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4화
541화
거대한 싸움이 있었던 현장의 모습에 놀라던 일행은 곧 이드와 일리나를 시작으로 주변을 살피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라미아와 일리나의 손에서 마법과 정령의 빛이 펴져 나갔다.
달빛 아래 어둡던 숲 속이 순식간에 대낮으로 변했다.
어둠은 물러갔지만 사방을 뒤지는 사람들의 눈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음은 안타깝고 급했지만 무엇을 찾아야 할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부서진 집터만 해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싸움이 있었을 당시 어떤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는 숲의 생명력에 그 흔적이 모두 먹혀 버린 후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장 마법진을 통해 이동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행은 마법진을 통해 이동했고, 숲의 한가운데가 텅 비어 버릴 정도로 부서진 모습에 이곳에서 검후에게 모종의 일이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찾았다.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이드의 눈에 기둥으로 쓰였을 법한 나무 기둥 하나가 들어왔다.
이름 모를 잡풀 사이에 누워 있는 기둥이었는데 푸른 이끼가 가득했다. 그런데 유독 특이하게도 비스듬하게 잘려진 기둥의 끝부분에는 단 한 조각의 푸른 이끼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부분만큼은 까맣게 나무의 속살이 죽어 있었다.
이드는 그 부분을 가만히 쓸어 보고는 침음했다.
“멸혼(魂)? 아니, 비혼(悲魂)인가?”
이드는 그 검은 속살에 미세하게 남은 난화십이식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검이 남긴 유형의 흔적이 아니라, 초식에 내재되는 심의(深意)라는 무형의 흔적이었다.
그 단단한 바위에 새겨진 글도 지워 내는 시간 앞에서 고작 나무 기둥에 새겨진 흔적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이미 검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특징들은 바람에 흩어지고 비에 씻긴 지 오래다.
다만 기둥을 베어 낼 당시 이미 죽어 버린 나무를 또다시 검게 죽여 버릴 만큼 지독한 살의는 바람과 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미세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드도 미처 알아볼 수 없는 티끌만 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티끌만 한 악의와 살의는 감히 이끼가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끼들이 피한 덕분에 이드는 이곳에 시르피가 있었고, 그녀가 자신이 전한 무공으로 누군가와 싸웠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신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마스터, 뭔가 찾으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흔적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에 특유의 초인기인 간파의 눈으로 제자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던 에단이 다가와 물었다.
“너는?”
“시간이 너무 흐른 것 같습니다. 제 초인기에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드는 에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둥의 잘린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에 뭐가 보이냐?”
“한번 보겠습니다.”
에단은 이드의 말에 기둥을 살폈다. 그냥 봐서는 이끼에 덮여 썩어 가는 나무 기둥일 뿐이다. 에단은 그의 초인기 간파의 눈을 나무 기둥에 집중했다.
그의 눈에 나무 기둥을 덮고 있는 그물 같은 푸른 생명의 흐름이 보였다. 이끼였다. 그리고 그 아래 한 톨의 생명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은 나무. 그냥 맨눈으로 볼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에단은 한참 끙끙거리다가 두 손을 들었다.
“끙.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혹시 마스터께는 뭔가 보이시는 겁니까?”
“흠. 네 눈도 마음이 남긴 편린은 보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마음…………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살기. 그게 남아 있거든 여기에.”
에단은 이드가 자리를 뜬 후에도 끙끙거리며 기둥을 살폈지만 그의 초인기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기라니. 젠장,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에단은 지금까지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초인기의 한계를 본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시르피의 흔적에 대한 확인을 마친 이드는 나무 위로 올라서서 싸움의 흔적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시르피가 남긴 기둥의 흔적을 중심으로 부서진 숲의 외곽을 따라 그녀의 움직임을 상상했다. 그러자 그녀의 상대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셋? 다섯? 모르겠군.”
이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더구나 중원 무림과 달리 이곳에는 마법과 정령, 초인기와 같은 특별한 수법까지 있어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나마 시르피에게 전한 무공 덕분에 그 흔적을 따라서야 겨우 상대의 흐릿한 그림자를 추측해 볼 뿐이었다.
“이래서는 의미가 없는데.”
그때 라미아가 이드를 향해 날아왔다.
[뭐가 좀 보여요?]
“아니,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어. 상대의 숫자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돼.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아. 시르피가 남긴 책에 뭔가 있기를 바라야 할 것 같아. 넌?”
[전 밀실에 있던 마법진과 연동된 마법진을 찾았어요. 지하에 깊이 새겨져 있는데, 역시 인간의 솜씨는 아니에요.]
