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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77화


그 사이, 쓰잘데없는 이야기에 휘말리기 싫었던 라미아는 이미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영국에서 새로 생긴 커다란 숲에 대해 묻고 있었다.

기사도와 중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란 나라일 것이다.

영국 곳곳에 남아 있는 옛 고성의 흔적이나 지금도 남아 있는 대저택과 그 주위로 펼쳐진 풍경들.

그것은 누구나 상상하는 중세의 풍경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배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일년여 전 봉인이 풀리는 그날을 계기로 더욱더해져 지금은 영국을 선진대국 중 하나로 보는 사람들보다 중세의 나라로 보는 사람들이 더욱 많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새로 생겨난 산과 숲,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몬스터와 가끔씩 출현하는 요정들은 신세의 신화 시대 바로 그것이었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옛날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만 한다면 누구도 21세기의 영국으로 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는다면 따로 꾸밀 필요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변 모습에 오히려 친숙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였다.

라미아는 주변의 풍경에서 자신이 태어난 그레센 대륙의 모습을 느꼈다.

이드 역시 중원보단 못하지만 이곳에서 보다 오랫동안 머물렀고 또 많은 인연을 만들었던 그레센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의 영국이란 나라의 풍경에 왠지 모를 친근함과 안도감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지금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길은 비포장의 길로, 며칠 동안 배의 철로 된 갑판만 밟았던 두 사람에게 더욱더 친숙히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에든 예외는 있는 법.

두 사람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있는 반면, 그런 둘과는 달리 못마땅한 표정으로 혼자서 열심히 투덜대는 제이나노가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로서는 목적지까지의 상당한 거리를 차도 타지 않고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비포장이라 걸을 때마다 일어나는 먼지는 뜨거운 태양과 함께 숨을 막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제이나노에겐 수다를 떨 수 없는 것이 가장 갑갑하고 신경질 나는 상황이었다.

말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어찌 잊어 보겠지만 동행의 조건으로 내건 내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그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몇 시간 전의 생각이었다.

이미 점심을 한참 지난 시간. 아침부터 걷기 시작해서 점심식사를 위해서만 잠깐 쉬었던 그로서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차를 타지 않는지 그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이… 두 사람. 한참 즐겁게 걸어가는 것 같은데 잠깐만 저 좀 보시죠.”

우뚝.

서로 마주 보며 방글거리며 걸어가던 두 사람이 제이나노의 말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의 표정엔 힘들다거나 덥다거나 하는 표정은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이나노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인 것이다.

제이나노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왠지 자신의 처지가 억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지금의 상황에 지치고 힘들기만 한데, 앞의 두 사람은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비록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동행 요청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두 사람 다 체력이 좋네요. 반나절 내내 걷고도 전혀 지친 것 같지 않아 보이니… 전 상당히 힘.든.데. 말이죠.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걸을 생각인 거죠? 설마하니 그 먼 ‘숲’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닐 테고요.”

제이나노는 말하는 도중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자신의 말 중 특정 부분을 특히 강조해가며 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한 말은 그나마 남은 힘을 쪽 빼버리는 효과를 발휘했다.

“… 말 안 했던가? 그러니까 숲까지 쭉 걸어갈 거야. 차는 안 타…. 어어… 야, 야… 왜 그래?”

제이나노는 그런 이드의 대답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 아침 물어서 알게 된 숲까지의 거리만도 로 삼일 정도의 거리다.

그런데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가겠다니…. 도대체 멀쩡한 차를 두고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힘없이 주저앉은 제이나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드와 그 뒤의 라미아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정말 평소의 자신이라면 일부러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왜 차를 타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목적지로 정한 숲에 무엇 때문에 가는지 물었다.

사실 동행하기로 했지만 아직 숲에 가는 정확한 이유조차 듣지 못한 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미아의 대답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음… 제이나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해요. 모두 엘프를 만나기 위해서죠.”

“에… 엘프?”

“네, 엘프요. 저희는 엘프를 찾아서 숲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때문에 차를 타고 가지 않는 거고요. 혹시라도 차의 기운이나 냄새가 엘프들을 자극하거나 경계심을 가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이드님이나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차를 탄다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으니까요.”

“….”

