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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4화


451화

“혹시 다른 해결 방법은 없을까?”

조용한 분위기에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은 묘한 압박감을 받은 이드가 입을 열었다.

[부수시게요?]

잠시 이드를 바라보던 라미아가 물었다.

“뭐, 그래서 해결만 된다면야 얼마든지.”

봉인이 사라지면 거기서 나오는 마력을 사용하는 곳이 모두 가동을 멈추겠지만, 이드가 생각건대 그것이 아쉬워 봉인을 부수지 못하게 할 엘프는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이드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그런 편의 시설과 이 한없이 찝찝한 악마의 봉인을 바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참는 게 좋아요. 봉인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봉인을 부수는 것도, 악마를 소멸시키는 것도 절대 쉽게 진행될 것 같지 않거든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이유로 소멸시키지 못한 악마가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그 뒤끝이 수만 리가 되리라.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렇게 도망친 악마가 힘을 회복하고 마을을 공격하는 경우다.

이드는 라미아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 일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런 위험한 일에 고집은 필요 없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라미아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일이 없다. “그러면.”

이드는 천천히 봉인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두 거목과 함께 작은 산장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봉인이다. 그 위에 놓인 검은 악마상의 크기가 새삼 느껴진다.

“이걸로 구경 끝이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볼거리로는 너무 시시했다. 물론, 그 위압감과 형상은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궁금한 것도 많았다. 멀리서 우연히 봤을 때 느낀 귀기가 신경이 쓰여, 혹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어떤 나이 많은 엘프가 삽질한 부작용이었으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연인에게 금지당했다.

이제 이 봉인에 남은 볼일은 오로지 하나. 피크닉의 눈요깃거리 정도다. 하지만 눈앞의 해골에는 도저히 그 일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냥 칙칙한 분위기의 검은 해골일 뿐이니 피크닉 분위기를 내기는커녕 있던 식욕도 떨어트리는 놈이다.

“아쉽지만, 돌아가자. 아무리 봐도 피크닉 장소는 아니야.”

이드는 결정을 내렸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라미아와 음식을 준비한 일리나에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저 해골을 보며 도시락을 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정을 미리 설명해 주지 않은 일리나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드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일리나가 말했다.

“그럼 제가 이곳 말고 피크닉하기 좋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저도 가끔 들러서 쉬는 곳이에요.”

“혹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예요?”

“이곳이 피크닉할 만한 곳은 아니니까요.”

엘프의 심미안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디가 괜히 저 해골을 수십 년 동안 마음속 우환으로 짱박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

“이드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호호호.”

[전 좋아요. 일부러 도시락까지 준비했는데, 그냥 돌아가면 아깝잖아요.]

먹지도 못하면서 도시락 걱정을 하는 라미아였다. 그러나 먹지 못하는 대신 분위기는 즐길 줄 아는 라미아였다. 사실 그녀는 식탐이 강했다. 많은 양을 먹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양과 맛을 즐기는 미식가다. 그 이유는 그녀의 본래 모습이 검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검은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 처음 인간으로 변신하고 뭔가를 먹었을 때 라미아의 모습은 이드가 기억하는 그녀 최고의 모습 중 하나로 기억 속에 곱게 모셔져 있다. 덕분에 지구에 있을 때 맛집을 찾아다니는 그녀를 따라 몇 번이나 전국 일주를 해야 했던 이드였다. 아, 물론 아무리 맛있다 해도 혐오 식품은 사절이다. 라미아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결정 났네. 거기 가서 도시락을 먹읍시다.”

두 사람이 결정했다면 이드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리나, 얼마나 멀어요?]

“아주 가까워요.”

“가까우면 좋죠.”

이드는 땅에 두었던 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잠시 악마상을 바라보다 뚱한 얼굴로 굼실굼실 만져 본다. 라미아의 말대로 봉인이 완벽한 탓인지 흔히 말하는 사악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맨들맨들한 돌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기감이라고 할까, 영감이라고 할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한 부분에서 메케한 향기와 함께 거북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확실히 엮여서 좋을 건 없겠다.’

대신 석탑에서 알아낸 것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 강력하고 조금이라도 누르면 바로 튀어 오르는 반발력 강한 마나의 흐름이라니. 그것은 사납고 급박했다. 라미아는 그것이 악마의 마력을 변환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대로 시간을 두고 순화시키지 않아서 악마의 기질이 남아 있는 것이란다. 그 흐름은 봉인의 양쪽에 서 있는 두 거목을 타고 감화되어 사방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라미아의 말대로 위도, 아래도 외부의 자극에 쉬이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관찰을 마친 이드는 봉인에 대한 궁금증과 미련을 깨끗이 버렸다. 이제 말 그대로 피크닉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드가 일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가 말하는 가까운 곳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마을로 향하는 길 끝에서 날카로운 목소리 한 줄기가 날아들었다.

“이드야~ 같이 놀자~”

“앱니까!”

채이나였다. 높이 솟는 그녀의 말과 목소리에 이드는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채이나를 찾아가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레센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뭐하러 왔어요? 싸움 구경도 재미없다더니.”

둘째 날까지 수련장에 따라와 구경을 하던 채이나는 같은 대련의 반복만 이어지자 재미없다면서 수련장을 나갔다.

“싸움 구경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되면 재미없어. 그리고 여긴 수련장이 아니잖아. 흐흥, 저게 일리나가 이야기하던 봉인인가 보네? 재미있게 만들었는데?”

