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7화
554화
기절에서 깨어난 클라인 백작은 이후에도 에단을 만족시키는 리액션을 보여 주었다. 극도로 흥분해서 이드를 향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때문이었다.
“검후님을 모시듯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클라인 백작은 검후를 대하듯 이드에게 고개를 숙이고 공경하는 마음을 보였다.
이후 그는 정말 검후에게 보고하듯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풀었다.
처음엔 핵심 정보를 숨길 생각이었다.
생각해 봐라. 그저 오며 가며 얼굴과 이름만 알고 지내던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네 애비다!’라고 하면 바로 믿을 수 있겠는가. 바로 믿는다면 그게 이상한 놈이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클라인이 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의 전형처럼 클라인 백작도 겉으로는 완전히 믿는 모습을 보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시커먼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의심은 햇살에 녹은 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일리나가 엘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드의 말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엘프가 스스로의 이름을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는 것과 같았다. 곧 진실과 같다는 말이다.
클라인 백작은 그와 같은 사실에 안도와 감동을 느끼고 기절한 것이었다.
이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고한 후 클라인 백작이 말했다.
“그리고 워스의 요청은 제가 삼검왕을 만난 후로 미루십시오. 그는 제가 이드 님을 따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니 여기 두 후배를 대동하고 그를 만나 그의 행동을 한 번이라도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중하라는 클라인 백작의 말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급한 일이 아니었다. 며칠 늦게 본다고 워스가 보고서를 뿌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어쩔 생각입니까?”
삼검왕은 두 아가씨도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같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항시 얼굴을 마주하는 저보다는 새로운 얼굴이 있을 때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줄 테지요.”
클라인 백작의 말에 두 아가씨가 딱딱하게 몸을 긴장시켰다. 첫 임무를 앞둔 신병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많이 미숙한 두 사람이었다. 내키지 않는 일을 밀어붙이면 실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선 두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어려울 수 있는 자리다. 클라인 백작을 따라갈 생각이 있니?”
“넵!맡겨 주십시오!”
자신감 가득한 대답이다.
두 아가씨의 대답을 들은 선배들의 입가에 대견하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어떻게 행동할지 클라인 백작에게 미리 들어 두고.”
“옙!”
군기 가득한 대답에 이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갈 테니까.”
이보다 믿음직한 말이 없다.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던 두 아가씨의 몸이 사르르 풀리며 여유를 찾았다.
“언제 만나실 생각입니까?”
“내일입니다.”
클라인 백작의 대답에 따라서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연무장이 아니라 그의 집무실에서 삼검왕을 만날 때 주의할 점에 대해서 교육받았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황제를 접견하는 것처럼 절차나 특별한 예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무언가 보고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저 삼검왕이 몇 가지 물었을 때 그에 답하면 될 일이었다. 클라인 백작은 그에 대비한 예상 질문과 답변도 뽑아 주었다. 대신 두 사람에게 이드의 진짜 정체와 삼검왕에 대한 의심을 짧은 순간이라도 완전히 지워 둘 것을 요구했다. 물론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어찌 지우겠냐마는, 클라인은 몇 번이나 그 점을 강조하며 차라리 무표정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으아…………… 나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실수하면 어쩌지? 긴장돼 죽겠어.”
숙소로 돌아온 케마란은 거울 앞에 앉아 클라인이 말한 무표정을 연습하다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 근육을 문지르며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걱정 말아요. 지금처럼만 하면 내일은 표정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을 테니까.”
“이게!”
케마란은 거울에 비친 네리베르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째려보았다.
“겨우 이런 말에 발끈해서 움직이면 내일 분명히 실수할 거예요. 이 정도 말은 들어도 못 들은 척 넘겨야죠.”
“내일부터는 당연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케마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거울 앞에 놓인 빗이 네리베르를 향해 날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피해 버렸다.
어차피 정말 맞출 생각도 없었다. 케마란은 가볍게 콧방귀를 날리고는 다시 거울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연습 안 해도 돼?”
“필요 없어요. 귀족가에 태어난 이상 표정 관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랍니다.”
“…………잘도 그러고 사는구나?”
케마란이 질린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위험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이번 일처럼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것 같은 친구는 이런 기분 나쁜 일이 기본이란다.
“쯧쯧. 귀족도 못 해 먹을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직 당신은 어린 거예요. 표정 관리는 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이기 때문에 필요한 스킬이니까요.”
케마란을 가볍게 깔아봐 준 네리베르가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살폈다.
“………표정 관리는 기본이라며?”
“검후님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서 자신할 수 없네요.”
검후 앞에서 말을 더듬고 울었던 전력이 있는 네리베르였다. 검후에게 깊이 빠져 있는 그녀에게 삼검왕은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다. 과연 그 앞에서 완벽한 표정 관리가 가능할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네리베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런 배덕한 변절자들 앞에서 실수는 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꼴깍!”
