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1화
그리고 그런 만큼 우리 엘프들에게 익숙한 기운을 풍기게 되니까 비르주가 친하게 접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정령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게 뭐죠?”
메르다의 말에 이드의 반대쪽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라미아가 물었다. 그녀 외에 오엘과 제이나노도 어느새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정령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건 저희 엘프들 사이에서 쓰는 말이고, 뜻은 조금 다르지만 보통은 정령사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정령을 느끼고 그들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존재.”
그의 말에 오엘과 제이나노의 시선이 이드에게 향했다. 그들은 이드가 검강까지 뿜을 수 있기에 검사인 줄만 알았지 정령까지 다룰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숙…. 정령까지 다룰 줄 아셨어요?”
“뭐, 조금…. 그런데 제가 알기론…. 정령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해서 엘프들이 그 모두에게 친절한 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아니요. 이드의 말대로 모두에게 친절한 건 아니죠. 흔히 당신들이 말하는 정령사라는 것과 저희들이 말하는 정령에게 사랑받는 존재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근본적인 차이인데…. 후훗… 그건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리죠. 내용이 많거든요.”
메르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은 다시 경치 구경 등 자신들이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 일행들은 다음날 메르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로 안내되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그 나무는 그 크기만큼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그늘 아래로 길다란 나무 테이블과 함께 십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상석에 장로라고 짐작되는 중년의 여성 엘프 네 명과 남성 엘프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엘프의 특징인지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와 경험이 많을 엘프들일 텐데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메르다와 저 장로 중 한 명을 같이 세워두고서 누가 나이가 많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잠시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자, 그러지 말고 여기와서 편히들 앉아요. 우리 마을이 생기고서 처음 맞이하는 인간 손님들이여.”
라미아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장로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하얀 백발을 구름처럼 틀어 올린 여성 엘프가 이드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의 말 역시 엘프어였지만 이미 테이블 중앙엔 통역을 위한 마법이 걸린 우유빛 마법구가 놓여 있는 덕분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의 말에 메르다가 나서 이드들에게 앉을 자리를-이미 배치된 자리지만- 마련해 주고 그는 장로들이 있는 반대쪽 의자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가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이드가 슬쩍 몸을 일으켜 일행들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이미 메르다를 통해 들었는지 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엔 메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을 간단히 소개했다. 메르다에 의한 장로들의 소개가 끝나자 대장로 겸 일 장로라는 백발의 엘프인 카이티나가 일행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 그대로 그녀의 목소리 역시 강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동시에 처음 이곳에 들르며 있었던 오해로 인해 벌어졌던 무례를 사과하는 바라네.”
“아니요. 벌써 그 일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또한 그것은 저희들이 먼저 이 숲을 들어서 생긴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기 메르다 씨께서 저희에게 친절히 대해 주셔서 어제 하루 편하고 즐겁게 쉬었으니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
이드는 카이티나의 말에 중원에서 받은 예절 교육과 그레센 대륙의 왕국 예절을 살려 정중히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와 함께 보이는 이드의 몸가짐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카이티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운지 그 단아하고 강직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하지만 작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반면 이렇게 정중히 예의를 차리는 이드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오엘과 제이나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드가 보이는 행동은 자신들에게 대신 시킨다 해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잘 다듬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래 여기 메르다를 통해 들어보니, 우리들 장로들에게 뭔가 묻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꼭 장로들에게 물어본다고 한 건 아닌데. 이드는 메르다를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궁금한 게 있다면 풀어야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시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성의껏 대답해 주겠네. 마침 우리들도 자네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으니까 말이야.”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먼저 질문해야 할 꺼리를 생각했다. 그 사이 한 엘프가 작은 쟁반에 간단한 마실 음료를 준비해 모두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드는 자신에게 내어지는 잔을 고맙게 받아 쥐곤 곧바로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런 이드의 입에선 지금 막 마셨던 음료의 상큼한 향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우선… 저희들이 있던 세계가 봉인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와 여기 라미아는 우연히 보게 된 마족의 일기장에서 인간들 모두가 이 공간에 봉인되었다는 구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뭐죠?”
“마…. 족의 일기장?”
