꽤나 훈련을 한 듯한 느낌이었다.
“큭… 제길, 나도 너 같은 놈 보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보더라도 이 네일피어로 그어 버리고 싶지만…. 먼저 맡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뭐, 덕분에 쉽게 일을 처리했으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고 다음에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보르파는 마족이란 말에 일행들이 뒤로 물러난 틈을 타 바닥에 쓰러진 타카하라의 목깃을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던전 밖을 향해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이 날아가 버렸다.
그의 말대로 무언가 일이 있는 듯 일행들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아련히 이드의 귓가로 보르파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저 안쪽에 처박혀 있던 재밌는 살인 인형들은 우리가 쓸 테니, 건들이지 말아주길 바래.”
순간 보르파의 말을 들은 이드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아나는 느낌에 한 차례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저 녀석 맡은 일이라는 게… ‘종속의 인장’을 찾는 일인 거 아냐? 그리고 아까 나타날 때 말했던 말이 저 글의 내용이라면…. 하지만 저 녀석이 그걸 왜? 또 우리라니? 으으…. 제엔장!!! 라미아, 나 먼저 간다. 분뢰!”
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간 이드의 마음속으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님 곧 뒤따라 갈 테니까. 빨리 그 마족을 뒤 따라 잡으세요. 방금 들은 대로라면 ‘종속의 인장’은 던전 입구에서 아홉 번째 자리에 자리한 독수리 석상일 거예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누가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풀이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제야 생각나는 사실이지만, 독수리의 발톱에서 빛을 내던 마법구들은 모두 인장과 같은 원추 모양이었다.
“젠장. 그렇게 중요한 보석을 왜 전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내달리던 이드는 어느 때부터 자신의 귓가에 들리며 점점 가까워지는 폭발음과 사람들의 목소리에 일행들과 헤어졌던 또 다른 일행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중 염명대라면 확실히 보르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좋았어. 조금만 그대로 있어라….”
그러나 이드의 염원과는 달리 문옥련과 염명대들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해서 이드가 본 것은 다시 한번 엄청난 상처를 입고 뒹굴고 있는 타카하라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타카하라의 상처는 처음 일행들의 합공을 받았을 때보다 심했다.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그곳을 통해 붉은 피 분수가 뿜어지고 있었다.
너무 큰 상처에 이번엔 가망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보고 뭔가를 말할 듯한 일행을 그냥 지나쳐버린 이드는 곧 원래 일행들과 둘로 나뉘었던 곳을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날아서 가는 마족을 따라잡기엔 부족한지 아직 녀석의 꼬랑지도 보지 못한 이드였다.
“젠장! 얼마나 더…. 좋아. 찾았다. 너 임마 거기 꼼짝 마….”
드디어 보르파를 발견한 이드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외친 것이기도 했다.
이미 벽에 붙어 있어야 할 석상은 산산조각이 난 데다 그 날카로운 발톱이 쥐고 있어야 할 ‘종속의 인장’은 이미 녀석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인장을 손에 쥔 보르파는 얄미운 미소와 함께 벽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위를 보라는 손짓과 함께.
“으아아아앗!!!”
쿠아아아앙….. 쿠궁… 쿠궁….
“우왓… 소환 실프. 실프 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모래와 흙들을 막아 줘…”
통로에서 급히 몸을 빼낸 이드는 무너지는 통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먼지와 그에 섞인 자잘한 돌과 흙더미를 보며 빠르게 실프를 소환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자신이 서 있는 통로가 완전히 먼지로 새하얗게 뒤덮였을 것이다.
사라져 가는 보르파의 손짓에 따라 천장을 바라본 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세한 거미줄 마냥 금이 가기 시작한 통로의 천장이었다.
금세라도 무너져 버릴 듯한 모습에 이드는 생각이고 뭐고 없이 바닥을 박차며 분뢰의 경공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한 천장은 당장이라도 이드를 뒤덮어 버릴 듯 빠르게 무너져 내렸고, 겨우 경운석부의 통로와 교차된 곳에서 멈춘 것이다.
