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7화


“…. 준비할 것이라니?”

그렇게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드는 무언가 일을 꾸미는 자의 미소를 지으며 중앙지부 건물로 향했다.

항상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바쁘기 그지없는 가디언 중앙지부의 정문 앞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날 이드 일행들이 떠난다는 말에 길지 않지만 며칠 동안 머물며 꽤나 안면을 익힌 가디언들이 배웅을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는 학교에 있어야 할 치아르도 시원섭섭한 아리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오늘로써 벌써 사흘째 학교를 빠지고 있었다. 최고 학년에 실력도 상당한 만큼 학교생활이 나름대로 여유로운 그였지만, 며칠 동안 학교를 쉰다는 건 상당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빈이 손을 써 놓았었다. 빈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자신이 안내하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지만, 치아르가 이드들과 함께 다니며 가이디어스에서 배울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드들과 함께 있으며 배웠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과적으론 그런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배운 게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빈은 완전히 그런 생각을 지운 건 아닌지 전날 치아르를 붙잡고 내일 떠나는 이드 일행들과 함께 여행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 아닌 권유도 했었다.

물론 죽어라 고개를 흔들어대는 치아르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린 일이었다. 며칠간 이드들과 함께하며 고생한 것들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라미아와 오엘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런 치아르의 앞으로 빈과 디처와는 이미 인사를 나눈 이드가 부룩과 마주 서 있었다.

이드는 섭섭한 표정을 한껏 내보이고 있는 부룩과 악수를 나누었다.

며칠간 그의 주먹을 받아주던 자신이 떠난다니 상당히 섭섭한 모양이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룩의 손을 놓고 품에서 네모 반듯이 접힌 하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종이엔 뭔가 가득 적혀 있는 듯 접힌 부분 뒤쪽으로 검은 글씨 자국이 비쳐 보였다.

이드는 갑자기 꺼내 든 종이에 부룩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것을 부룩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부룩 덕분에 즐겁게 보냈어요. 덕분에 오엘의 초식 운용도 좋아졌고, 이건 그 감사의 표시로 준비해봤어요. 보니까 부룩은 권을 쓰는 솜씨는 좋은데 그 권을 받쳐주는 보법과 신법이 취약한 것 같아서요.”

“그, 그럼… 이게…..”

“…..”

이드는 반색을 하며 묻는 부룩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드로서는 며칠간 머무르며 얼굴을 익힌 부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연이어진 오엘과의 비무에 감사의 표시로 건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드는 부룩으로선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보법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가디언에 기증된 무공 중 보법과 경공들을 찾아보았으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무공을 보유한 문파나 사람이 상승의 무공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드를 만났고 이드의 초절한 신법에 부러움과 함께 어떻게 익힐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대련 때마다 이드의 발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던 부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담담히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이드가 건넨 보법이 이드가 펼쳤던 그것이 아니라 해도 부룩으로선 고맙기만 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기대를 접을 수는 없는 일. 부룩은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이드가 건넨 종이, 아니 이젠 무공서가 되어버린 종이를 조심스레 펼쳤다.

펼쳐 든 종이 위로는 한문으로 멋들어지게 적힌 금강보(金剛步)라는 보법의 이름과 함께 그 밑으로 빽빽이 운용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상승의 보법처럼 보였다.

이드는 찬찬히 금강보의 운용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던 부룩이 감격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금강보는 현란함이나 현묘함은 없지만 금강이란 이름답게 그 움직임이 무겁고 강하며 직선적이죠. 아마 부룩이 쓰는 권의 움직임과도 잘 맞을 거예요. 그리고…. 그거 아무나 보여주면 안 돼요. 지금 세상에 그 금강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저와 부룩, 그리고 여기 라미아뿐이거든요.”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금강보는 이드가 익히고 있는 사대신공 중 오행대천공(五行大天功)의 금(金)에 해당하는 보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드가 익힌 보법 중 그만큼 부룩에게 잘 맞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건넨 것이었다. 과연 부룩도 이드의 설명에 만족했는지 이드의 손을 다시 한 번 붙잡고 고마워했다.

