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23화
560화
“아…”
가면처럼 큰 변화가 없던 쉴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앞에는 실시간으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라미아의 은빛 몸체가 있었다.
날카롭던 부분은 사라지고,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부드럽게 변했다. 등 부분은 평평해졌다.
충분히 사람이 타고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거대해진 것이다.
검후를 모시면서 많은 마법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이런 아티팩트는 쉴라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미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만져 봐도 될까?”
[괜찮아요.]
평소의 목소리로 라미아가 대답했다. 몸은 커졌지만 목소리는 그대로다. 하기사 만약 여기서 목소리마저 몸에 어울리게 커졌으면 그건 그냥 괴수다.
“오오!”
라미아의 날개를 만져 본 쉴라는 드물게 감탄했다. 그냥 봐서는 잘 만들어진 강철 같고, 간혹 반짝이는 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손을 가져다 대자 마치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듯 부드러우며 매끄러웠다. 무엇보다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감각이 쉴라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건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검에서도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립감이었다.
‘이런 일체감을 주는 재질로 검을 만들면 어떤 환상적인 검이 만들어질까?
쉴라는 입에 고이는 침을 남몰래 삼키며 다시 라미아를 쓰다듬다 이드를 돌아보았다.
“혹시 라미아의 몸체 일부를 살 수 없을까요?”
오싹!
이드는 흔들리는 쉴라의 눈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으며 즉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아니, 도대체 누구의 몸을 사겠다는 말인가? 애초에 라미아의 몸은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흐갸갸갹!]
우쭐한 표정으로 쉴라의 손길을 즐기던 라미아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명과 함께 허둥지둥 쉴라에게서 떨어졌다.
[무,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뭔데 내 몸을 사! 미쳤어?]
얼마나 놀랐는지 커지던 몸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라미아는 황망히 날갯짓하며 이드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라, 라미아! 진정해. 괜찮아.”
평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응에 이드가 놀라 물었다.
[미, 미친 거 아니에요. 왜 내 몸을 뜯어 가겠대요. 이드, 난 저 사람 싫어요!]
“그래, 알았어. 진정해. 괜찮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널 팔겠니?”
이드는 자신이 모르던 생소한 라미아의 모습에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
어쩐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하던 그녀의 약점을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말이 그렇게 무서운가? 잘 모르겠네.’
이드는 라미아와 자신의 감각이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본래 검의 형태로 태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라미아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쉴라가 선생님 같은 투로 말했다.
“미치지 않았다. 넌 좀 더 예의를 배워야겠구나.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하! 멀쩡한 다른 사람의 몸을 뜯어가겠다는 당신보다는 나아!]
라미아가 이드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어 씩씩거렸다.
그러나 쉴라는 라미아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무던히 대답했다.
“넌 사람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난 정중히 네 주인에게 의견을 구했을 뿐이다. 강제로 행동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익! 내가 왜 사람이………….]
라미아가 쉴라의 말에 막 반발하려는 차에 이드가 끼어들어 그녀를 달래고 말했다.
“잠깐만 있어 봐, 라미아 쉴라 경, 당신의 말에서 잘못된 부분들이 있어서 수정해 드립니다. 우선 라미아는 제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녀와 저는 함께 살아가는 파트너지, 제 소유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한 아티팩트가 아닙니다. 영혼이 있지요. 일종의 정령과 같다고 설명하는 게 빠를까요. 어떤 생각으로 당신이 라미아의 몸 일부를 원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은 마음의 아픔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무서운 말입니다.”
“흠…….”
쉴라는 우묵한 눈으로 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영혼을 가진 아티팩트가 과연 가능한 일인가. 기본적인 에고가 담긴 아티팩트도 드문 것이 사실인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건 거짓말을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냥 아끼는 아티팩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는 쪽이 간단하다. 영혼이 깃든 아티팩트라니. 정령과 같다니. 없던 관심도 생기게 만드는 말이다.
만약 그녀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였다면 당장 눈이 벌게져서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꺼내 놓은 것일까?
‘…..앞으로 라미아를 아티팩트가 아니라 하나의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존중하라는 뜻인가.’
쉴라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과연 이드 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실수한 것이겠지요. 제가 경솔히 행동한 것 같군요. 사과드립니다, 이드 님 그리고 라미아.”
“앞으로 신경 써 주신다면 사과를 받겠습니다.”
[뭐, 사과를 하니 받아 줄게요.]
쉴라는 이어지는 대답을 들으며 내심 자신의 생각이 정확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쉴라는 라미아를 만진 감각이 남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도저히 손에 남은 그 감각을 잊기 힘들었다.
“대신 오해 말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혹시 라미아의 신체와 같은 재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혹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왜 그걸 궁금해합니까?”
