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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2화


449화

“직업 바꿀까.”

어두운 밤, 한 남자가 몇 개의 별빛만이 남은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이 낮에 일하고 밤에 자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투덜거리며 하늘을 향해 신세 한탄을 하던 남자는 품에서 곱게 접힌 푸른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손수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감돌았다.

“킁킁. 레이디 애나. 내가 당신과 떨어져 있는 것은 당신과 나라를 위한 일.”

남자는 손수건에 남은 달콤한 향기에 취한 듯 나른하고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대의 향기가 날 흔들리게 만드는구려. 내 이번에 돌아가면 직업을 바꿔 당신 곁에 머물 것이오.”

“제발 그래라!”

“으헉! 누구야!”

자신만의 분위기에 취해 혼잣말을 이어가던 남자는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그와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갈색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대장! 하아, 놀랐잖습니까. 미리 인기척이라도 좀 하시지 말입니다.”

남자, 에단은 갈색머리의 남자가 아는 사람임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손수건은 그 주인을 갈색머리 남자로 바꾼 후였다.

“애나는 또 누구냐? 그 사이 또 바뀐 거냐?”

“바뀌다니요. 전 이전부터 레이디 애나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일전에 소개받은 레이디가 이름을 바꾼 모양이군. 손수건 취향에 향수 취향도 바꾸고. 원래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에단은 대장의 이야기가 깊어지자 슬그머니 손수건을 받아 챙기며 물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수상한 점이 없나 미리 좀 살펴보라고 했더니, 사적인 물건을 들고 하는 말이 뭐? 직업을 바꿔? 그래, 제발 좀 바꿔라. 나도 그 얼굴 좀 그만 보고 살자.”

“크흠. 아니, 그냥저냥…………. 혼잣말이죠. 직장인 중에서 그런 생각 한 번쯤 안 해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없는 데서는 임금님도 욕한다지 않습니까.”

“내가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혼잣말이야? 거기다 너, 내 욕도 했냐?”

정말 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두 눈에 에단이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렴 제가 그런 어이없는 짓을 했겠습니까, 대장. 제가 평소 대장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아하하하.”

뭔가 꾸며진 듯 어색한 그의 웃음에 대장은 뒤돌아 작게 한숨을 쉬며 말썽 많은 부하를 가진 직장 상사의 아픔을 잠시 달랬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어때?”

대장은 조금 전까지의 말장난을 접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방금 전 에단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을 향했다.

“어떻고 저떻고 간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숲입니다. 대신에 밤이라서 박력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밤에 보는 숲은 정말 그 박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검은 밤보다 더 깊은 암흑의 덩어리 같아 보이는 숲은 어지간한 간담이 아니면, 가까이 가는 것조차 하지 못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네 ‘눈에도?”

“예. 일단 규모가 규모다 보니, 제가 볼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기는 합니다만.”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다. 어차피 우리가 움직이는 공간의 정보만 확인되면 문제없어. 보급이 완료되면 진입한다.”

“정말 들어가는 겁니까?”

에단의 말에 대장이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아, 솔직히 저기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시온이라구요. 역사와 전통 있는 괴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몬스터 숲이요. 이제는 회색의 숲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고약한 곳이라구요. 저희 인원으로 저길 들어갔다가는 임무고 뭐고 작살날지도 모릅니다.”

에단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온은 위험하기로 그레센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 중 한 곳이었다. 거대한 넓이는 물론이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몬스터들과 독충들, 이름을 알 수 없는 독초와 떨어지는 나뭇잎조차 집어삼키는 늪지대는 잠시도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순간순간 생명을 위협한다. 실력 있는 용병을 고용한 상단이나 모험가들이 이용하는 숲의 가장 바깥 부분은 사실 시온과는 다른 숲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기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수십 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회색 안개는 인간에게 딱히 해가 없음에도 시온에 대한 공포와 신비를 더하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물론, 회색 안개가 생겼을 때 몬스터들이 더욱 흉폭하게 날뛴다는 소문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완벽하게 무해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점이 더욱 불안한 에단이었다. 당장 대장의 말에 따라 그 정체불명의 회색 안개 안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말이다.

“회색 안개가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부분은 확인됐다.”

“그건 다행이네요.”

“보급품에 포션과 해독제도 충분하고, 나름 약초에 조예가 있는 놈들도 뽑아 왔으니 먹는 것과 중독으로 고생하는 일은 아마 없을 거다.” “믿음직합니다.”

“시시한 몬스터쯤은 우리들에게 문제될 게 없다.”

당연히 문제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시온이다. 괜히 악명 높은 곳이 아니다. 그런 곳에 시시한 몬스터만 있을 턱이 있나. 숲의 악몽이라는 오우거나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를 만날 수도 있다. 솔직히 숲에서 그런 놈을 만난다면 완벽히 제압 가능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사를 앞에 두고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부하의 숙명이다. 아니라고 했다가는 당장 된다고 할 수 있도록 굴려 주겠다는 의지가 다분한 저 눈을 봐라. 어떻게 그 앞에서 안 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지.

•그렇겠죠.”

“그리고 나머지 특별한 상황에 대한 대처는 너에게 맡긴다.”

“그게 제일 문제일 것 같습니다. 제 눈은 만능이 아니라니까요.”

“알아. 나도 큰 기대 안 해.”