“세레니아…………인가?”
이드는 밀실에 남겨진 책의 첫 장, 첫 줄에 적혀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아니라면 라일로시드가일 수도 있어요. 확실한 건 시르피의 곁에 드래곤이 있었다는 거죠.]
“시르피가 그런 일들을 자세히 적어 뒀기를 바라야지.”
일리나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던 이드는 곧 나무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돌아갑니다.”
“안 됩니다.”
짧은 이드의 말에 데일리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겨우 찾아낸 단서에서 손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찾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다고 해도 하룻밤 수색으로 찾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좀 있으면 날이 밝을 겁니다. 제가 사라진 걸 알면 소드 팰러스에서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원하신다면 이곳의 좌표를 알려 드릴 테니 지금은 돌아가시죠.”
“……”
이드의 말에 망설이던 데일리는 돌아가서 시르피가 남긴 책을 조사하는 쪽이 더 유익할 거라는 이드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아가 지하에 남겨진 마법진에 우회 라인을 연결했다.
원래 시르피가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마법진의 시동 방법은 집이 무너지면서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이드의 침실에 간단한 대응 마법진을 설치해 두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마법진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과 보안을 위해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제 동료들에게 이곳의 모습을 전할 수 있도록 마법 영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데일리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이드에게 부탁했다.
“라미아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데일리의 인사를 끝으로 그들은 숲 속에서 사라졌다.
특이하게도 에단이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노려보는 가운데 두 팔을 들어 올린 상태에서였다.
“좁아서 어쩔 수 없다니깐.”
숲은 다시 고요함과 어둠의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사흘 후 밤.
한 남자가 숲을 찾았다. 그는 집터와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높이 자라 있는 나무 위에 올라 나뭇가지 속에 감추어진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검은 상자를 조작하자 그 위로 집터가 내려다보이는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 빠르게 흘러가다 사흘 전 이드들이 나타나 숲을 환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멈췄다.
“일 년 만인가.”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상자를 설치하고는 캄캄한 숲 속으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마법진을 통해서 돌아온 이드들은 은밀하게 화원을 나섰다.
들어올 때는 여섯 명이었지만, 나갈 때는 일곱 명이었다. 이번에도 개구멍을 이용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책의 내용을 궁금해했지만 어떤 정보가 이 안에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들에게까지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데일리가 눈을 부라려 두 아가씨를 숙소로 쫓아 보냈다.
이드의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쉬지 않고 책을 펼쳤다. 하룻밤을 샌다고 힘들어할 사람도 없었지만, 느긋하게 하룻밤 자고 읽을 정도로 가벼운 책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탁자 위에 책을 놓고 다섯이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쳤다.
세레니아의 이름으로 시작된 책의 내용은 그 두께만큼이나 오랜시간에 대해 적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와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단하고 짧게 적혀 있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 시르피의 한숨이 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들은 오래전 시간이 흘러간 진실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도 남아 있었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흘릴 내용이 없었다.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읽다 보니 책을 덮었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침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책의 내용을 알고자 찾아 왔지만 에단의 딱딱한 얼굴만 마주하고 돌아가야 했다.
책을 덮은 후에도 한참 동안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소드 팰러스와 검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에단과 데일리도 낯선 책 속의 정보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소드 팰러스에 다시 어둠이 내리자 데일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다시 화원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에단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자신이 접한 정보를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일과 함께 이드 님에 대한 소식을 저희 기사단에 알려도 될까요? 모두 검후님의 수색에 지쳐 있는 상황이라 이드 님의 소식을 접한다면 기뻐할 겁니다. 아, 물론 책에서 접한 정보는 단장님께만 보고하도록 할 겁니다. 어쩌면 급하게 화원으로 돌아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 소식이야 이미 소문이 많이 퍼져 있으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드의 말대로 화원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데일리의 정보가 가장 늦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은색 기사단장께서 돌아온다면 저도 꼭 만나 뵙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이드는 활짝 웃는 데일리를 향해 책을 내밀었다.
데일리는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 책을 바라보다 그 안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 잠깐의 망설임이 떠오르고 그녀가 책을 밀어냈다.
“역시 이 책은 이드 님께서 보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드는 데일리가 책을 거부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고개를 흔들고 데일리의 손에 책을 올려주었다.
“가져가세요. 은색 기사단장님이 궁금해하실 내용들이고, 돌아오신다면 당연히 찾으실 책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가져가세요. 검후께서 책에도 적었듯이, 은색 기사단 안에는 믿음을 배신한 자가 없습니다.”
까득!
이드의 말 속에 들어 있는 한 단어에 데일리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