제이나노는 그녀의 말에 최대한 황당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담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우선 그녀의 설명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엘프라니. 물론 몬스터와 드래곤이 존재하는 만큼 엘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그 모습이 알려지지 않은 종족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그런 엘프를 찾고 있다니… 도대체 이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경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신인 리포제투스의 계시에 의심이 갔다.

“… 하아~ 리포제투스님 정말 이들을 따라 가는 게 당신의 의지인가요?”

제이나노가 리포제투스의 사제가 된 지 이제 육 개월.

처음 리포제투스를 모시는 사제가 되면서 그분에게 받은 계시가 바로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자신의 몸을 옮겨 행하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제이나노는 자신을 대사제로 임명한 리포제투스를 믿고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여러 가지를 보고 직접 체험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또 그러면 그럴수록 리포제투스에 대한 믿음은 더해져 갔다.

그리고 며칠 전. 홍콩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이드와 라미아를 본 순간 그 두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 동행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것 또한 리포제투스의 뜻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라미아와 이드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이유가 엘프를 찾기 위한 것이란 걸 알게 되자 혹시나 자신이 이들을 따라가기로 한 것이 순간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행하라고 한 리포제투스의 계시에 대해 의심까지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이나노가 그렇게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느끼며 멍해 있는 사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한참이나 기울어진 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두세 시간 후면 해가 완전히 져버릴 것 같았다.

“후~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노숙해야 될지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그러기엔 도구가 너무 부족하고… 라미아, 지도엔 다음 마을까지 얼마 정도 남은 걸로 나와?”

이드의 시선이 라미아에게 향하자 라미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돌돌 말린 지도를 꺼내들었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바리바리 챙긴 물건들은 라미아가 생성한 공간에 들어 있고, 지도같이 자주 필요하고 간단한 물건들만 따로 작은 가방에 넣어둔 것이다.

항구에서 구입한 지도는 봉인이 풀리고 난 후 변화된 지형과 마을이 표시된 지도였다.

예전의 위성으로 제작된 지도처럼 세밀하진 않지만 비행기를 타고 사진을 찍어 그렸기에 어느 정도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도도 이드들이 내렸던 항구와 그 주위의 일부 지역만이 나와 있을 뿐 영국 전지는 아니었다.

지도 만드는 작업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우선적으로 각 지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따로따로 지도를 작성한 것이었다.

덕분에 지도를 보고 움직이는 사람의 경우 군데군데 있는 대도시에서 그곳에 맞는 지도를 구입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되었다.

지도를 펼쳐들고 자신들이 향하는 방향에 있는 마을을 확인한 라미아는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과 항구의 거리, 그리고 마을이 위치한 곳의 거리를 재어 보더니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모습에 마을과는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라미아에게서 들린 말은 이드로 하여금 절로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이었다.

“하아~ 이 속도라면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항구와 마을의 삼분의 이 정도 되는 지점이거든요. 어떡하죠?”

“후~ 어떡하긴. 늦더라도 마을에 들어가야지. 노숙을 하기엔 식량도 도구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정신차려 제이나노.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으면 그만큼 서둘러야 된다구. 그리고 리포제투스님은 마을에서 쉬면서 찾아.”

이드의 말에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일이 잘한 것인지 되짚고 있던 제이나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따라나선 것, 지금에 와서 물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네, 네… 지금 일어나요.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빨리 걸을 수는 없어요. 그나마 그 속도도 여기서 조금 쉬어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우리 여기서 잠시 쉬다가 가죠. 마침, 그 엘프를 찾는다는 목적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요.”

제이나노가 황색 사제복에 묻은 하얀 먼지를 팡팡 털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드는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중간중간에 쉬는 것보다는 빨리 마을에 도착해 편안히 쉬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라니? 저녁에 먹을 식량도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게 무슨 청승인가 말이다.

그런 생각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드는 자신의 가방과 제이나노가 지금까지 들고 있던 빵빵해 보이는 가방을 라미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이드의 갑작스런 행동이 의아하기도 하련마는 라미아는 그럴 줄 알기라도 했다는 듯이 건네주는 짐을 순순히 받아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웠다.

이미 이드에 대해선 거의 다 파악한 라미아였던 것이다.

“플라이.”

순간 라미아가 허공 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중력이란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한 그 모습은 너무나도 편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제이나노의 비명소리.

“으와아아아아….. 뭐,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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