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0화


547화

창이 제법 아프게 어깨를 두드렸지만 케마란은 작은 신음 한 조각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시시한 통증보다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스스로의 육체에 대한 통제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자신의 몸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그녀가 링스피어를 배우기 위해서 창술과 팔치온을 비롯한 검술을 익힐 때도 그랬다.

그녀는 링스피어조차 홀로 익혀 냈다. 혼자 궁리하고 실패하면서.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몸은 그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현실에 풀어내 주었다. 한 번도 지금과 같은 답답함은 느끼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들은 적은 있었다. 검법을 익히며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어려움에 대해서 말이다. 솔직히 그 당시 그녀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검법을 익힐 때도 그런 어려움은 몰랐기 때문이다. 몸보다는 마음과 머리가 검을 싫어했을 뿐 검법의 초식 자체를 익히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조금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자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자평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몸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되자 천재라는 자신감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난………… 천재는 아니었구나.’

케마란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마음속에 키워 오던 자만과 오만, 그리고 아집을 털어 내고 있었다.

‘그래도 수재 정도는 되겠지?’

이미 친구들을 통해 스스로의 특별함에 대한 검증을 마친 케마란의 확신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드의 생각은 케마란과 달랐다.

케마란은 천재다.’

이드는 여덟 번에 걸친 지적 뒤에 스스로에게 알맞은 형태의 안정되고 힘을 품은 자세를 찾아내는 케마란을 보며 확신했다.

자세를 교정한다는 것은 말과 달리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쉬운 일이라면 모델이 워킹 연습을 위해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도록 걸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무인이 하나의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서 취하는 자세란 것은 워킹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고차원적이고 입체적인 작업이다. 당연히 그 자세를 몸에 익히는 것도 힘들지만, 겨우 육체에 박아 넣은 자세를 고치는 것은 처음 익히는 것 이상의 노력과 고생이 필요하다.

거기다 케마란의 경우는 자신이 만들어 내면서 자신의 몸이 원하는 자세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이 특히 강했다.

그런데 그런 자세를 여덟 번 만에 고쳐 낸 것이다.

보통이라면 하루 종일 반복해야 겨우 할까 말까 한 일을 말이다. 더구나 그녀는 홀로 링스피어라는 무기를 만들고 익혀 나가고 있다.

‘어쩌면 이 말괄량이 아가씨가 미래 링스피어에 대한 무법을 세우고 대종사의 반열에 오를지 모르겠군.’

이드는 자신의 앞에서 익숙하지 않은 자세에 끙끙거리는 케마란의 모습을 보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드의 시선이 다시 클라인이 떠나간 곳을 향했다. 이드는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는 그의 기척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관리 사무소를 나간 그의 기척이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클라인이 향하는 방향은 이드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화원이 저쪽 방향에 있었지.’

그리고 오늘 아침 네리베르가 찾아와 전해 주었던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어쩌면 방금 전 검왕이라는 노인들의 전음으로 상황에 변화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드는 라미아를 불렀다.

-이드.

라미아와의 마음의 문이 열리자 이드는 자신의 생각을 라미아에게 전했다. 그것은 찰나 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상관이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부탁할게.’

―염려 말아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별일은 아닐 테니까요.

라미아가 날아올랐다.

이드는 빠르게 화원으로 날아가는 라미아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도 라미아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검왕에게 당한 화를 그 맹해 보이던 데일리 경에게 풀 생각일지?

뭐 ・・・ 그런 일이라면 일어나더라도 라미아가 끼어들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페시딘은 책상 위에 가득히 쌓여 있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서류의 양으로 봐서는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지만 늦은 밤까지 봐도 다 보지 못할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페시딘은 그에 상관없다는 듯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번뜩이는 눈으로 서류에 적히지 않은 작성자의 생각까지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천천히, 자세히 읽어 내렸다.

