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73화
1508화
어렵지 않은 요청이었다.
그에 앞으로 나서자, 공작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이드는 잠시 말을 고른 후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 공작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아나크렌 제국의 이드 예천화입니다.”
어차피 친분을 쌓기 위한 자리도 아니다.
짧은 인사말로 말문을 연 이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는 지금부터 혼돈의 파편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혹시 공작님들께선 혼돈의 파편이라는 이름을 이전에 들어 보셨습니까?”
“난 황제 폐하의 말씀을 통해 그런 존재가 있음을 최근에 알았소.”
나람 공작이 덤덤하게 답했다.
어지간해선 먼저 나서는 일이 없는 사람이 나서서 답하자, 다른 공작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역시 알고 있구나.’
이드는 나람 공작의 대답과 공작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알았다. 황제는 전날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이들과 공유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따라오는 의문 하나.
‘그럼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키는 이유가 뭐지?’
주요 대신들이 모여있는 공식적인 자리라면 몰라도, 이 자리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잠깐이었다.
의아하긴 하지만 어차피 정보 전달은 직접 하는 것이 정확하니까.
뭐, 부당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야.
이드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제보단 정보 전달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말이다.
“혼돈의 파편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백 년 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굵직굵직한 사건들.
백 년 전 있었던 제국 전쟁.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초인들의 폭주 사고
미완의 마탑을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
소드 팰러스에 대한 음모.
검후에 대한 습격까지.
사실 자신이 알지 못할 뿐, 혼돈의 파편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인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공작들이라면 이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혼돈의 파편이 지닌 위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바로 드래곤과 관련된 건이다.
그들이 긴 시간 혼돈의 파편과 싸워왔고, 그러던 중 저들의 함정에 빠져 세상 밖으로 쫓겨난 일에 대해서다.
누가 뭐래도 드래곤은 이 중간계 최강의 존재들이다. 그런 드래곤이 세상 밖으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저들에게 괜한 혼란과 두려움만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가 끝났을 때, 대전은 고요했다. 공작들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본 이드는 저들이 혼돈의 파편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할 필요 없는 한 마디를 더했다.
“사실 혼돈의 파편이 동화 속 마왕처럼 어처구니없는 존재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허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실재하는 위협이며, 멸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였소.”
“아닙니다. 사신으로서 제 임무이기도 합니다.”
이드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황제가 공작들을 향해 말했다.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을 것이오. 의문이 있다면 기탄없이 질문하도록 하시오.”
“그럼, 제가 먼저 이드 명예 후작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아마람 공작이 나섰다.
황제가 허락하자 그가 이드 앞에 섰다.
“명예 후작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솔직히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소.”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심하지는 않겠소. 황제 폐하께서 직접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들에 대해 언급해 주셨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소. 그중 가장 큰 의문은 왜 지금에 와서 아국에 이런 사실을 알리느냐는 점이오.”
“이유는 간단합니다. 라일론의 협력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혼돈의 파편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상, 저희만으로는 저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손이 모자란다고나 할까요. 과거 라일론과 아나크렌 양국도 그랬었습니다. 해서 백년 전 양국은 혼돈의 파편을 상대함에 있어 힘을 합치기로 맹약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맹약을 부활시켜 라일론이 협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좋은 말씀이오. 혼돈의 파편이라는 자들의 목적이 이 세상의 멸망이라면 라일론 제국은 그들을 막기 위해 당연히 최선을 다할 것이오. 하지만
말이오. 그들에게 정말 세상을 멸망시킬 힘이 있는 것인지가 아직 의문이오.”
“혼돈의 파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앞의 말씀과 조금 다릅니다만?”
“다르지 않소. 그런 존재들이 실존함은 인정하겠소. 목적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뭐,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자그마치 세상의 멸망이오. 이 끝없는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멸망시킨다는 말이오. 저들에게 과연 그만한 능력이 있소?”
“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나타나고 백년이 지났기 때문이오. 세상은 여전히 멀쩡하게 굴러가고 있지 않소. 저들에게 정말 세상을 멸할 힘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이오. 저들에게 정말 그만한 힘이 있다면 아무도 저들을 막을 수 없을 텐데. 그렇지 않소?”
날카로운 지적이다.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를 뺐더니, 정확하게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온다. 과연 제국의 중심추라는 별명이 모자라지 않는 남자다.
이드는 내심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럼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혀야 할까?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아마람 공작님의 의문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저들 혼돈의 파편은 재앙처럼 강력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들은 아닙니다. 지금 저들은 계약이라는 족쇄에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와 함께 이드는 해방의 마법사 게르만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혼돈의 파편을 해방시키고, 걸어 놓은 계약에 대해서도.
하지만 아마람 공작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런 계약이라면 앞서 명예 후작이 말한 저들의 위험성은 많이 과장된 것이 아니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이 계속해서 계약에 묶여 있었다면 아마 수백 년은 더 이 상태가 유지되었겠지요.”
“혹시 누군가 그 계약을 파괴한 것이오?”
“아닙니다. 다행히 계약은 살아 있습니다.”
“그럼 갑자기 멸망을 언급해야 할 정도로 저들이 위험해진 이유가 무엇이오?”
아마람 공작이 가진 의문의 핵심이었다.
그에 공작들과 황제가 귀를 기울였다. 황제도 이와 같은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반응에 이드도 내심 혀를 찼다.
어떻게 질문들이 하나같이 핵심을 찌르는지, 아마람 공작의 혀가 보통 매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 때문입니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대답이구려.”
아마람 공작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설마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드래곤일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놀란 건 아마람 공작만이 아니었다.
“드래곤 때문이라는 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의문을 참지 못한 황제가 질문 중에 끼어들었다. 동시에 그는 이드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어째서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가진 위험성을 아는 것은 저희만이 아닙니다. 드래곤들도 이런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지난 백년 간 드래곤들은 직접 나서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조만간 드래곤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는 혼돈의 파편을 처리하려 할 것입니다.”
“드래곤들이 나선다면 혼돈의 파편을 상대할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혼돈의 파편도 위기를 자각하고 있지요. 즉, 그들에겐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약을 완성할 시간도,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임무를 완수할 시간도.”
“・・・・・・그럼, 결국 시간에 쫓긴 저들이 선택을 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계약보다 신께 받은 임무를 우선한 것이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중간계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이지요.”
“계약을 버리고, 멸망을 최우선 한다니. 그럼 계약은 저들에게 아무런 강제성도 없다는 말인가? 내가 알기로 그런 존재들은 약속을 매우 중하게 여긴다고 하던데? 폴카 공작, 그렇지 않소?”
“황제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강철 지팡이를 짚은 폴카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라미아가 끼어들었다.
“옳은 말이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혼돈의 파편 정도 되는 존재라면 충분히 계약을 비틀어 미루고, 결국엔 파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명예 후작 부인의 말씀 또한 틀리지 않소. 하지만 상차원의 영적인 존재에 있어 계약의 무결성은
“공작님의 말씀은 정론이죠. 하지만 상차원의 존재들이 가진 업의 권능은…….”
계약의 중요성을 언급하던 중에 갑자기 시작된 마법적 토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향연에 잠시 아찔했지만, 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두 사람의 토론을 중지시켰다.
그냥 두었다가는 토론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좌우간 마법사라는 족속이란.’
어수선해진 분위기가 정리되자 다시 이드가 나섰다.
“저도 혼돈의 파편이 기존의 계약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계약의 내용과 함께 멸망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계약을 파괴한 것인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드래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저들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점입니다.”
“허어.”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