만약 경운 석부의 통로가 교차되어 있지 않았다면……
“젠장. 통로 안쪽에 있던 사람들 다 죽을 뻔했잖아. 독수리 동상에 천장이 무너지는 기관을 설치해두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야? 이 던전을 만든 놈이!!!”
벌써 죽어도 몇 천 년 전에 죽었을 인물을 씹어대는 이드였다.
하지만 씹힐 만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종속의 인장’을 찾아낸 인간들에게 그렇게 심술을 부린단 말인가.
연신 투덜대던 이드는 등 뒤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과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라미아가 그 긴 은발을 허공에 너울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급히 나선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흠… 결국 놓치셨나 봐요. 그런데 방금 누굴 욕하신 거예요?”
라미아는 털썩 주저앉은 이드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자신이 날아오며 들었던 이드의 고함소리를 생각하며 물었다.
그녀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이드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아직 그 앞, 공기의 막에 싸인 뽀얀 먼지 구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이야기할 것을 찾았다는 듯 보르파를 쫓던 상황을 투덜거리는 이드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나직이 웃어 보이며 이드를 일으켰다.
날아온 그녀보단 느리지만 이드를 쫓아 일행들이 달려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이드와 라미아 주위로 빈과 문옥련을 선두로 한 일행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라미아가 들었던 투덜거리는 듯한 설명을 전해들은 그들은 각각의 심각한 표정으로 뽀얀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종속의 인장’이라는 상당히 위험한 물건을, 그것도 마족이 훔쳐갔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보르파를 상대했었던 염명대의 경우, 롯데월드에서 놈을 확실히 처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때 일행들 사이사이를 누비던 이드가 고염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녀석이 버리고 간 사람은요? 보통 상처가 아니던데. 혹시…”
“아, 아… 심장 한 쪽을 스치고 간 부상이라… 손을 쓰기 전에 숨을 거뒀더군. 그래서 통로 한쪽에 우선 안치해 뒀네.”
그의 말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처음 일행들의 공격 때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일행들은 더 이상 타카하라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이드님, 그것보다 그 마족이 강시에 대해서 말했던 것 같은데….”
라미아의 한 마디에 보르파의 말을 들을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일행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재밌는 살인 인형들….’ 이란 말.
그 말이 생각남과 동시에 이드의 시선은 고염천과 남손영 등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강시. 대장님, 강시는 어디 있죠? 그 초보 마족놈이 강시들을 가져가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뭐, 뭐얏!!”
이드의 말에 처음엔 멀뚱히 있던 고염천 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생각했는지 속 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의 표정 변화에 이드와 라미아 등이 어리둥절해 하자 문옥련이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걱정 마. 그 마족은 절대 강시들을 가져가지 못할 테니까.
우리는 석부 끝에서 잠들어 있는 천 구가량의 강시들을 발견했지.
하지만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가까이 가지도 않고 그곳으로 통하는 통로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거든.
그걸 다시 파내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걸…”
“맞아, 맞아… 그 사이 가디언들이 출동해서 이곳을 지키면 지가 어쩌겠어?”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마족을 쉽게 보는 건지.
아무리 마족에 익숙하지 않다지만, 그 녀석과 직접 전투를 겪어본 염명대까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이드는 슬쩍 머리를 집어 보이며 염명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도대체! 그때 녀석과의 전투를 기억하고 있기는 한 겁니까?
기억 안 나요? 그 녀석이 돌로 된 바닥과 벽을 통과해 다니던 거.
그런 녀석을 상대로 통로를 무너뜨려 놓았다고 안심해요?”
그러자 금세 조용해진 일행들 사이로 염명대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롯데월드에서의 전투를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생각을 마쳤는지 고염천을 시작으로 한 염명대는 이내 뒤로 돌아 석부 안쪽으로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행동력 하나는 빠른 그들이었다.
그 뒤를 라미아를 안아든 이드와 일행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꽤 오래 달렸다고 생각될 때, 이드의 눈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돌덩이와 흙덩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양으로 보아 한 부분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한 십여 미터 정도는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완전히 무너져 내렸구만…. 경운석부가 통째로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몇 백 년이 지나도 쌩쌩한 기관을 보고 그런 소릴 해. 그런데, 선자님.