그때 그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페시딘은 따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감히 소드 팰러스에서 그의 방문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저렇게 벌컥 열 수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검왕으로 불리는 두 친구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 잘 다녀오셨는가? 생각보다 일찍 왔군.”

힐끗 페시딘의 눈에 두 검왕의 얼굴이 스쳤다.

뿌드드득.

잘 손질된 소가죽 소파에 몸을 기대앉으며 마르텔이 힘들게 참았다는 듯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 잘 보고 왔네. 잘 보고 왔으니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게 아닌가.”

“소득이 있었던 모양이지?”

“암. 있었지. 있었고말고. 클클. 그런데 자네는 언제 봐도 대단하단 말이야.”

뜬금없는 마르텔의 칭찬에 페시딘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은? 말 그대로 자네가 대단하다는 거지. 자네가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고, 자네가 의심스럽다고 해서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보이거든. 그러니 대단하다고 할 밖에. 소드 팰러스의 진짜 여우는 그 심술보 클라인이 아니라 바로 자네야, 자네. 자네가 바로 이 소드 팰러스의 진짜 여우인 게야. 하하하하.”

마르텔이 크게 웃으며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 큰 제스처에 페시딘도 결국 책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식장 안에 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잔과 새까만색의 작은 항아리를 꺼내 들고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

“자네가 날 그리 칭찬하니 내가 이 녀석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지 않아도 이른 아침부터 두 사람에게 엉뚱한 일을 맡긴 대신에 이 녀석을 풀 생각이었는데.”

쪼르르르륵~

항아리에 나 있는 작은 구멍에서 황금색의 물줄기가 잔에 떨어져 내리자 방금 전까지 호방한 웃음을 터트리던 마르텔이 꼴깍꼴깍 침만 삼키며 잔을 바라봤다.

잔에 술이 차자 각자 앞으로 잔을 밀어 준 페시딘이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뭘 봤기에 이리 기분이 좋은가?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었나?”

“좋은 구경거리는 아니고, 자네 말대로 이드란 놈을 쫓다가 좋은 건수가 있기는 했지.”

술을 입에 머금고 굴리느라 정신이 없는 마르텔을 대신해서 워스가 답했다.

“그런데 오늘 뭔가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워스가 잔잔한 눈으로 페시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두 사람을 찾은 페시딘이 이드라는 자가 심상치 않다며 다시 살펴야 한다고 그의 감시를 부탁했다.

그러자 과연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고, 뜻하지 않게 입이 봉인된 클라인도 마음대로 구워삶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과연 페시딘이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 예측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페시딘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을 받았다.

“허헛,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나? 알았다면 내 묻지도 않았지. 그저 밤사이에 특이할 만한 정보를 접한 것이 있어 급하게 움직인 것인데, 그에 따르면 이드란 자가 화원에 들어가서 뭔가 있었던 모양이야.”

“화원에?”

“그래. 우리가 출입을 막은 그 화원, 외전(外殿)에서 올라온 정보인데 화원에 관한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확인하는데 수일 정도 시간이 지체된 모양이더군.”

“그럴 만하지.”

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이라면 이해가 갔다. 외전은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검왕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검왕에 속한 사람들이 만든 집단의 이름이었다. 외전의 주된 운영은 냉철하고 판단이 빠른 페시딘이 삼검왕을 대표해서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화원에 침입자가 있으면 가장 먼저 알았을 클라인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더란 말이지. 그러니 내 마음이 급해지지 않았겠나.”

“클라인이 이드와 붙었을 수도 있다 본 건가?”

“클라인의 눈을 피해서 화원에 들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네. 확인하지 못한 일이니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의심해 볼 만한 일이지 않겠나?”

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인이 검후의 실종 후에 사방으로 가시를 세우고 있기는 하지.”

어쩌면 내부인보다 외부인이자 마인드 마스터의 후광을 가지고 있는 이드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다고 워스는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서 이리 일찍 돌아 온 것인가? 나는 어떤 일을 확인하게 될지 모르지만 나이 많은 자네들이 밤이슬을 제법 맞아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만?”

