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69화
1504화
그 시각.
황제는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시종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은 별궁에 들어 계시옵니다.”
“그런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생각과는 많이 다른 반응에 시종장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가장 아끼시는 올리비아 황녀에 관한 일이었다. 그런 황녀가 사신을 따라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는데, 어째 반응이 영 시원찮다? 보통 때라면 어떤 놈팡이가 수작질이냐며 벌떡 성을 내셨을 텐데.
어쩐지 정신이 딴 곳에 가 계신 듯도 했다.
그런 생각에 시종장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 사람을 보내어 황녀 전하를 모시고 오라 할까요.”
“아니다. 명예 후작 부부와 친분을 쌓을 기회이니, 그냥 두어라. 근처에 있다가 비비가 궁으로 돌아가는 것만 확인하라.”
비비는 황녀의 애칭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부를 때까지 나가 있으라.”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명령에 시종장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조용한 집무실.
혼자 남은 황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섬세하게 복기하기 시작했다.
깊은 생각에 빠져 그대로 굳어버린 황제.
한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그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를 찾았다. 평소라면 술을 마셨겠지만, 지금은 맑은 정신이 필요했다. 그렇게 냉수로 달아오른 머리를 식힌 황제는 돌연 밖에 있는 시종장을 다시 불렀다.
“밖에 있느냐.”
“예, 황제 폐하.”
즉답과 함께 반쯤 열리는 문.
“나람 공작과 파리네르 백작이 지금 궁에 있느냐.”
“나름 공작은 지금 저택에 있고, 파리네르 백작은 아직 궁내에 있사옵니다. 둘을 들라하오리까.”
“흐음. 아니다. 그냥 두어라.”
잠깐 고민하던 황제가 손을 저었다. 그에 조용히 닫히는 집무실 문.
이후 황제는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그가 보던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황제의 눈은 서류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서랍을 열어 두툼한 서적을 꺼내 들었다. 황실 역사서였다.
황제는 원하는 내용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곧 원하던 부분을 찾아내 읽기 시작하는 황제.
몇 장을 순식간에 읽어내린 황제는 탁하고 책장을 덮었다.
“만약 검후가 과거 맹약에 대한 부활을 원하는 것이라면?”
황제는 자신이 예측한 내용을 곱씹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서에는 마인드 마스터, 혼돈의 파편과 함께 그에 관련한 맹약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세세한 내용을 포함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내용만으로도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몇몇 경우는 자국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내용. 이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로서 쉽게 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째서 확인되지도 않은, 쉬이 믿을 수 없는 내용 때문에 제국이 천문학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듣기는 했다.
“혼돈의 파편…….”
스스로도 혹시나 하던 부분이긴 하지만, 진정 그런 엉터리 같은 존재가 실존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긴 했다.
어디서 어디까지, 그걸 또 얼마나 믿어야 할까.
사실 역사서에 적힌 내용과 이드 명예 후작을 통해 들었던 내용의 절반만 진실이어도 맹약의 부활에 대해 심각하게 고심해야 옳다.
“옳지만 대신들이 이를 얼마나 납득할지…… 직접 들은 나도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 일인데.”
우선 자신조차 확신이 없는데, 신하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황제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역사서를 톡톡 두드리며 다시 또 고심했고, 그러다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보 같은 짓이군. 나와 제국을 이해시켜야 하는 건 오롯이 검후의 몫이다. 처음부터 내가 고심할 일이 아니었어. 허허허.”
간단한 사실을 떠올린 황제는 스스로의 행동이 우스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왜 쓸데없는 일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가.
황제는 금방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흥분에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이야.”
명예 후작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혼돈의 파편에 관한 이야기.
그들과의 상상할 수 없는 전투.
맛있는 술과 함께 삼켰던 그때의 흥분과 재미에 자신이 잠시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저들의 일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길 정도로. 하지만 과연 혼돈의 파편의 일이 꼭 저들의 일이기만 할까.
정녕 저들의 목표가 세상의 멸망이라면, 그것의 나와 우리의 일이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역사서를 잠시 바라보다, 곧 이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있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황제는 곧장 밖에 있는 시종장을 불렀다.
“밖에 있느냐!”
“예, 황제 폐하.”
“급히 찾아와야 할 문건이 있다.”
우선 맹약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은 황제다.
***
황제가 홀로 집무실에서 백 년 전의 서류를 뒤적이는 사이.
라미아와 일리나 사이에 앉은 황녀는 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파에 대롱대롱 매달린 짧뚱한 다리가 그 증거다.