잠시 후, 그런 부룩에게 풀려난 이드는 이번에도 품에 손을 넣어 종이를 꺼낸 후 치아르에게 건네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일행들을 안내해준 보답으로 풍운보의 운용을 적어준 것이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한 이드들은 뒤에 와 있는 빈의 차에 올랐다.

그동안 제대로 접대하지 못한 대신 런던 외곽까지 이드들을 태워주겠다는 빈의 배려였다.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고, 오히려 자네들이 우리에게 도움만 주고 가는군.”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시원하게 열린 도로를 달리던 빈의 말이었다.

그 말에 창밖으로 흘러가는 런던 시내를 바라보던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에이,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하시라니까요.”

“하하하… 그대도 아쉬운걸 어쩌나 이 사람아.”

“그럼, 저희 대신에 소식 좀 전해주세요. 한국에 있는 가이디어스의 연영이란 선생님과 염명대 앞으로요. 잘 있다고 안부를 전했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하고 있었거든요.”

“음, 그런 거야 간단하지. 그런데…. 이제부터 자네들은 어디로 갈 건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중간에 제이나노가 끼어 들어 몇 시간 후 목적했던 런던 외곽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잠시 후, 이드는 돌아가는 빈의 차를 잠시 바라보다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이드의 시선 앞으로 길게 뻗어있는 도로와 나지막한 구릉, 그리고 군데군데 허물어진 집터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드, 설마 이번에도 데르치른이란 곳까지 걸어가는 건 아니겠죠?”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저 앞으로 바라보던 제이나노가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특별히 단련이란 걸 하지 않은 그로선 또다시 걷는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차 안에서 이드가 목적지로 들었던 곳인 데르치른은 저번 항구에서 록슨시에 이르는 거리의 몇 십 배에 달하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걱정스런 그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마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어 라미아가 보기 좋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아니죠. 이번엔 엘프를 만나러 가는 것 아닌 걸요. 하지만 차를 타진 않을 거예요.”

“….. 그럼 기차?”

“아니요. 뭔가 타고 가는 건 아니에요.”

마치 스무고개를 하는 듯한 라미아의 모습에 제이나노와 듣고 있던 오엘이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뭔가 타지 않으면 걸어가겠다는 말밖엔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찌푸려지는 두 사람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라미아는 매고 있던 작은 가방을 열어 영국의 전도가 그려진 지도를 꺼내 보였다.

지도에는 목적지인 데르치른과 저 위쪽에 있는 벤네비스 산,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표시 옆으로는 알 수 없는 기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제 이드님과 제가 준비한 거예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지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준비한 것이라면 단순한 지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라미아는 붉게 표시된 곳을 짚어 보였다.

“어제 이드님과 함께 가디언들에게 물어 알게 된 좌표예요. 텔레포트 좌표!!”

“……!!!”

라미아의 말에 처음엔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이 한순간 그 말을 이해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라미아양이 텔레포트까지 사용할 줄 안단 말이에요? 그것도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을 같이?”

나 놀랐소 하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 제이나노의 말에 라미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확실히 라미아양이 마법을 사용하는 걸 많이 보진 못했으니… 어떤 실력인지 모르고 있었네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미아양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을까요? 텔레포트가 간단한 마법도 아니고….”

“맞아요. 차라리 기차가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그 사이 라미아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스펠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데르치른이 아니라 프랑스라 해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었다.

단지 지금 이 정도로도 놀라고 걱정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생각해 여러 번 이동하는 것으로, 또 중간중간 하루 이틀씩 쉬어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을 뿐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이드의 고집대로 천천히 걸어가거나 기차를 타고 오엘의 수련과 관광을 함께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불쑥 나타난 제로란 단체가 마음에 걸려 좀 더 빨리 행동하기로 한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중간에 그들의 일에 걸려들 경우, 그땐 정말 꼼짝없이 그 일에 말려들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을 생각해보면 왠지 상당한 가능성이 있어 보여 이드를 불안하게 하는 생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라미아의 스펠이 완성되어 가는 사이, 이드는 어리둥절해 있는 두 사람을 급히 끌어와 라미아 뒤쪽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미아와 세 사람을 중심으로 희미한 빛의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라미아의 스펠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그 빛의 밝기도 더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다 생각되는 순간, 라미아의 고우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