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5화
552화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록을 따라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돌아갔다.
하룻밤을 꼬박 샌 눈에는 한 점의 피로도 없이 흥분으로 인한 생기가 가득했다.
이드는 에단의 도움을 받아 그가 숲으로 찾아온 날부터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드와 현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그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보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
그래서 시간이 제법 걸렸다.
누굴 먼저 만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금방 결론이 나왔다.
우선 만날 사람은 클라인. 이드는 그를 먼저 만나 보기로 했다. 수상한 접근 방식과 아무리 생각해도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을 떠벌이는 철벽의 워스보다는 데일리를 통해서 말을 전해 온 클라인 백작이 낫다 싶어서였다.
물론 단순히 감정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록이 검후에 대한 클라인 백작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 결정을 데일리에게 전했다. 물론 전달은 라미아가 했다.
그녀는 가장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전령이 되어주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데일리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온 라미아는 은색 기사단장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은색 기사단 단장과 연락이 닿았대요. 이드의 소식을 듣고 지금 소드 팰러스로 돌아오고 있대요.]
“오오!
라미아의 말에 에단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이드가 뭐냐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은색 기사단장이 온다는데 네가 왜 그렇게 좋아하냐?”
“흐흐흐. 그분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미인이시거든요. 저 같은 놈은 감히 가까이 볼 기회가 없었는데, 마스터와 함께 있으니 이번에는 가까이서 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드가 헤벌레 웃는 에단을 보고 혀를 찼다.
“으이그, 인간아! 네리베르와 케마란을 보고도 그러더니. 너 그러다 결국 솔로로 남는다!”
“에이, 마스터!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이러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요 며칠간 있었던 행적만 살펴도 크게 믿어 줄 만한 말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모를까, 어차피 그건 극히 개인적인 개인사.
이드는 쯧쯧 혀를 차고는 관심을 끊었다.
“그래서 언제 온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했대요.]
정시에 출발하는 버스와 기차, 비행기가 있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최대 속도란 결국 각자의 노력과 운에 달린 일이다.
이드는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단을 보고 말했다.
“그럼 급한 일은 끝난 것 같으니 넌 들어가서 좀 자는 게 어때? 눈 밑이 검다.”
“마스터는 절 어떻게 보시고. 하룻밤 못 잤다고 티가 날 정도로 만만한 체력은 아닙니다.”
[자기 얼굴이나 보고 말하죠?]
자신하는 에단의 코앞에 라미아가 물거울을 만들어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며칠간의 연속 철야로 생기가 빨린 중년의 아버지 얼굴이 있었다.
“헐! 진짜네.”
에단은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눈 밑 다크서클을 문질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어디 밤을 한두 번 새어 봤어야지. 그런데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가 왜 이러죠?”
“그 워스라는 사람의 살기에 당한 거예요.”
일리나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 양반이 위협은 했지만 따로 절 공격하진 않았습니다.”
에단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지만 일리나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꼭 검을 들어야 공격은 아니에요. 기세로 에단을 제압하고, 살기로 위협하고 의념으로 정기를 위축시킨 거예요.”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그나마 워스와의 일에서 살기밖에 기억나지 않는 에단이었다.
“그게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은 무인들의 힘이에요. 단순히 파괴력만 강해지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니까요. 아마, 에단은 워스라는 사람의 말에 크게 반대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에단의 눈빛이 우묵해지더니 눈이 한 뼘은 쑥 들어간 듯 그늘이 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워스의 명성과 그가 가진 명분과 보고서라는 무기에 어쩔 수 없이 이드에게 빠르게 말을 전해야겠다고 한 거였는데, 일리나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워스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때문이란 것이 아닌가.
“아….. 어쩐지 굉장히 기분 나쁘네요.”
오랜만에 자신이 철저한 약자란 사실을 인식했다.
“그렇게 기분 나쁜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수련 열심히 해. 그리고 일단 쉬어라. 쉬고 나면 기살(氣殺)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피하는 방법이 있는 겁니까?”
“뭐든 꼼수는 있는 거야. 절대란 없어. 소드 마스터도 애송이의 창에 찔려 죽을 수 있는 거야.”
물론 천운이 닿아야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 면에서 넌 축복받은 거지. 네 초인기가 있으면 훨씬 간단하거든.”
간파의 눈. 주로 침투나 전투 상황이 아니라면 크게 쓸모가 없었던 자신의 초인기.
“그거 지금 배울 수는 없을까요?”
“자고 일어나서! 그렇게 기가 죽어서는 될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밤에는 클라인 백작을 만나야 하는데, 말짱한 정신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야 할 거 아냐! 내가 여기서 너 말고 누구 조언을 믿겠냐?”
