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52화
1487화
안티로스에서 날아온 마차는 매우 쾌적했다.
다른 걸 떠나 승차감만은 이전 검후의 소드 팰러스 복귀에 사용한 마차 못지않았다. 이런 마차를 끄는 말은 네 마리에 마부는 두 명.
일반적으로 규모가 이만큼이 되면 국경에서도 검문을 설렁설렁 넘기지 않지만, 이드 일행은 달랐다.
따로 명령을 받은 것이 있는 듯, 호위대 기사가 내보이는 증명서 한 장에 바로 국경 검색대가 열렸다. 마차 내부에 대한 수색 같은 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국경에서 잠시 멈췄을 뿐.
한번 달리기 시작한 마차는 멈추지 않고 하루 종일을 이동했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숙소 앞에 처음으로 멈춰 섰다. 첫날부터 상당한 강행군이었지만, 그에 대해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스폴이 신경 써서 호위대를 꾸린 덕분이었다.
말도 마찬가지. 중간중간 속도를 조절하며 숨을 돌리고, 포션을 통해 체력을 회복시키기를 반복한 덕분에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평소 스폴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만큼의 계획적인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라미아가 한마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말이.
“이거요? 클라인 백작님이 짜주신 계획대로 움직였을 뿐인데요.”
그러면 그렇지.
물론 스폴의 수고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아예 다른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러자 그 말에 스폴이 얄궂은 웃음과 함께 속닥거리며 비밀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에 관련해서 백작님께 미리 주의를 들었죠. 이동 중에 절대로 피해야 할 한 가지에 대해서요.”
“절대로 피해야 할 것? 그런 게 있나?”
또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있던가? 여행길이란 원래 예측불허의 연속이 아니던가. 전력이 강하면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대처가 가능하지만, 많으면 또 많은 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바로 여행길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피할 수 있는, 아니, 피해야 하는 일이란 뭘까?
“있더라고요. 각 영주들의 초대. 백작님은 그게 제일 큰 문제라고. 그것만 확실하게 거절하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걸리면 일정이 하염없이 늘어질 거라면서.”
“아, 그렇기는 하겠네.”
“그렇죠? 저도 생각해 보니까. 그게 제일 문제가 될 것 같더라고요. 이드 님이 계신데, 전력이 부족한 일도 없고. 그렇다고 마차가 부서질 것도 아니고, 제일 문제는 괜히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질 영주들이더라고요. 으으~ 아주 고블린 떼가 따로 없죠.”
스폴은 징글징글하다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경험이 많나 봐?”
“검후 님을 모시고 움직이면 그런 거머리 같은 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매일 모여들었었거든요.”
“그렇겠네.”
검후라니.
중앙에 인맥을 만들고 싶은 귀족들에 있어 그야말로 황금 고블린 같은 존재다. 어떻게 안면만 제대로 틀 수 있다면 두고두고 이득이 될 수 있는 일이니, 그들도 필사적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선 이드도 다르지 않다.
물론 이드의 방문 사실은 검후의 행적처럼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경을 검문 없이 넘은 것을 볼 때, 최소한 중요한 사신이라는 사실 정도는 확인이 되었을 것이다. 중앙 정치에 나서고 싶거나, 주요 인맥을 만들고 싶은 지방 영주들에 있어 그 정도만 해도 움직일 이유로는 충분했다. 사신을 근사하게 대접하고, 그를 통해 황제에게 말 한마디라도 전해진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아직은 수도와 거리가 있어 소식이 늦어 조용하지만, 점점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권유는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 클라인 백작의 예측이라는데.
이드는 문득 궁굼했다.
“혹시 거절할 방법도 받아온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여유는 설명이 안 된다.
자작이나 남작급이면 몰라도 백작급의 초대를 어떻게 거절하려고?
“느하하. 당연하죠. 바로 이겁니다. 위대하신 검후 님의 통행증!”
촤르륵!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종이 끝에는 선 굵은 검후의 서명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여긴 아나크렌이 아니라 라일론이잖아. 그게 통해?”
“당연히 통합니다. 그레센 대륙에서 검후 님의 통행증이 통하지 않는 곳은 저~기 카논 말고는 없습니다. 라일론의 기사라고 소드 팰러스에 입학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한다.
그에 다시 살핀 통행증의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위 사람이 내 명령으로 급히 움직이는 것이니, 길을 비켜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담긴 짧은 글이었다. 아무리 라일론이라고 해도 저 글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스폴의 주장.
또 사실이기도 했다.
“진짜 꼼꼼하게 준비 잘했네.”
“괜히 여정 꾸리는데 사흘이나 걸린 게 아니라고요. 오죽하면 혹시 몰라 노숙에 대한 준비까지 다 했는데요.”