저렇게 말해도 정작 필요한 상황이 되면 자신을 쥐어짠 것을 에단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두 해 같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아, 전 모르겠습니다. 대장이 알아서 하십시오. 그보다 정말 시온이 맞는 겁니까? 저런 위험한 곳에 헛걸음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말입니다.” 

에단은 조금 난감한 듯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물었다. 사실 이들처럼 무력을 사용하는 단체는 상명하복이 철저하기 때문에 이런 물음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고받은 말로 봐서 그들은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듯 거침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위에서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위에 있는 꼰대들이야, 뭐.”

“나도 그렇게 판단을 했고.”

“그렇다면 정확하겠군요.”

상부의 판단을 부정하던 에단이 곧 말을 바꾸는 모습에 대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 정확하다. ‘후계자’는 저 숲에 있다. 그는 마인드 로드 이드의 동료이자 연인인 일리나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믿어라.”

“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지금쯤이면 보급도 끝나고 제법 쉬었을 겁니다.”

에단의 말에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언덕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다른 곳에서도 따라오겠죠?”

후계자를 노리는 곳은 많았다. 처음 후계자의 정보를 선점한 곳도 그들이 속한 단체가 아니었다.

“따라오겠지. 시간은 걸리겠지만, 당장 텔레포트의 마나 흔적만 추적해도 거리는 몰라도 방향은 나온다. 그러면 그 선상에 연관되는 곳이

어디인지만 확인하면 돼. 그걸 확인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우리는 그와 관련된 정보가 상당한 덕분에 그런 시간을 줄이고, 목적지를 단정할 수 있었지. 다행한 일이야. 다른 곳보다 한발 앞섰으니까.”

“그래 봤자 다른 놈들보다 먼저 고생한다는 소리하고 다를 게 뭡니까. 저 넓은 숲을 뒤지려면 끝도 없을 겁니다. 저희도 정확한 포인트를 아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해야 할 일이다. 네가 말했던 대로 너의 레이디 애나와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말이야. 서두르자. 해가 뜨기 전에 확실히 시온 숲에 진입해 둘 필요가 있다.”

말을 마친 대장이라는 남자가 언덕 아래에 있는 작은 불빛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고난의 시간을 알리는 그의 걸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봤자 저희들은 두 번째일 뿐입니다. 아, 그런데 정말 그 후계자님, 나오려거든 한 십 년은 빨리 나오거나, 일 년쯤 후에 나오지. 시온이라니 정말 너무한다.”

순간 그의 투덜거림을 단번에 잠재우는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안 뛰어와!”

신기하게 그의 목소리는 주변으로 퍼지지 않고 찌르듯이 에단을 향해 뻗어왔다. 그 소리를 들은 에단의 발이 자동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예, 이미 가고 있습니다.”


“미안해요. 피크닉을 가기로 해 놓고는 며칠이나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네요.”

이드는 일리나가 준비한 도시락을 바구니에 채워 넣으며 말했다.

원래는 처음 수련장에 가는 날 가기로 했던 푸른 나무 마을 탐험을 겸한 피크닉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정교한 검법 대련의 재미에 빠져서는 그날 하루를 날려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이드는 이틀을 더 연무장에서 엘프들과 땀을 뚝뚝 흘리며 뒹굴었다.

어쩌면 채이나의 말대로 정말 욕구불만이 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푸른 나무 마을을 찾아오는 동안 채이나에게 당하며 쌓인게 많았을 테니 그 스트레스를 이번 기회에 풀었다고 볼 수 있다.

미안한 마음에 이드의 눈이 일리나를 피해 슬금슬금 도망가기 바쁘다.

일리나는 그런 이드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에 그의 볼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췄다.

쪽!

“함께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수십 년이 걸려서 돌아온 연인이었다.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줄 아는 일리나에게 피크닉 약속이 미뤄진 것쯤은 큰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피크닉 장소도 마을 안이다. 이드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지만, 그래도 마을 안은 너무 익숙한 일리나였다.

“고마워요. 항상 함께 있도록 계속 노력할게요.”

이드는 일리나의 마음과 입맞춤이 너무 고마웠다. 이대로 피크닉은 포기하고 일리나와 좀 더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지기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라미아를 생각하면 마냥 마음대로 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 역시 이드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라미아를 생각하는 것은 이드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나가요. 라미아가 기다리겠어요.”

일리나도 이드에 대한 마음만큼은 아니지만, 라미아에게 가족으로서 마음 한쪽을 이미 내주고 있었다. 특히 이드가 대련에 정신이 없는 이틀 동안 두 사람도 많이 가까워졌다. 이드가 검을 휘두르는 동안 그가 보이는 수련장 한쪽에 앉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찬 시간을 보낸 것이다. 특히 마을에 있으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한 일리나에 비해 이드는 스펙터클하고 버라이어티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라미아는 신이 나서 휴를 꺼내 들고 사진과 동영상까지 보여 주며 썰을 풀었다.

일리나도 궁금해하던 이야기인지라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었다. 특히 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라미아의 인간 모습에 대한 칭찬으로 라미아가 급격히 일리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사실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에게 이미 피크닉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린 후였다. 아마 이드가 그대로 연무에 빠져 있었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드 덕분에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는 지난 이틀의 시간도 짧았다. 아직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다. 지금도 일리나는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궁금하기만 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남은 이야기를 듣기로 라미아와 약속해 둔 일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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