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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51화


1486화

“역시 그가 이 땅에 있을 때 제가 잡았어야 했습니다.”

나람 공작은 후회를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는 종종 자식들을 불러 이렇게 가르쳤다.

“후회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일 때가 되어서야 떠오르지. 바꿀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는 일이 없도록,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라.” 나람 공작이라는 사람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 말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늘 신중하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나람 공작의 성격은 신중이라는 말보다 곧았다.

한번 결정하면 어지간해서는 굽히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그가 벌인 일 중 몇몇은 가끔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람 공작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이런 나람 공작이 후회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이드를 잡지 못한 일이었다.

특히 이 실패를 통해 스스로의 모자람을 통감했기에 패배감은 특히나 컸으니, 가끔 황제가 지금처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후회를 하게 된다.

그때 그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평소 그의 주장처럼 되돌릴 수 없는 일에 가정에 가정만 더하며 실패를 되새기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황제는 작게 내심 혀를 찼다.

“이미 다 지난 일이오. 무엇보다 내 결정이고, 내 명령으로 행해진 일이었소.”

“그리고 그 명을 완수하는 것이 제 몫이었습니다.”

“거, 평소 공작답지 않은 소리를・・・・・・ 에잇.”

너무도 전형적인 실패자의 레퍼토리를 따라가는 나람 공작. 황제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솔직히 그때의 실패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난 일. 그로 인해 자신이 아끼는 신하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나람 공작은 라일론이 자랑하는 검이며, 주요 전력 중 하나. 그런 나람 공작이 이런 모습이어서는 곤란하다. 더욱이 머지않아 실패의 원인을 마주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특히나.

그런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제가 집무실 한쪽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술병을 들었다.

그로불린.

귀한 증류주로 황제가 가끔 혼자의 시간을 즐길 때 함께하는 술이었다. 황제는 두 개의 술잔에 그로불린을 가득 부어 그중 하나를 나람 공작에게 내밀었다.

“지금 공작의 모습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소. 설마 검후의 사신을 앞에 두고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은 아니리라 믿소.”

“절대・・・・・・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전 그저 폐하께서 내린 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죄스러워…….”

“아아, 이제 그만 하라니까. 공작이 자꾸 그래서야, 내 탓인 것 같지 않소. 그러니 이후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마시오. 이건 명령이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팅!

황제가 내민 잔의 아래쪽에 잔을 살짝 부딪친 나람 공작이 잔에 가득한 술을 단숨에 비운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모금 마신 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신을 다시 손에 들었다.

“이 서신에 적힌 내용, 공작은 어찌 생각하시오? 검후가 갑자기 사신을 보낸 이유 말이오.”

“몇 가지 짐작되는 일은 있으나, 당장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독하기로 유명한 그로불린을 원샷 했음에도 술기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나람 공작이 똑바로 자신의 의견을 냈다.

누가 있어 황제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습이 옳다.

사실 검후가 사신을 보낼 만한 일로는 몇 가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당장 그녀가 납치 감금되었던 일과 관련해 바벨과의 충돌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 수도 있으며, 당장이라도 시작될 것 같은 마스와의 전쟁에 중립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또 삼검왕의 배반에 따른 후처리를 위한 라일론의 지지를 요청할 수도 있고, 미완의 마탑이라는 흑마법사의 토벌에 관련된 비밀을 논의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라면 검후가 아닌 황제가 나서야 옳다. 거기에 굳이 사신을 보낼 필요도 없이, 짧은 서신이나 통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신을 보낸다는 것은 이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

정확한 정보가 없는 입장에서는 무어라 확신하기 어려운 일. 다만 몇 가지 확인된 정보를 통해 짐작 가는 건 있었다.

“다만 제 짐작에는 마스에서 있었던 두 건의 거대한 전투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두 건의 전투라. 공작은 그 두 건이 모두 전투에 의한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구려.”

“전투입니다. 폐하께서도 보고를 받으셨지 않습니까.”

쉐어 가든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영지에서 벌어진 폭발과 신비로운 현상들. 증거가 없다면 그저 헛소문으로 취급될 수일이었지만, 폭삭 주저앉은 건물과 파괴의 흔적 때문에 마스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사건에 대한 보고는 황제와 여러 대신들이 함께한 대전 회의까지 올라왔었다.

“그랬지. 하지만 전투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지 않소.”