이드에게서 마족의 일기장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자리에 있던 모든 엘프와 오엘의 시선이 이드에게 모아졌다. 마족이라니… 거기다 무슨 마족이 꼬박꼬박 일기까지 챙겨 쓴단 말인가? 왜? 그날 죽인 생물들과 그 숫자를 파악하려고? 그런 황당함을 가득 담은 시선의 물음에 이드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옆에서 보고 있던 제이나노가 기회를 잡은 듯 나서서 이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몇 일 동안 신나게 수다를 떨다 갑자기 그 수다를 들어줄 사람이 사라지자 꽤나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이야기가 모두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흠, 그럼 두 사람은 상당히 귀한 경험을 한 거구만. 좋아. 내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지. 그러려면 우선 한 마법사의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꽤나 이야기가 긴 듯 카이티나는 앞에 놓인 음료로 우선 목을 축인 후 천천히 손자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인간들의 세상이 봉인되기 300년 전의 한 인간의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마을은 어느 산맥 근처의 작고 작은 영지에 귀속된 마을이었다. 작은 마을인 만큼 그에 비례해 시끌벅적하고 정이 넘치는 이 작은 마을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작은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지너스로 마을 사람 중 가장 어린 덕분에 모두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헌데,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위치가 위치인 만큼 심심치 않게 작은 몬스터를 볼 수 있었던 이 마을에 갑자기 수백의 몬스터들이 몰려 온 것이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을 덮친 몬스터는 사람이 보이는 족족 죽여 먹이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경황 중에 소년은 몇몇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은밀한 곳에 숨겨졌고 그는 그곳에서 간간이 들리는 비명성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몇 일의 시간이 흘렀다. 이미 비명성이 그친 지 오래였지만, 뱃속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소년은 자신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기에 또 몬스터에 대한 공포 때문에 쉽게 나서질 못했다. 그러나 영원히 그곳에 숨어 있을 수는 없는 일. 겨우 용기를 내어 숨어 있던 곳을 나선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갈갈이 찢기고 흩어진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마을의 모습이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소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소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새 영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소년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만, 소년이 정신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영지 전체가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 공격에 영지의 병사들과 사람들은 최대한 방어를 했지만 달려드는 몬스터의 엄청난 수에 얼마 가지 못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당연하게도 처절한 고통의 비명성이었다.
그리고 몇 일 뒤. 영지의 급한 지원 요청에 뒤늦게 도착한 병사들과 기사들이 영지에서 찾은 것은 독한 눈빛을 내뿜고 있는 소년뿐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그 많은 몬스터의 공격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몬스터에 의해 정신없이 하는 사이 그 소년은 침착하게 은밀한 곳을 찾아 숨어든 것이었다.
그 후 소년은 지원 온 기사에 의해 가까운 신전에 맡겨졌다. 하지만 소년은 곧 그 신전에서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그런 소년의 뇌리에 존재하는 것은 몬스터에 대한 복수심. 그러나 신전에서는 그들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익힐 수 없기에 신전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신전을 뛰쳐나와 세상을 떠돌길 몇 년. 처음의 그 맑은 눈의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어 어느 마법사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스승은 고 써클의 마스터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또한 소년에게는 또 다른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날 복수하겠다며 찾아온 뱀파이어 로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세 번째로 몬스터에 의해 친인이 죽음을 당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지너스는 오직 몬스터만을 적으로 삼아 싸움을 해 나가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지너스는 자신처럼 몬스터 때문에, 이종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길 200년.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을 해오던 지너스는 마침내 몬스터가 없는, 인간이 평화로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세상 이곳저곳 비밀스런 장소에 자신의 마법을 보조할 보조 마법진을 형성시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며 모아온 성물과 신물이라 불릴 만한 물건들을 촉매재로 삼았다. 이 것들은 그의 뜻에 따라 세상을 나누고 흐름을 나누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무도, 그 누구라도,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모를 어느 날 밤. 지너스는 마침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일을 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대한 마법진과 그 마법진의 재물로 사용되는 드래곤 하트와 성물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선 자신의 영혼.
그리고 한 순간 세상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는 인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때서야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안 신들이 세상을 뒤졌지만 인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이공간에 싸여 있는 세상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신들조차 그것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 막의 정체는 지너스의 영혼이었다. 또한 그의 영혼이 신들을 대신해 죽은 인간들의 영혼을 순환시키고, 자연의 혜택을 베풀어 나갔다.