대체 강시를 왜 그냥 가둬두기만 한 거죠? 선자님들이나 옛날 사람들이나, 충분히 묻어버리거나 죽일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랬다면 그 마족 녀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쿠라야미의 입을 조용히 시킨 코우의 질문이었다.
다들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강시들을 본 문옥련의 일행들은 또 다른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죠. 그렇다면 간단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손을 쓸 수가 없더군요.
그때 석실에서 처음 강시를 보고 짐작하고 이곳에 잠든 강시를 보고 확신한 사실이지만,
그 일 천구의 강시들 대부분이 구파일방과 사대세가, 그리고 당시 이름 있는 문파의 제자나 관계자들이었어요.
아무리 강시로 변했다지만 친구와 가족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이곳에 가둬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그 뜻을 존중해서 그 입구 부분만 새롭게 무너뜨린 것이고요.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독하게 손을 쓸 것을… 잘못했어요.”
“자자…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구요.
눈앞에 있는 초보 마족이 문제죠. 라미아, 안의 사정을 알 수 있을까?
그 녀석이 왔는지 말이야.”
이드는 이상한 분위기에 제법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왠지 이상해지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라미아 역시 이드와 같은 생각인 듯 입술을 달싹이며 스펠을 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어 앞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손 위로 무수히 많은 붉은 점들과 평면으로 된 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리드 오브젝트 이미지!”
그 모습에 일행들이 하나둘 라미아가 시전한 마법 주위로 몰려들었다.
5써클에 속한 마법으로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위로 모여든 마법사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버렸다.
평면의 이미지 위로 붉은 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이상하게 흐릿하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주위로 몰려들고 있는 붉은 점들.
“제기랄. 벌써 그 마족 놈이 왔어.”
빈의 급한 마법사와 이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에 라미아가 한 손으로 이미지 중 흐릿하게 왜곡되어 있는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이 마법에서 이렇게 나오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뭔가 마법이 시전되고 있거나 마법 물품이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강시뿐인 이곳에 마법 물품이 있을 리는 없고, 잠들었을 강시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아마 게이트 마법이나 텔레포트 마법인 것 같아요.”
“우왁… 드럽게 행동 빠른 놈이네. 그럼 우린 어떻합니까?
땅 파고 들어갔다 간 이미 다 빠져나가고 난 후일 텐데…”
“그럼….”
이드는 일행들이 들어설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사이 가만히 무너진 통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지금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보르파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빠져나가 버린 강시를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꼭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응? 뭐라고?”
“없다고요. 꼭 들어갈 필요가. 지금 들어간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도 아닌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구요.”
“생각하는 게 들렸던 모양이네.”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라미아였다.
“그렇다면 이곳이 무너져도 별 상관없겠지? 아깝긴 하지만 말이야.”
뭔가 생각이 있는 듯한 이드의 말에 이미 짐작한다는 표정의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할까요?”
“응, 하지만 너무 강력한 것은 자제하고, 대신 작렬형의 관통력이 큰 마법으로 준비해 줘.
그 정도 충격이면 무너져 있는 통로를 뚫고 석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폭발력의 마법이면 돼.”
라미아는 이드의 요구에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중에서 그에 맞는 마법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이드는 슬쩍 몸을 돌려 고염천과 문옥련 등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들어설 방법을 만들지 못한 그들은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저런 식이라면 힘들게 무너진 통로를 지나더라도 강시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 이드는 그들 사이로 끼어 들어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더 이상 보존하고 건질 것도 없는 석부. 괜히 어렵게 들어갈 생각하지 말고 한꺼번에 날려 버리자는 의견이었다.
곧 그 의견은 승낙되었다.
자신들이 뾰족한 방법을 내놓지 못한 이상 한 구의 강시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들이었다.
단, ‘종속의 인장’을 찾으러 갔었던 일행들은 그 석실 안에 있던 예술품과 같은 석상과 수정들을 아까워했지만 말이다.