“능력 없는 자들의 부정일 뿐입니다. 하늘을 찢어내는 빛줄기, 폭음, 대지를 울리는 울음소리, 사방을 달리던 기사들. 저는 오히려 그 수많은 증언들을 어떻게 다 부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쉐어 가든의 일은 확실히 공작의 말 대로요.”

“블레인 자작령에서 벌어진 일 또한 그렇습니다. 앞서와 같은 정확한 증언들은 많지 않지만, 그 무자비한 파괴의 흔적들은 쉐어 가든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보고였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공작의 생각은 검후가 보내는 사신이 이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특히 두 건 모두 검후와 관련된 장소였습니다. 쉐어 가든은 검후가 감금된 곳이었으며, 블레인 자작령은 흑마법사들의 본거지 중 하나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다만 이 두 건이 검후 관련이라 해도 마스와 흑마법사들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자리에 남은 파괴의 흔적. 힘의 크기가 너무 다릅니다. 일찍이 마스나, 흑마법사들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벌써 세상이 알았을 겁니다. 마스도 흑마법사도 결코 힘을 감추고 있을 성질의 물건들이 아니니까요.”

“훗, 그렇기는 하지. 특히 마스 그 전쟁광들이 힘을 가지고 자중할 리가 없지.”

검을 얻었으면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 바로 마스였다. 그런데 검도 보통 검이 아닌 그런 가공할 위력의 검을 얻었다면 우선 주변

왕국들부터 잡아먹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렇습니다. 제 삼의 세력이 있을 겁니다.”

“제 삼의 세력이라. 그거 낭만적이군.”

어디 영웅소설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대뜸 낭만을 찾는 황제에 나람 공작은 쩍하고 입맛을 다셨다.

술이 또 당겼다.

“……하아, 그리고 여기에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오. 쉐어 가든과 블레인 자작령 두 곳 모두 검후와 관련이 더 깊은 곳이지.”

그러니 이드는 그저 검후를 구했을 뿐,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 황제의 의견이었지만, 나람 공작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그 의견을 부정했다.

“분명 그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한 바와 같이 누구도 가지기 힘든 힘입니다. 그런 힘이 있다면 굳이 검후를 납치하고 감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공 말고 어렵게 납치한 검후를 굳이 감금해둘 필요가 없다는 나람 공작의 주장. 이 말에는 황제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다른 전쟁 포로와는 다르다.

어느 귀족 집 자제를 납치하는 것과도 다르다.

검후를 납치해서는 몸값 거래도 불가능하고, 이후 도망쳐 숨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말이지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제국의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와 관련된 모두를 찾아낼 테니까. 그런 위험을 알고도 검후를 납치 감금했다면, 검후 본인에게 얻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무공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쉐어 가든을 날려버린 그런 힘이 있다면, 무공 따위가 왜 필요할까. 그러니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나오는 것이다.

“흐음, 공작의 말에 옳다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관련된 제삼자 세력인가. 거기에 검후의 납치 감금에까지 관련이 있고.”

“지금은 무엇하나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그 내밀한 사정을 알려 주겠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으로 이번 사신이 가져오는 정보는 제법 중요할…….”

사신으로 오는 인물도 중요하지만, 그 사신이 가져올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나람 공작이었지만, 아쉽게도 황제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듯했다.

“혼돈의 파편..”

그런 황제의 입에서 툭 하고 굴러 나온 말.

순간 나람 공작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것은 혼돈의 파편이라는 말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혼돈의 파편은……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황실 역사에 선명하게 기록된 존재들이오. 그것도 짧은 한 줄이 아닌, 다섯 장을 가득 채운 선명한 기록으로 말이오. 즉, 이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란 말이지.”

이드가 나타난 후 라일론에서는 과거의 기록을 찾았고, 그 속에서 마인드 마스터의 활약과 혼돈의 파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특히 혼돈의 파편에 대한 기록은 제국 역사에는 없고, 오직 황실 역사서에만 기록되어 있었다.

세상의 멸망을 이끄는 사자라니.

동화 속 마왕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 단순히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사건들이 여럿 나타났다. 하룻밤에 폐허가 된 쉐어 가든이 그렇고, 산이 통째로 날아간 블레인 자작령의 일이 그랬다.

그리고 그에 맞춰 달려오고 있다는 검후의 사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자세한 정보가 있어야겠소. 공작은 명예 후작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신의 도착에 맞춰 대공작들도 소집하겠소.”

나람 공작을 포함한 대공작들.

그들이야말로 라일론 제국의 핵심이며 기둥, 황제가 그런 이들을 소집했다는 것은 사신의 방문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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