채이나는 정말 흥미가 동했는지 석탑 위로 올라가서 악마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엘프 중에도 독특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요. 잘 봉인되어 있지만, 그래도 가까이해서 좋은 건 아니니까.”

이드는 해골의 붉은 눈 부분에 팔을 집어넣는 채이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 그녀를 말려 주던 존재의 부재가 아쉽다. 

“마오는요?”

“아침 일찍 수련장에 갔다. 첫날부터 매일 나가고 있어. 매정한 녀석, 어미를 버려두고.”

뒤에 들리는 말은 무시했다. 확실히 어제 대련 상대 속에 마오가 끼어 있었던 것 같다.

타탁!

가볍게 석탑에서 뛰어내린 채이나가 이드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흥미롭게 바라보다 슬며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어머나, 도시락이네. 피크닉?”

채이나가 은근히 물었다.

[네, 채이나도 같이 할래요?]

“그럼 고맙지. 도시락은 내가 들게.”

라미아의 권유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드로부터 바구니를 받아드는 채이나였다. 뺏기듯 바구니를 내준 이드는 두 연인과 즐겨야 할 시간이 날아간 것에 아쉬워하며 그녀가 걸어온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데리고 오셨어요?”

조심조심 채이나를 뒤따라오던 기척들이 나무와 수풀 속에 숨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숨소리가 작고 가벼운 것이 마을의 아이들 같았다. “글쎄다? 난 모르지. 그냥 같은 방향인가 했지, 설마 날 따라오는 줄 알았겠니?”

‘충분히 아셨겠죠.’

이드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채이나를 보며 한쪽 머리를 짚었다. 딱 한 대만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먹여 주고 싶었다.

“이 녀석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요?”

다시 올 것 같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하다는 듯 이드가 돌아보던 곳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여기는 평소 아이들이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지 않던 곳인데 이렇게 근처까지 따라왔네요.”

“그만큼 원한이 깊은 모양이죠. 척살단이라잖아요.”

[전 잘못 없거든요!]

라미아가 바락 소리쳤다.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킥킥 웃고 말았다. 그러다 채이나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라미아가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이쪽으로 오지 않을래?”

[에엑 제가 언제요. 전 할 말 없어요.]

채이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라미아가 질색을 했다. 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 주워 담을 수도 없다. 한편 아이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는 자신들이 들킨 사실에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하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서며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들 중 몇 명의 어깨에는 거대한 그물이 들려 있었다. 작은 덩굴로 만들어진 걸 보아 아이들이 직접 만든 물건인 듯 보였다.

“크큭, 저걸로 널 잡을 모양인데?”

“저, 저희들은 라미아만 있으면 돼요.”

“그래요. 라미아만 보내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만든 그물도 던지지 못하면 무용지물. 일리나의 집 앞까지 찾아갈 용기는 있었지만, 이 거대한 악마상 가까이 다가올 용기는 좀 부족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라미아를 찾으면서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머나, 설마 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해골이 무서운 거니? 어쩌나? 라미아는 겁쟁이를 상대해 주지 않는데.”

“무, 무서운 건 아니에요.”

“그럼, 이리 올래?”

상대를 살살 긁고 도발하는 채이나의 언변에 발끈발끈 반응하던 아이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연이어지는 유치한 도발에 불끈했는지 한 아이가 주먹을 꾹 쥐고 일어나더니 냅다 내달리기 시작했다.

“테, 테이야!”

테이라는 아이는 순식간에 달려와 일리나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하고, 때로는 벌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장소에서 가장 익숙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그녀가 낙찰된 것이다.

“테이라고 했지? 용감한데.”

“이, 이제, 놀게 해 주세요.”

테이는 일리나의 다리에 매달려서는 필사적으로 악마상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허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무서워하던 곳에 스스로 달려올 수 있었다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다.

일리나의 어깨에 올라 있던 라미아가 이드의 어깨로 자리를 옮겨 테이를 바라보았다.

[요놈의 꼬맹이들. 감히 척살단이라고? 지금까지는 그냥 슬슬 봐줬지만, 이제부터는 가만 안 둔다. 알았어?]

“어…… 어…….”

무섭게 바락 소리를 지르는 라미아의 말에 테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우린 피크닉 갈 건데, 같이 갈래?]

한참 톤이 다운된 라미아의 목소리와 피크닉이란 말, 그리고 이곳을 떠난다는 말에 테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끄덕여졌다.

[너희들은 어쩔 거야? 피크닉 갈 건데, 같이 안 갈 거니?]

“가, 같이 가요!”

테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의 이어진 외침에 저 멀리서 우물쭈물거리고 있던 아이들이 급하게 대답하고는 우르르 뛰어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눈을 꼬옥 감고 앞에 뛰고 있는 아이의 옷깃을 잡고 뛰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먹을 건 어쩔래? 아무리 봐도, 이 도시락으로는 턱도 없어 보이는데.”

이드가 채이나가 들고 있는 바구니 쪽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모습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하며 바구니를 끌어안는 채이나였다. 

[뭐, 저금통 까야죠.]

이드는 한번 먹어 보고 마음에 들었던 요리들을 열심히 아공간에 쓸어 담던 라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는 저금통은 아마, 그때 챙겨 뒀던 요리들일 것이다.

“뭐, 그렇다면야. 그런데 아이들이 먹고 탈이 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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