또한 지너스는 그와 동시에 세상에 퍼진 마법이란 것들을 대부분 거두어 들였다.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마법사가 나타나 봉인을 깨트릴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쪽 세상에서는 이간에 대한 것은 이야기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카이티나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음료수 잔을 모두 비워내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났음에도 뭐라, 질문을 하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믿기 힘든 이야기였던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의 말 대로라면, 지금까지 신이라고 믿고 기도 올린 대상이 인간이란 말이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인간이 그런 일이 가능한가?
오엘과 제이나노가 생각하기엔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 두 사람에겐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들렸다. 하지만 이미 지금의 세상이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닌가.
그렇게 고민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이드와 라미아는 어쩌면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재 이드의 능력 역시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드래곤 하트의 모든 힘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지너스처럼 성물들을 모은다면, 그리고 마법진을 연구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런 실력은 가진 이드와 그의 검이었기에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대단하네요. 한 인간이 그런 일을 해 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그럼 혹시라도 그 세상에 남은 인간은 없었나요? 얼마 전 한 인간을 만났는데, 그는 봉인이전의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혹시….”
“혹시, 이 쪽 세상에 남아 살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가?”
은은한 미소를 띠우며 말하는 카이티나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지너스라는 사람은 신들도 침범하지 못 할 정도로 강력한 봉인을 실행하고 성공시킨 인간이야. 설마 그런 그가 인간을 남기는 실수를 했을 것 같은가?”
“……. 아니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건데. 역시나 그런 인물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이드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향과 맛이 좋은 음료였다. 갈 때 좀 얻어 갈 수 있을까.
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라미아가 지나가는 투로 카이티나에게 물었다. 이미 두 사람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별로 기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도 모르는 것을 엘프가 알 리가 있나.
“저기 그럼, 혹시 차원의 벽을 넘는 방법…. 아시는지….”
“왜 그런 걸 묻는진 모르겠지만…. 우리도 알지 못하네. 아직 시공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그 벽 넘어에 있는 차원 벽에 대해선 알 길이 없지.”
그녀의 대답에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 진다. 하지만 그 뒤이어지는 그녀의 말엔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너스의 봉인 때문에 그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드래곤들이라면… 혹시나 네가 원하는 지혜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전에 드래곤과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요.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오엘 씨는 장로님께 따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카이티나에게서 뜻밖의 수확을 얻어 미소 지으며 묻는 라미아의 말에 오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엘프를 찾기 위해 이 숲에 들어왔다는 것도 숲 바로 앞에 와서야 알게 된 그녀였다. 당연히 물어볼 게 어디 있겠는가.
라미아는 그녀가 고개를 내젖자 카이티나에게 질문 권을 넘겼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한 쪽에 앉아 있던 제이나노가 불만스레 물었다. 왠지 미랜드 숲에서부터 계속 무시당하고 있는 그였던 것이다.
“저기… 라미아. 왜 저에겐 오엘 씨처럼 안 물어 보는 거죠?”
“아, 참! 호호… 죄송해요. 깜빡했지 뭐예요. 거기다 어차피 제이나노가 하는 질문이라면 왠지 엉뚱한 질문을 할 것 같았으니, 차라리 잘됐죠. 괜히 대장로님을 당황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어지는 라미아의 대답에 제이나노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반박할 수 없는 평소 자신의 행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이어지는 카이티나의 질문에 대해 답할 사람으로 그가 선택된 것이다.
조금 배우긴 했지만 아직 자세한 것까지 알지 못하는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흥분하지 않는 이상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오엘을 제외한다면 설명할 사람은 제이나노뿐이었던 것이다. 선택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설명할 기회가 넘어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다에 가까운 설명이 장로들에겐 상당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던 모양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질 듯한 그의 수다에 장로들이 때때로 웃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한 제이나노와 장로들 간의 대화에 나머지 세 사람은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나 정작 말을 하고 듣는 양측은 오히려 쌩쌩해지기만 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장로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질린 표정의 라미아와 오엘을 부축하며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 길로 어제 메르다의 안내로 가봤던 그 경치 좋은 곳으로 향한 세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저놈의 수다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혹시 앞으로 여행하는 동안에도 계속 저 수다를 들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걱정 마. 동행의 조건으로 그 입에 자물쇠를 채워뒀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상단과 헤어져서는 조용했잖아. 저 제이나노가 말이야.”