“하하하! 그렇지요. 당연히 마스터는 제가 모셔야죠.”
기분을 풀어 주는 이드의 말에 에단은 껄껄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일리나에게 물었다.
“일리나도 쉬지 않아도 되겠어요?”
“전혀요.”
일리나가 단순하게 웃었다. 원래 엘프라는 종족은 인간보다 강하고 우월하다. 아무런 수련도 없는 상태에서도 나흘 정도는 자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
“그럼, 같이 나갈까요? 아가씨들도 오는 것 같은데.”
이드는 방으로 가까워져 오는 두 개의 기척을 들으며 말했다. 새벽에 돌아간 케마란과 네리베르였다. 두 사람이 젊음을 과시하는지 하룻밤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 아침 일찍 다시 찾아온 것이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케마란이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험. 마스터, 오늘도 링스피어 수업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케익과 차는 준비되어 있나요?”
일리나가 웃으며 묻자 케마란을 밀어 버린 네리베르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오늘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케마란은 한나절을 꼬박 연무장에서 뒹굴었다.
그러고도 지치지도 않았는지 네리베르와 함께 록을 따라 이드를 찾았다.
딱히 두 사람이 꼭 참석해야 할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돌려보낼 생각도 했지만 두 사람이 강하게 주장하자 말리지 않았다. 꼭 참석할 자리는 아니지만, 참석하지 못할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드와 관련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입에 자물쇠를 채워 두었다.
이번 방문은 데일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개구멍이 아닌 정문 옆의 쪽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데일리는 일행을 은색 기사단장이 사용하던 접객실로 안내했다.
“클라인 백작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원래 자정을 넘어 보기로 하고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정에 맞춰서 방을 나온 이드들도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숙이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록이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이드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는 행동이었다. 데일리의 안내를 받아 접객실로 들어가자 안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소드 팰러스에 입성한 첫날 봤던 얼굴.
하지만 그때와 다른 표정과 분위기였다. 그는 이드를 보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오며 첫날의 무례에 대해 사과했다.
이드는 가볍게 넘겼다. 이드의 기억에 그때의 그는 방관자였다.
모두가 착석한 접객실 안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라도 내어 오겠지만 데일리는 그런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클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제 요청에 이렇게 나와 주신 점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대화를 피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죠.”
이드는 화원에 들어가겠다는 요청을 대차게 씹어 놓은 일은 은근히 돌려 말했다.
그것은 삼검왕이 직접 관연한 일이지만 클라인은 변명 없이 무골호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 또한 사과드립니다.”
‘왜 이렇게 저자세야, 겁나게. 정말 다 까놓으려고 나왔나?’
이드는 바로바로 고개를 숙이는 클라인 백작을 보고는 내심 살짝 놀랐다.
록이 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작이란 작위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어느 정도 밀고 당기는 일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백작님의 생각은 아닌 듯하니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밤에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루 빨리 소드 팰러스가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제가 바라는 단 한 가지입니다.”
“검후님의 복귀까지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당연합니다. 소드 팰러스는 검후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아무렴 반세기간 기사들의 성지라 불리는 소드 팰러스의 존재가 그렇게 가벼울까.
이드는 백작의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죄송한 일이지만 데일리 경을 닦달해서 화원에 은밀히 다녀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는 일이라서요.”
“결코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검후님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드 님께서 화원에서 무엇을 얻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클라인 백작은 이드를 지나 록을 한 번 바라보더니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이드 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볼 때 아직 이드 님께서는 소드 팰러스에서 활동하기에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드 님을 따르고자 하는 눈 밝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수가 작지요.”
“힘이 되어 주신다면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 일은 검후님을 찾는 것입니다.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그 흔적을 찾자면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돕겠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달리 소드 팰러스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습니다. 소드 팰러스를 스쳐 간 무수히 많은 기사들과 검사들이 소드 팰러스의 이름에 도움의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 많은 손으로도 검후님을 찾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온전히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탓입니다. 내부에 문제가 있지요.”
클라인 백작의 말에 이드의 뒤에 있던 록과 에단의 눈이 번뜩였다.
“문제라……………. 그런데 백작님께서는 왜 갑자기 제게 도움을 주시겠다 하십니까?”
“저는 검후님을 찾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대대적으로 검후님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섣불리 혼자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이드 님 역시도 제가 믿고 나서도 좋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다르다는 겁니까?”
확실한 증거라도 잡은 듯 확신 어린 백작의 말에 이드가 물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데일리 경에게 들었고 살피고 생각했습니다.”
백작이 확신 어린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