“조금 전 라미아의 허락을 받고 그녀를 만졌을 때 그 은색의 몸에 제 손이 달라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그저 표면을 만졌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마 특별한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그와 같은 재질로 검이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손에 든 것만으로 내 몸과 같이 느껴지는 검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고. 검사로서 욕심이 나는 것을 도저히 넘길 수가 없더군요.”
“호오. 그런가요?”
이드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쉴라가 말하는 감각은 라미아가 검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때 이드가 느끼는 감각이었다. 검으로서 세상에 다시없을 완벽한 일체감을 줄 수 있는 신검.
하지만 그 감각이 거대한 새의 형태에서도 느낄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게 아니면 쉴라 경이 특별한 감각을 지닌 건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검의 라미아를 사용해 본 이드로서 쉴라의 욕심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라미아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미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재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거짓말이다. 당장 라미아에게만 물어도 답은 알 수 있다. 하나하나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귀중한 물건들이다. 이드는 그런 걸 말해서 이 이상으로 관심을 끌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라미아의 몸 일부를 내어 줄 생각도 없고요.”
단호한 이드의 대답에 딱딱하던 쉴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인 얼굴 중 가장 확실한 표정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포기하겠습니다.”
이드는 포기하겠다는 말이 끝나는 순간 쉴라의 눈에 넘치던 욕심이 물에 씻긴 듯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말과 함께 마음이
정리되는지. 저 소림사의 고승도 힘든 일이다.
언행일치의 극치다.
이 정도라면 다시 그녀의 관심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드는 다시 라미아를 불렀고, 그녀는 다시 한 번 거대하게 몸을 키웠고, 그 등에 이드와 일리나가 올라갔다.
쉴라는 어째서 이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말이 필요 없었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라미아의 등에 오를 수 없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은 라미아가 거부한 탓이다.
쉴라는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라미아가 날아올랐다.
휘리리리릭—
한 번 회친 날개 아래로 수개의 돌개바람이 회오리치며 라미아를 들어 올렸다.
몸이 적당한 고도에 오르자 라미아가 말했다.
[그럼 이후는 이드에게 맡길게요.]
“끙. 도착하면 바빠질 텐데. 다음에 하면 안 돼?”
[지치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되죠.]
“하아. 알았어. 넘겨.”
출렁!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하늘을 날던 라미아의 몸이 한 번 출렁였다.
“끄응.”
그에 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용을 쓴 후에야 라미아의 몸이 안정되게 허공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넓게 갈라진 날개 끗이 이리저리 삐뚤삐뚤 흔들린다.
이것은 라미아의 몸을 이드가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소드 팰러스를 나와서는 라미아의 마법과 경공, 그리고 어검비행을 통해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라미아가 다른 의견을 내어 놓았다. 바로 지금처럼 거대해진 라미아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쾌적하고 편안한 이동 방법이었다.
그런데 라미아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비행 중에는 라미아의 몸에 대한 통제를 이드에게 맡긴 것이다. 이것은 라미아와 이드, 두 사람을 위한 방법이었다.
라미아에 대한 이드의 차원 지배력이 깊어져야 그녀의 모습을 좀 더 바꿔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시온 숲에서는 라미아의 잔소리에 이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지만, 숲을 나온 후에는 이런저런 일이 많아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여유가 생기자 라미아가 이드에 대한 채찍을 꺼내 든 것이다.
이드도 앞서 약속한 내용이 있어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이드의 마음을 바로 세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라미아의 정신까지 마음 길을 뻗어 그녀의 마음속에서 날갯짓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공이 높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단순히 정신력이 굳세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 된 마음으로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드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수련은 이드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드 무공의 핵심인 의형강기의 새로운 전환점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는 저녁이 되어 일차 목적지인 탈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출발 후 꾸준히 뒤로 처지는 쉴라의 모습에 라미아를 설득해서 그녀를 태운 덕분에 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쉴라가 내린 만큼 그녀의 말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바쁘게 저녁을 준비하던 작은 마을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소란스러워졌다.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이 일행 앞에 모였다.
힘이 없는 시골의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지인은 언제나 힘을 모아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
“이 초라한 마을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촌로가 앞에 나섰다.
쉴라가 대답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찾고 있다. 그가 이 마을에 들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혹시 수 일 전 젊은 여기사가 마을을 찾지 않았는가?”
뚝.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 속에서 촌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기사 님이라면………… 혹 금발에 푸른 눈의 미인이시고 키는 이 정도에, 은빛 갑옷에 검과 방패를 들고 있으신 분입니까?”
쉴라는 그녀가 찾고 있는 기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특징에 크게 만족해서 대답했다.
“정확히 그렇다.”
다음 순간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질리며 신병처럼 뻣뻣한 자세로 서서는 전방 45도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촌로가 굽은 허리를 펴고 군기가 가득 든 목소리로 외쳤다.
“충성! 부디 명령만 내려 주시면, 최선을 다해 실행하겠습니다.”
이드는 마을 사람들의 황당한 반응에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눈앞에서 쉴라가 조용히 이마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카린 경……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