이드는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오엘에게 득의 만연한 웃음을 지어준 후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뒤로 눕혀 버렸다. 이 숲의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이 엘프들의 마을이기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누울 때면 등 뒤로 와 닿는 땅의 포근한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곳에 도착한 삼일 동안 틈만 나면 뒤로 몸을 누이는 이드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자연스레 누워있는 이드에게 다가와 다리 베개를 해주는 라미아가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엔 오엘도 때때로 이유 모를 부러움이 들곤 했다.
“헌데, 생각 이상으로 엘프를 쉽게 찾은 것 같죠? 이드님.”
라미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엘은 그녀의 모습에 자신의 검인 소호를 꺼내들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괜히 분위기도 맞추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정도로 눈치 없는 그녀가 아니었다. 물론, 정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뭐, 처음부터 이 정도 시간을 예상했었잖아. 솔직히 처음으로 들른 숲에서 엘프들을 만난 것은 운이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운이 좋았어. 시간도 절약했고, 뜻밖의 정보도 얻었고.”
“하지만 정말 대장로의 말대로 드래곤들이 차원의 벽을 건널 방법을 알았을 까요? 그레센에선 신들도 알지 못한 방법이잖아요.”
“맞아. 그래서 별다른 기대는 안 해. 하지만 돈 드는 일도 아니니 한번 물어보긴 해야겠지?”
그 말에 라미아는 가만히 손으로 가지고 놀던 머리카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여 이드의 얼굴 바로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럼…. 이번엔 드래곤을 찾으실 건가요? 그들이라면, 엘프들보다 더 찾기 어려울지도 모르잖아요.”
“후훗, 좀 어려우면 어때? 어차피 시간은 많고 할 일도 없는데. 그나저나 간지러우니까 너무 그렇게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지 마.”
하지만 그 말에 오히려 라미아는 장난기가 동한 모양이었다. 좀 더 입술을 이드의 귓가에 가져간 라미아는 입김을 호, 호 불어대며 말을 이은 것이다.
“호오… 정말요? 하지만 일리나가 기다리잖아요. 빨리 돌아가 보셔야죠. 안 그래요~~?”
“크… 크큭… 마,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하하… 장난치지 마. 라미… 크큭… 아.”
“호오… 제가 장난은 언제 쳤다고 그러시나요~~ 호오…”
이드는 다시 귓가에 불어오는 따뜻하고 달콤한 입김에 큰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한 발 앞서 그의 어깨를 꼬옥 보듬고 있는 라미아의 양팔에 그 시도는 가볍게 무산되어 버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정신없이 웃어대는 사이, 소호를 손질하던 오엘은 도저히 더는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에 든 소호를 챙겨서는 곧 장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미 오엘을 잊은지 오래인 두 사람이었다.
장로들과의 만남 이후 일행들은 마을의 손님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편히 쉴 수 있었다. 제이나노가 장로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궁금할 정도의 대접이었다. 또한 마을의 다른 엘프들과도 어느 정도 간단한 친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자주자주 얼굴을 보는 데다 메르다와 비르주가 항상 함께 다닌 덕분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일주일 후 엘프 마을을 떠날 때는 꽤나 많은 수의 엘프들이 나와 떠나는 일행들을 배웅해 주었다. 거기다 마을에 들른 기념으로 제법 많은 양의 싱싱한 과일과, 과일주. 그리고 이드가 얻어가겠다고 하던 음료 두 통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지금 그 것들은 모두 라미아의 공간에 상태 보존 마법이 걸린 채 보관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숲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느긋한 걸음으로 미랜드 숲을 나섰다. 오랫동안 숲에 있었던 덕분인지 오랜만에 보는 평야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어딘지 모를 황량한 느낌으로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곧 익숙해지는 감각에 제이나노가 이드와 라미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목적지는 어디죠?”