“좋아요. 그럼 결정이 났으니까 최대한 빨리 경운석부 안에서 벗어나세요.
대충 계산해본 결과 최대한 경공을 펼치면 십오 분 만에 석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후에 석부를 무너뜨리도록 할게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이드의 의견에 무언가 석실을 무너뜨릴 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인데, 자신들은 먼저 나가라니.
그 말을 자폭하겠단 뜻으로 받아들인 일행들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어 차라리 강시가 다 마족의 손에 들어가던가, 늦더라도 무너진 통로를 통과하겠다는,
그리고 이런 던전에 아니라면 마법으로 상대하기 쉬우니 괜찮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자폭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은 이드로선 엉뚱한 일로 시간만 가는 것 같아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잘 들어요! 제가 언제 자폭하겠다고 했습니까?
단지 저와 라미아에게 이 석부를 무너뜨릴 방법이 있어서 남겠다는 거라구요.
솔직히 여러분 중에 이곳을 한 번에 무너뜨리고 탈출할 방법이 있는 사람 있으세요? 없죠?
하지만 저희들에겐 있어요.
하나뿐이긴 하지만 텔레포트 스크롤도 하나 가지고 있어서 탈출엔 전혀 문제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나가요.
이러는 사이에도 강시는 계속 빠져나간다구요.”
“…. 미안하구나. 나이 들어서 이렇게 쉽게 흥분하고. 근데 스크롤이 있다는 것 정말이지?”
이드는 부드럽게 물어오는 문옥련의 모습에 씨익 미소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죠. 이모님.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빨리 나가세요. 나가는 데만도 십오 분이나 걸린단 말예요.”
그렇게 달래고 확인하고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빈은 왠지 이야기가 겉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허망한 얼굴로 이드와 문옥련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참나, 이거 서두르다 보니 전부 다 바보가 된 모양이군….”
“네? 바보라니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그 모습에 이드와 문옥련의 시선이 갔다.
“하하하… 우리가 너무 서두르느라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방법이야 어쨌든 묻어버리고 탈출하면 끝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함께 있다가 다 같이 탈출하도록 하지요. 여기 있는 마법사가 세 명. 이 정도면 멀진 않아도 가까운 산자락까지 텔레포트가 가능합니다.
거기에 마법진까지 그리면 안정적으로 이동할 수 있지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드들은 한순간 자신들이 바보가 된 느낌을 받았다.
왜 꼭 먼저 사람들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마법이 있는데 말이다.
“호호홋…. 이드님, 저는 준비가 끝났어요. 언제든 마법 시전이 가능해요. 빨리 텔레포트 준비를 해주세요.”
스펠을 외우는 척하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미아는 이들의 황당한 모습에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사람들은 세 명 마법사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중간에 타카하라를 생각해낸 누군가의 말에 이드가 가 보았지만, 보르파가 빼내어 갔는지 그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마법진을 모두 설치한 세 명의 마법사는 삼각형으로 그려진 마법진의 세 방향에 맞추어 서며 마법진의 발동을 준비하고 발동의 시동어를 라미아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안에 라미아의 뒤쪽에 서 있던 이드가 라미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어깨에 손을 살짝 얹어 보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라미아지만 그에 이용되는 마나를 보유한 것은 이드였기에 혹시 그 마나의 유동을 누가 알아채기라도 할까 해서였다.
“좋아요. 그럼… 끝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화산이여. 지옥의 불길을 근원인 지옥의 화염이여. 지금 그 한 줄기 화염을 이곳에 소환하여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일소하라.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컴배터(combate)!”
쿠아아아아아….
라미아의 시동어가 외쳐지자 이 미터 앞으로 근원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화염이 모습을 드러내며 거대하게 뭉쳐져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산과도 같아 보였다.
다음 순간, 이드는 라미아의 목소리와 함께 모여든 화염이 화산이 터지듯 엄청난 불길을 막힌 통로를 향해 발사되는 장면을 흐릿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가랏! 텔레포트!!”
