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7화
454화
“크아………… 이건 뭐, 터지기 직전의 밥솥 같네.”
이드는 짧게 앓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의 눈은 바쁘게 주변과 악마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드의 말처럼 봉인의 모습은 터지기 직전의 밥솥 같아 보였다. 악마상의 양 옆에 서 있는 거목에서는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회색 안개가 나무를 타고 올라 하늘로 솟아오르고, 검은 해골 악마상에서는 실과 같은 형태의 검은 마기가 뿜어져서 하늘거리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악마상의 붉은 눈과 석탑의 마법진이 붉게 빛나며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 딱 과열되어 터지기 직전의 밥솥과 같아 보였다.
[어딜 봐서 밥솥이에요, 폭탄이지. 그것도 엄청나게 골치 아픈 폭탄이요.]
그 순간 이드를 뒤따라오던 라미아가 석탑 위로 내려앉으며 말했다.
“위험해 보이니까, 조심해.”
이드는 마법을 준비하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라미아를 보호하고 봉인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악마의 존재가 걸리기는 하지만, 그런 문제가 라미아의 존재보다도 클 수는 없었다.
[걱정 마세요. 이런 문제는 제 전문이잖아요. 그럼, 갑니다. 마법진 전개!]
우우웅.
팟. 팟. 팟.
라미아의 말에 따라 황금색 마법진이 떠올랐다. 다섯 개의 마법진은 석탑과 악마상에 세 개가, 두 거목에 한 개씩 형성되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상태에서 라미아의 주문이 길게 이어지며 봉인의 현 상태를 빠르게 파악해 나갔다.
접속. 해석. 분해. 추적. 분석.
라미아는 같은 작업을 수십 번에 걸쳐서 반복하며 봉인의 상태를 파악했다.
이드는 조용히 라미아를 지켜보다 봉인으로 시선을 돌렸다. 봉인에서 흘러나온 회색과 검은색의 기운은 허공에서 섞이며 하늘로 올라갔다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푸른 나무 마을은 햇살이 가려져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변해 있었다.
그때였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미아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드, 해석을 마쳤어요.]
“그래? 빠르네. 수고했어. 그럼 일단 이쪽으로 와.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고, 거긴.”
이드는 라미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쪼르르르 날아와 앉았다.
“어떤 것 같아?”
[그게 좀, 아니, 상당히 곤란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봉인된 악마의 반쪽이 중간계로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데요.]
“어, 그쪽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그럼 봉인 쪽은 어때?”
복구 혹은 파괴. 상당히 극단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봉인이 아니라 그쪽과 이어진 다른 한쪽이 움직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쪽이 문제의 근원이에요. 조금 전 있었던 차원 진동 때문에 공간 좌표가 틀어지면서 악마를 봉인하고 있던 존재 좌표도 일부 비틀어져 버린 것 같아요. 완벽한 봉인에 틈이 생긴 거죠. 그렇게 비틀어진 만큼 봉인된 악마의 의식도 각성한 듯하구요.]
라미아는 말을 하며 이드의 어깨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각성한 의식은 봉인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그렇게 찾은 방법이 바로 마계에 남은 자신의 반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반신이 빠르게 중간계로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가 봉인 안에 있는 마족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불러낸 반신으로 봉인을 부수겠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해결책이 있다. 올라오는 놈을 기다렸다가 소멸시켜 버리면 당장 봉인이 풀리는 대형 사고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차라리 쉽죠.]
아깝지만, 아닌가 보다. 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사이 봉인에서 뿜어지는 안개는 마을을 넘어 숲 전체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을 쓸 것 같아요. 반신을 불러서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거죠. 그렇게 되면 봉인은 자연스럽게 풀릴 테니까요. 봉인이라는 게 굉장히 복잡하고 예민한 방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봉인되어 있는 존재의 모습이 변하면 봉인은 힘을 잃고 말 거예요.
모습이 변하는 순간 봉인은 그를 다른 존재로 인식할 테니까요.]
봉인이라는 방법은 굉장히 어렵고, 예민한 것이었다.
“그럼. 아, 장로님 오시나 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이드는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을 쪽에서 달려오는 네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져 이드 앞에 섰다.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지키고 있어 줘서 고맙군. 그래, 지금 상태가 어떤가?”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명은 저보다 라미아에게 들으시는 게 정확할 듯하네요.”
이드는 설명을 라미아에게 넘기고 우디의 뒤를 따라온 세 명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중 두 명은 검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검은색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하르만, 이지문이던가? 마법사 쪽은 모르겠고.’
이드는 안면이 있는 두 검사의 얼굴에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그들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마법사는 알 수 없었지만, 두 명의 검사는 일전에 마을의 중요 인물로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정령수의 아홉 가지(nine branch).’
마을의 중앙에 서 있는 정령수와 관계된 이름이라서 이드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푸른 나무 마을 최강의 전력으로, 비상시에 장로를 대신해서 수호수의 가지라는 마을의 가디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엘프들이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정령수의 가지로 만든 특별한 활이 주어지는데, 그들을 칭하는 아홉 가지’도 여기서 나온 말이었다. 원래는 정령수가 아니고 수호수의 가지로 만들어낸 활을 사용했지만, 마을에 정령수가 각성하면서 수호수보다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는 정령수의 가지로 다시 활을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수호수로 만든 활은 가디언인 수호수의 가지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아홉 명에게 주어졌다고 했다. 그 아홉 명에는 윌과 함께 일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일리나는 상당히 자랑스러워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정령수의 가지와 수호수의 가지는 특별한 것이었다. 마을의 수호자로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그들은 마을의 모든 엘프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으음. 베르디, 이야기는 들었지?”