그 말에 오엘도 궁금하다는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야 이드와 라미아에게 묻어 여행하는 것이니, 두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쉽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목적지는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레어야 드래곤 마음이니 딱히 뒤져볼 만한 곳도 없다. 곤란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에 제이나노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하니…. 목적지가 없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좋아, 그럼 우선은 가까운 큰 도시부터 찾아가자. 그곳에서 정보를 좀 모아야 하니까.”
“정보? 도대체 어딜 찾아가는 데 정보까지 모아야 하는 거예요? 그냥 나한테 말해봐요. 내가 대충 유명한 지역은 알고 있으니까.”
이드는 제이나노의 말에 미소로 답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드래곤 레어니 만큼 유명하긴 하지만…. 아마 절대 어디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난 소란을 떨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거기다 절대 가지 못한다고 우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대답을 미룬 것이었다. 된다면 아무런 소란도 떨 수 없도록 드래곤 레어 바로 코앞에서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수다가 심하고 흥분을 잘하는 그라 할지라도 드래곤 레어 앞에서 소란을 피우진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런 세 사람 앞으로 이번에 오엘이 앞장서서 걸었다. 이 주위에서 이드가 찾는 큰 도시란, 그녀가 상단을 호위해 가기로 했던 록슨시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 오엘은 그 록슨시를 몇 번 왕복해 본 경험이 있기에 일행들의 길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오엘의 설명에 따르면 록슨시는 이곳 미랜드 숲에서 사 일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상업 중심의 도시로 그 규모가 비록 시(市)라곤 하지만 일반적인 시라는 규모의 배나 된다고 한다. 그런 만큼 몰려드는 상인들이 많고 그런 상인들에 묻어 들어오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람들도 많아 이런저런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만큼 활발하고 시끄러운 곳이라고 했다.
일행들은 오엘이 말하는 그 록슨시의 활기를 그 근처에 가기도 전에 직접 느껴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경공을 사용한 덕분에 록슨시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겨우 반나절 정도. 헌데 그런 상황에서 일행들은 노상강도 아니, 마침 언덕을 넘던 차였고 본인들이 스스로 산적이라고 하니 산적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하여간 꽤나 험상궂은 표정에 총 두 자루와 검을 뽑아 든 열두 명 정도의 사내들이 이드들의 길을 막아선 것이었다. 더구나 어디 소설에서 읽었는지 산적이랍시고 대충 기운 가죽옷을 걸친 그들의 모습은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만약 그들이 들고 있는 총과 칼, 그리고 오엘과 라미아를 바라보며 번들거리는 눈만 없었다면 한바탕 웃어버리고 지나갔을 그런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활기찬 곳이긴 한가 봐. 그 록슨이란 곳. 요 얼마간 여행하면서 몬스터 걱정하는 사람은 봤어도 이런…. 산적 걱정하는 사람은 못 봤는데, 말이야. 거기다… 저 웃기는 모습은 또 뭐야?”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고개를 내 젖는 이드였다. 하지만 이드와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을 처음 당하기는 처음인 제이나노와 오엘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뭘 쑥덕거리는 거야. 이 새끼들아! 몇 일 동안 지나다니는 놈들마다 용병 놈들을 붙이고 다녀서 제대로 된 영업을 못했는데, 오랜만에 걸려든 것들은 또 왜 이렇게 꾸물거려? 빨리 가진 것과 거기 있는 두 귀염둥이를 넘겨. 그럼 곱게 보내 줄 테니까.”
“귀염… 둥이?”
챙!!
산적 대장의 말 중 한 토막을 이드가 되뇌는 사이 라미아와 함께 서 있던 오엘의 소호검이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나와 그 날카로운 예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 나쁜 시선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니글거리는 음성이 더해지자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든 것이었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든 오엘의 실력을 알리 없는 산적들은 오엘이 검을 뽑은 든 것보다 그녀의 손에 든 소호검에 더 신경이 가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산적일을 하면서 보았던 무기들 중 수준급에 속하는 소호에 탐욕이 인 것이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총이 있다는 사실에 오엘이 검을 든 사실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것이다.
“히히히… 좋아, 좋아! 거기 도도한 귀염둥이는 특별히 검과 한 셋트로 받아가지.”
정말 저번 오엘이 사소한 문제가 싫어 소호검을 천으로 감고 다녔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