솜털이 곤두설 것 같은 음산한 네리베르의 말에 케마란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내일 실수했다간 이년이 날 죽일 거야!’
케마란은 칼을 들고 미친년처럼 달려드는 네리베르를 상상하며 내심 비명을 질렀다.
클라인 백작은 점심 때가 적당히 지난 시간에 삼검왕과 약속을 잡았다.
그는 두 후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삼검왕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삼검왕과 오래도록 알아온 만큼 짐작해 볼 수 있는 재료는 많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 아래 거부감 없이 꾸밀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는다.
클라인 백작은 그 일 중 두 가지를 손에 꼽았다.
‘황궁에 대한 견제, 그리고 삼검왕파가 당당히 나설 수 있는 명분을 가지는 것.’
“휴우~”
솔직히 삼검왕이 바라는 일을 막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검후가 건재하다면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지만 검후가 없는 상황에서는 확실히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백작 각하.”
“아! 자네들 왔나?”
생각에 빠져 있던 클라인 백작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두 후배들이 있었다.
“자네 무기는 챙겨 왔겠지?”
“예. 여기 있습니다.”
케마란이 등 뒤에 걸린 링스피어를 흔들어 보였다.
삼검왕이 그녀들을 만나겠다고 한 이유는 이드가 케마란을 지도한 데에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무공에 대한 시연을 원할 것이란 생각에 클라인 백작이 링스피어를 들고 오게 했다.
“좋아. 어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어려운 질문엔 답하지 마라. 내가 나설 테니까.”
“네.”
클라인 백작은 야무지게 대답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 보자.”
“이제 움직이나 보네요.”
방 안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이드가 눈을 뜨며 말했다.
“별일은 없겠죠?”
옆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던 일리나가 물었다.
“그럼요. 오늘 자리는 삼검왕이 자신들이 정당하게 나설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만든 자리니까요. 별일 없을 거예요.”
[거기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긴급 상황에 대비도 했잖아요.]
라미아의 말대로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해서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몸에 심공경心經)의 내력을 심어 두었다.
이드가 방 안에 앉아 두 사람의 행적을 쫓을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또한 이 심공경은 찰나간의 순간에 두 사람을 한 번은 보호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리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건국 이야기’
그레센 대륙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언어로 적혀 있는 이 책은 이드가 지구에서 가지고 온 책 중 한 권이었다. 이드와 라미아가 떠나 있던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일리나가 글을 배워 읽고 있었다.
“이드는 어떻게 생각해요?”
“뭘요?”
“삼검왕이요. 정말 그들이 시르피를 해했을까요?”
이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가장 높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꾸는 꿈 때문예요?”
[흥! 꿈이 아니라 욕심에 눈이 먼 야망이에요.]
라미아가 냉소했다.
“인간이니까.”
이드가 쓰게 웃었다.
[인간이 아니라 인성의 문제죠.]
“견물생심이라고 했어. 시르피가 자초한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이드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특히 네리베르가 들으면 극렬하게 반발하겠지만 사실이었다.
시르피도 말했고, 클라인 백작도 말했다.
삼검왕은 제국에 속해 있는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대륙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소드 팰러스를 원한다고.
그들은 제국의 기사가 검후의 종이 아니라 기사들의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검왕은 제국에서 독립하려 하고 있었다.
‘아이씨, 아이씨……………?’
케마란은 입이 말라 혀가 꺼끌꺼끌하다고 생각했다.
물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났다. 아무리 혀를 굴려도 침이 나오지 않았다.
이드가 물어봤을 때 자신만만하게 클라인 백작을 따라가겠다고 했던 사실이 후회되었다.
그저 말로 삼검왕을 매도할 때와는 달랐다.
직접 눈앞에 삼검왕을 보고 있자 가슴이 답답하고 무릎이 떨려 오는 것 같았다. 스스로가 이런 겁쟁이였나 싶어 한심하고 슬펐다.
만약 지금 이대로 삼검왕이 케마란에게 알고 있는 사실을 묻는다면 그대로 이야기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대로는 안 되는데.’
케마란은 무너지려는 마음을 힘겹게 바로 세우며 네리베르를 흘겨보았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그녀를 보며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케마란의 생각은 네리베르의 얼굴을 보고는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헐~’
네리베르는 웃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기대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케마란 같은 초조함이나 두려움을 티끌만큼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삼검왕을 바라보는 눈에는 흥분과 존경이 반짝였다.
하지만 옆에 있는 케마란의 눈에는 보였다. 뒤로 돌려진 네리베르의 주먹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불끈 쥐어져 있는 모습이 말이다. ‘독한 년. 무서운 년.’
케마란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드 앞에서 보였던 당당함은 어딜 갔나 싶었다.
‘너한텐 안 져!’
케마란은 내심 이를 악물고 삼검왕을 당당히 마주 보았다.
그제야 흐릿하게 보이던 삼검왕의 얼굴이 똑똑히 눈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네리베르에게 격려를 받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케마란은 내심 바락바락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