달랑달랑.
다리는 신이 난 황녀의 마음을 따라 잠시도 쉬지 않고 신나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라미아는 이런 황녀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황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감히 황족의 머리에 손을 대다니.
다행히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엔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의 그림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주 마법사나 공주 기사라는 것도 전부 황자님들이 이야기해 주셨다는 거지요?”
“특히 셋째 오라버니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황녀가 힘차게 대답했다.
공주 마법사를 찾아와 공주 기사에 놀란 황녀.
공주 기사는 또 뭐냐는 물음에 황녀는 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막내를 중심으로 자주 모이는 황자와 황녀들. 그중 셋째 황자가 제법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화책의 내용을 조금 비틀어 올리바아 황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그렇게 만든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항상 공주 마법사와 공주 기사였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황녀는 어느샌가 공주 마법사와 공주 기사를 동경하게 된 것.
그런 중에 한 황자가 입궁하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보고 황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이라고.
그 딴에는 황녀를 놀릴 목적이었겠지. 아무렴 황녀가 이 밤에 별궁으로 직접 찾아올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오라버니로군요.”
일리나가 말했다.
그에 문득 궁금증이 든 이드가 일리나 옆으로 가 조용히 물었다.
“엘프 남매는 어때요? 사이가 좋은가요, 나쁜가요?”
간단한 물음이었지만 의외로 일리나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저희 엘프의 경우 나이가 가까운 남매는 잘 없어서. 그래도 제가 본 남매들은 모두 사이가 좋았어요.”
“아, 나이 차이. 그렇긴 하겠네요.”
이드는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을 새삼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이 차가 적은 남매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수가 많지 않은 엘프다. 그들이 아이를 낳아봤자 얼마나 낳아 기를까. 또 둘 이상을 낳는다고 해도 그렇다. 그 텀이 아무리 짧아도 십 년 이상은 넘어가지 않을까?
저들에게는 그 정도도 인간의 기준으로 일 년 정도의 느낌일 테니까.
형제의 나이가 기본 수십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그렇다.
인간처럼 살벌하게 다투거나 싸우는 경우는 잘 없을 수 밖에 없긴 할 것 같다.
그리고 올리비아 황녀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다른 형제들과 나이 차가 제법 있다는 말이다. 가장 가까운 쪽이 여덟 살 차이다.
그래서일까? 황녀가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네, 저도 오라버니들이 좋아요.”
황제뿐 아니라, 형제자매들 모두에게 사랑받는 올리비아 황녀였다.
“그래요. 형제들과는 친하게 지내야죠. 잘하고 있어요. 이건 좋은 아이라는 칭찬의 의미로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라미아가 입에선 달콤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황녀에게 또다시 푸딩을 내밀었다.
그녀의 아공간에 들어 있던 푸딩은 인스턴트가 아니라, 예쁜 접시에 꿀과 요거트가 뿌려진 고급 제품이었다.
이미 이드에게 사탕을 얻어먹었던 황녀는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앙증맞은 두 손을 푸딩 접시를 받아 든 것.
“이것도 먹는 건가요?”
“푸딩이에요. 입에서 살살 녹아서 맛있답니다.”
“입에서 살살…… 추릅.”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흘리는 황녀.
그녀는 홀린 듯 티스푼으로 푸딩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곧이어 작은 눈이 폭발적으로 반짝이며 몸을 떨었다.
“으흥~ 마이쪄!!!”
“풉!”
순간 나온 혀 짧은 소리에 이드의 입에서 웃음이 새고 말았다.
덕분에 라미아가 그를 노려보긴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정작 황녀 본인은 주변의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푸딩에 빠져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잠시 후 푸딩이 사라질 때까지 주변의 모두는 황녀의 먹방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후아~ 잘 먹었다!”
접시를 싹싹 비운 황녀가 배를 두드렸다.
크지 않은 푸딩이었지만, 황녀의 작은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배를 채운 황녀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공주 마법사 명예 후작 부인께 부탁이 있어요.”
“그 호칭은 너무 기니까, 라미아로 불러 주세요.”
“그럼 공주 마법사로 부를래요. 라미아 공주 마법사님. 부탁이 있어요.”
“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부탁이죠?” “네, 제 스승님이 되어 주세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앉은 황녀.
그녀는 반대쪽에 앉아 있는 일리나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일리나 공주 기사님도 제 스승님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미아뿐 아니라, 일리나에 까지.
어쩐지 공주 기사라고 놀라는 모습이 심상치 않더라니.
“욕심도 많지.”
이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