“으음…. 상당히 오래 걸리는군.”
평정산의 중턱, 일행들이 석부로 올라갈 당시 마법사들 때문에 잠시 쉬었다 간 자리로 꽤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지의 한 구석에 서 있는 커다란 백송 줄기에 기대 있던 절영금은 심해져 가는 공복감에 석부의 입구가 저 위쪽을 바라보았다.
막상 나오긴 했지만 혼자 내려가기가 뭐해서 기다린 것인데, 생각 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거기다 앉아 있는 동안 세 번이나 산이 울어대는 통에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두 시간 정도 후면 해가 질 시간이라 다시 한번 올라가 볼까 생각하고 있는 절영금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공터 중앙 부분에 이상한 빛의 문장이 생겨나는 모습이 들어왔다.
삼각형을 이룬 복잡한 도형. 갑작스런 상황에 가만히 그 부분을 바라보던 절영금은 한순간 터지듯 뻗어나는 빛에 두 눈을 감싸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뒤를 따라 들리는 다급한 제갈수현의 목소리에 절영금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자리에 납작하게 엎드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무조건 엎드려!!!”
쿠우우우우웅…..
절영금은 자신이 엎드리기가 무섭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울음을 토하는 산의 비명에 진작에 내려가지 않은 자신과 이 상황을 원망했다.
이 정도의 산울림이라면 산사태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작은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 모든 떨림이 사라졌다.
그 뒤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힘없이 늘어진 세 명의 마법사를 바라보며 제갈수현에게 다가갔다.
“텔레포트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게다가 이 진동은….”
“아아…. 있다가 이야기해 줄게. 하지만 앞으로 꽤나 바빠질 거야. 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절영금은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말에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일행들의 모습에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다만 그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볼 뿐이었다.
“후우~ 도대체 뭔 소린지. 몬스터나 괴물들이 몽땅 공격해 들어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 빈말이 천천히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 명의 마법사들이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텔레포트된 곳에서 쉰 이드들은 다행히 어두워지기 전 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힘들다면 힘들고, 힘들지 않다면 힘들지 않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대충 저녁을 때운 후 각자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 절영금에게 붙잡혀 석부와 던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했던 제갈수현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각국의 가디언 대장들만은 침대에 몸을 뉘이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마족인 보르파와 그가 가져간 강시, 그리고 보르파에게 이 일을 시킨 인물에 대한 생각으로 자리에 눕더라도 쉽게 잠을 이루진 못할 것 같았다.
“왠지 여기 일도 상당히 복잡해질 것 같지?”
이드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지나가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 중얼거릴 듯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드에겐 자신의 중얼거림에 답해줄 확실한 상대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보르파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거니까요.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고대에 봉인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겠죠. 타카하라란 사람 같은 부하들도 있을 테고요.’
마음속으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녀 옆에는 저번과 같이 신우영이 누워 있을 것이다.
“아아…. 미치겠다. 나한테 뭔 재수가 붙어서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는 거야. 도대체가.
앞으로도 보르파 녀석과 얼굴을 터뜨니, 어떻게든 관계될 테고….”
신세 한탄을 해대던 이드는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정말 살이라도 낀 게 아닐까?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인지.
‘설마요. 이드님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저희가 좋지 않을 때 나타나는 거예요.
또 이드님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드님답게 좋게좋게 생각하세요.’
이드는 투덜대는 자신을 달래려는 라미아의 말에 베개 속에 묻은 입가로 빙긋 미소를 띠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이미 일어난 일,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는 것이다.
“그래, 네 말대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 꽤나 힘들게 돌아다니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네가 검일 때는 내 허리에 달랑 달려 편하게 다녔을지 몰라도 인간으로 변해 버린 이상 하나하나 걸어다녀야 할 걸….”
‘헷, 그래도 상관없어요. 힘들면 이드님께 업혀 다니면 되죠 뭐.’
“하하핫…. 그래, 그래… 그런데… 우리 이제 어떡하지?”
말뜻이 확실치 않은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떡하다뇨?’