스폴은 그 덕분에 꽤 진땀을 흘렸다면서 자신의 수고에 대해 피력했다.
그 말처럼 일행 뒤에는 노숙을 대비한 짐마차 한 대가 추가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사두마차를 개조한.
혹시 말이 지쳐 뒤로 쳐지는 경우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아무튼, 이런 짐마차에는 노숙에 필요한 최고의 물품들과 함께 하인 및 하녀들도 타고 있었다. 스폴이 고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전문 고용인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잘 훈련된 기사나 병사들이 동원되는 강행군을 견딜 수 있는 이들로 구해야 했으니 말이다.
“알았어. 돌아가면 이번 고생에 대해서는 꼭 보답할게.”
“히히, 정말이죠? 저 정말 기대합니다?”
“기대해. 정말 준비 잘했으니까.”
“아, 준비하니까 생각났는데. 가일라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봐두라고 클라인 백작님이 주신 게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후다닥 방을 나서는 스폴.
잠시 후 다시 이드 들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제법 두툼한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클라인 백작이 뭘 챙겨 준 것일까.
호기심에 가방을 받아 든 이드가 가방을 열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수십 장의 서류였다.
“이게 뭐야? 초상화?”
가장 위에 놓인 것은 몇몇 사람들의 초상화였다.
특징을 잘 잡아 섬세하게 그려낸 초상화는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았는데. 그중에는 이드에게도 낯익은 사람이 몇 있었다.
“이 사람, 라일론의 공작이잖아?”
이드가 골라낸 초상화는 다름 아닌 나람 공작의 것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초상화 하단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모습에 라미아와 일리나가 다른 초상화를 살폈고, 아니나 다를까 각 초상화의 하단에는 초상화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공작 아니면, 후작의 대귀족들이었다.
“그 사람들 전부 라일론 제국의 대공작들입니다.”
“대공작도 아니고 대공작들?”
“네.”
스폴이 클라인 백작이 서류와 함께 전달한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클라인 백작님의 말씀을 옮기자면 라일론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황제와 함께 여기 있는 아홉 명의 대공작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결정한 일이라면, 그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하다고요.”
그야말로 라일론 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란 말이었다.
“대공작이라, 아무리 제국이라지만 공작이 아홉이나 돼?”
“그들이 많은 것이 아니라, 아나크렌의 공작이 작은 겁니다. 아나크렌도 그렇고 라일론이 얼마나 넓은데요.”
현 아나크렌 제국의 공작은 네 명, 라일론의 공작은 아나크렌의 두 배가 넘었다.
“맞아요. 제국의 공작은 항상 여섯 이상이었어요.”
일리나가 말했다.
“그럼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데?”
“후후, 두 제국의 가장 큰 차이가 뭐겠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스폴.
다른 걸 떠나서 저 우쭐한 표정을 보니, 어쩐지 답이 짐작이 되는 이드였다.
“설마 이것도 검후 때문이야?”
“당연히 검후 님 덕분이죠. 검후 님이라는 커다란 산이 있는데, 공작이라는 커다란 정치세력을 왜 허락해 줍니까?”
공작이란 황제를 제외한 가장 강력한 권력의 정점이다.
이들은 제국의 강력한 전력임과 동시에 황제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대대로 황제는 이 공작들의 힘을 견제하는 한편, 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있으면 부담이고, 없으면 나라의 전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가 되는 자들. 과거 각 제국 내 공작의 숫자는 서로 비슷비슷했다.
하지만 소드 팰러스와 함께 검후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공작을 상징하는 힘의 기준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특히 이런 변화는 검후가 속한 아나크렌이 가장 심했다.
오직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기준을 정할 수 없게 된 것. 그 결과 지금 아나크렌에는 네 명의 공작만 남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 제국의 황권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죠.”
감히 기사 주제에 황권을 논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은색 기사단 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말에는 오류도 있었다. 아나크렌의 황권은 강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위협을 같이 안고 있었다.
바로 검후 말이다.
그녀란 존재는 언제든 황제에게 가장 치명적인 경쟁자로 자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에겐 결단코 그럴 마음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 서류를 챙겨준 건 이들을 조심하라는 뜻?”
“에이, 설마요. 이드 님이 신경 쓰실 상대는 오로지 라일론 제국의 황제뿐입니다. 비록 이들의 발언권이 강하긴 해도 조심해야 할 정도는 아니죠.”
“그럼 이 서류는 왜 챙겨 준 건데?”
“그럼에도 미리 알아두셔야 하니까요. 황제와 만나는 자리에는 분명히 이들도 함께할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와의 대담에 끼어들 수 있는 유일한 인간들이니까요.”
혹시나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을 미리 대비하자는 의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