심각한 표정으로 라미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우디의 말에 이드가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엘프, 베르디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네, 장로.”
“정말 라미아의 말대로 되고 있는 건지 알아봐야겠다. 동시에 봉인을 다시 조정해야겠다. 준비해라.”
베르디는 대답과 함께 봉인과 나란히 서 있는 두 거목으로 다가갔다. 우디는 남은 두 엘프를 불렀다.
“봉인을 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너희는 주변을 철저히 경계해라.”
“알겠습니다. 장로.”
두 엘프 역시 베르디와 마찬가지로 간결한 대답과 함께 봉인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두 엘프가 각자의 위치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본 우디가 이번에는 이드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일리나에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닥치고 보니 더없이 든든하게 느껴지는군.”
“별말씀을요. 저도 이 마을의 가족입니다. 할 일이 있다면 맡겨 주세요.”
[저두요. 마법에는 자신 있어요.]
우디가 두 사람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이드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으로 라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만으로 고맙구나. 하지만 봉인의 관리는 내가 라일로시드가 님께 전해 받은 일이란다. 내가 해야 할 일이지. 그것을 위한 열쇠도 내게 있고.” 우디는 말과 함께 첫날 아이들에게 정령 딸랑이를 맛보여 주는데 사용한 단봉을 보여 주었다. 그 단봉이 우디가 말하는 열쇠인 것 같았다.
라일로시드가가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봉인을 조정할 수 있도록 남겨 둔 물건인 듯했다.
“대신 자네들도 주변을 경계해 주게. 잠깐이지만 결계가 풀렸던 만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야.”
그 때문에 마을에서도 수호수의 가지들이 나서서 마을 외곽을 둘러싸고 경계를 하고 있었으며, 남은 정령수의 가지들은 결계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이드의 대답에 믿음직하다는 미소를 보이며 우디가 돌아섰다. 그는 베르디가 서 있는 반대쪽 거목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단봉을 가볍게 한 번 휘둘러 베르디가 들고 있는 검은색의 마법 지팡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
“저 한 쌍이 열쇠인 모양이다.”
끄덕끄덕.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우디는 베르디와 시선을 주고받은 후 지팡이의 끝을 나무에 새겨진 마법진의 한 부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법진과 지팡이가 발광하며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빛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은 처음에는 크기가 작았지만 지팡이가 마법진 안으로 녹아들면서 점점 커졌다. 그렇게 지팡이가 고정되자 이번에는 지팡이의 헤드 부분이 작은 아이의 머리만큼 부풀어 올랐다. 우디는 부푼 헤드 위에 양손을 가져다 대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약속된 자 우디. 열쇠의 언약 지옥 시스템 기동.”
우디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팡이의 헤드 부분에서 일어난 빛이 그의 손과 이어졌다. 그것은 반대쪽에 있는 베르디도 다르지 않았다. 우디가 말했던 대로 봉인을 재조정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끝난 듯했다.
하지만 뒤에서 보고 있던 이드와 라미아는 그런 부분이 아니라 우디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했다.
[지옥 시스템?]
…해골에 지옥이라. 신선한데?”
[그분에게 이런 취향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네요.]
두 사람은 라일로시드가가 해 놓은 괴짜 짓에 기가 막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라일로시드가의 취향에 대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 있는 사이, 우디와 베르디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해서 라일로시드가가 만들어 놓은 지옥 시스템을 통해서 봉인을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장로님이 벌써 일을 시작하셨군요.”
서둘러 마을에 다녀온 일리나가 다시 이드 곁으로 돌아와 섰다.
“왜 다시 왔어요. 마을에 아이들과 함께 있지.”
“싫어요. 이제 어떤 상황이라도 이드와 따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이드는 다시 돌아온 일리나가 걱정되었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마음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고서 우디와 베르디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일리나의 직설적인 마음의 표현이 쑥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라미아와 일리나가 마주 보며 쿡쿡 웃고 말았다. 작은 그 웃음소리를 억지로 못 들은 척하고 있던 이드의 눈에 봉인의 상태가 변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장로님이 컨트롤에 성공하신 것 같은데?”
이드의 말대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봉인의 상태가 차츰 변하면서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두 거목을 중심으로 뿜어지던 회색 안개가 줄었고, 줄기줄기 뿜어지던 검은 마기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붉게 타오르던 석탑의 마법진도 서서히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모습은 더해져서 석탑은 완전히 제 모습을 찾고, 마기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래도 회색 안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을 하늘을 가득히 덮고 있던 회색 안개가 많이 옅어지며 마을에 햇살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우디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참혹한 표정으로 헤드의 열쇠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선다. 그와 동시였다. —크르르르……….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고, 사자가 피가 흐르는 사냥감을 앞에 두고 지르는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사자의 수백 배, 수천 배는 거대한 무게감이 있는 울음이었다. 그렇게 득의에 찬 웃음 같은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실패했다.”
기괴한 소리가 그치고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을 채우는 우디의 목소리가 어둡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