“아무래도 이대로 한국에 돌아갔다간 꼼짝없이 붙잡혀서 가디언이 될 것 같거든. 이번에 네 마법 실력이 드러났잖아. 모르긴 몰라도 네가 해보인 플레임 캐논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한국에도 그리 많지 않을걸… 그런 너를 그냥 두겠냐?”
이드의 말에 라미아는 뭔가를 생각하는지 잠시 조용했다.
확실히 지금같이 몬스터가 나타나는 상황에선 힘 있는 사람을 붙잡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레센의 제국에도 매이지 않았던 이드였다.
‘뭐… 생각해 놓은 게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드는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저녁을 먹고 멍하니 누워 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었지만 그것도 생각이라면 생각이다. 잡생각.
“뭐, 그냥…. 어차피 우리가 가이디어스에 있었던 것도 지금의 세계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였잖아. 그리고 지금은 웬만한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말인데, 한 곳에 머물러 있거나 가디언이 되는 것보단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는 게 어떨까 싶어.”
‘… 그럼 갈 곳은 있으세요?’
이드의 의견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조금 말을 끄는 라미아였다.
하지만 특별히 반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상황이 맘에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이드에게 안주하자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드가 간다면 어딘들 따라가지 못할까.
“아니, 정해놓은 곳은 없어.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우리가 갈 곳이 어디 있냐?
하지만 돌아다니면서 엘프나 드래곤을 찾아 볼 생각이야.
그들을 찾아 이곳이 봉인된 이유도 물어보고, 혹시 그레센이나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도 찾아보고. 어쨌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낫겠지.”
‘알았어요. 하지만, 우선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돼요. 연영 언니하고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는 해야 되니까요. 또 외국으로 다니기 위해 필요한 그거… 어, 비자라는 것도 발급받아야 되니까요.’
“그래, 나도 당장 따로 움직이겠다는 건 아니니까. 아… 그만 자자. 푹 쉬어야 내일 돌아갈 거 아냐. 잘 자. 라미아.”
‘네, 이드님도 좋은 꿈 아니, 제 꿈 꾸세요.’
“…. 네가 놀러 와.”
이드는 빙긋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영혼으로 이어진 라미아인 만큼 정말 꿈의 세계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결정을 내린 데 대한 은근한 불만을 품고서 말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과 달리 오히려 피곤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한 이드를 포함한 각국의 가디언들은 전통 중국식으로 아주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문옥련 나름대로의 수고 표시의 음식이었다.
하루 동안이지만 꽤나 얼굴이 익은 일행들은 비행장에서 정이 느껴지는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비행기에 올랐다.
다만 영국 측의 비행기가 출발할 때 메른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는 데 대한 이유를 아는 것은 일부의 인물들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찾아뵐게요. 이모님.”
이드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앞에서 자신의 손을 보듬어 쥐어주는 문옥련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하남의 양양에서 검월선문(劍月鮮門)을 찾아오너라.
만약 그곳에 없다면 중국의 가디언 본부 어디서든 날 찾으면 될 거야.”
“네, 그럴게요.”
이드는 그녀에 이어 제갈수현과도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올랐다.
원래 자신의 고향이자 집인 중원에 손님처럼 와서 친인을 만들고 가는 기분은 상당히 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어제 밤 꿈에 찾아온 라미아 때문에 못다 잔 잠을 자는 게 더욱 급했던 이드는 앉았던 의자를 뒤로 한껏 넘겨 사르르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이드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라미아란 것을.
아마 이번에도 편안하게 자긴 틀린 것으로 보이는 이드였다.
“자, 모두 여길 주목해 주길 바란다. 여러분께 새로운 대원을 소개하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한 번씩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가디언이 된 이드 군과 라미아 양이다. 모두 박수로 맞아 주도록.”
엄청난 속도로 이어지는 일들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던 이드와 라미아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남녀 가디언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왜 우리가 여기에 서 있는 거야!!!!”
처량하게 울리는 이드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환호와 박수 소리에 묻혀 옆에 있는 라미아에게밖에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