“이런 악당 같은 놈을 봤나. 친구들을 밖에 내어놓고 제 놈만 방에 들어앉아 있으려고 했단 말이야?”

어느새 잔을 비운 마르텔이 조금 전과 달리 페시딘을 욕하고 나왔다.

“그건 자네가 서류를 보는 게 더 싫다고 해서 그리된 것이 아닌가. 자, 한 잔 더하게.”

“그렇지. 좀 더, 좀 더.”

페시딘은 불퉁한 마르텔의 잔을 채워 그를 조용히 만들고는 워스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재촉을 받은 워스는 아침 일찍 이드의 숙소를 찾은 두 아가씨의 모습과 그 뒤 연무장에서 케마란과 이드 사이에 있었던 일, 그리고 클라인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페시딘은 표정의 변화 없이 이야기를 듣다가 클라인의 대목에서 가볍게 웃음을 보였을 뿐이었다.

“클라인은 생각지 못했는데, 생각도 못 한 쪽으로 잘 풀렸군.”

“하하하하. 그놈 얼굴을 자네도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마르텔이 술을 마시다 말고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그 얼굴을 보지 못한 건 아쉽군.”

“그런데 클라인이 그리 급하게 달려온 걸 보면 클라인이 다른 쪽에 붙은 건 아니다 싶네만?”

“좀 더 지켜보지.”

워스는 페시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자 위에 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게 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서류인가? 어마어마하군.”

“허헛.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거리가 생겼지.”

워스는 페시딘과 서류를 바라보다 일어나 절반에 이르는 양을 가져와 자신과 마르텔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도 좀 돕도록 하지.”

“익! 이거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가? 이 정도는 언제나 페시딘이 쉽게 쉽게 처리하잖아.”

마르텔은 자신 앞에 놓인 서류 더미에 질색을 했다.

“이 사람아, 페시딘도 나이가 있지.”

워스가 쯧쯧 혀를 차자 페시딘의 어깨가 오히려 내려앉았다.

“내 나이라니. 이 사람아, 난 아직 팔팔해.”

그러자 마르텔이 옳다구나 하고 끼어들었다.

“저 봐. 페시딘도 저리 말을 하잖아. 그리고………… 그래, 우린 계속 이드란 놈이 무슨 짓을 할지도 좀 살펴야지.”

워스가 작게 혀를 차고는 제일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읽어 내리며 말했다.

“자네는 거기서 뭐 볼 게 있다고 생각하나? 내 장담하는데 그자들은 오늘 하루 종일 그 연무장에서 두 어린애들에게 붙들려 있을 거야. 무엇보다 외전의 사람들도 살피고 있으니 일이 생기면 알려 올 것이고. 어디 가려면 자네 혼자 가 보시게.”

워스가 자신은 절대 가지 않을 듯이 이야기하자 마르텔이 엉덩이를 움찔움찔거리더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검은 술 항아리를 보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워스와 같이 자신 앞에 놓인 서류를 펼쳤다.

페시딘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소리 없이 웃고는 탁자로 돌아가 읽던 서류를 다시 들어 올렸다.

조용한 방 안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종이 넘어가는 소리에 마르텔의 코 고는 소리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두 친구는 그를 깨울 생각을 하지 않고 서류를 넘겼다.

그렇게 시간이 정지한 듯 흘러가는 중의 어느 순간.

워스의 손이 파르르 떨림과 동시에 그의 눈이 번뜩이며 곯아떨어진 마르텔과 페시딘을 살폈다. 한 사람은 숙면 중이고 남은 사람도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한 워스는 은밀한 손길로 손에 든 서류를 마저 읽은 후 다른 서류를 들고 내려놓는 중간에 품에 몰래 감추었다.

그 서류의 보고서 작성자란에는 에단 웍이라는 이름이 굵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