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34화
671화
“무슨 일인데?”
하루 전에 보고를 올렸는데, 다시 급히 연락했다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드는 살짝 놀라 물었다가 곧 직전까지 마주 앉아 있던 사무엘을 떠올렸다. 현재 에단이 하고 있는 일을 백작이 알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 잠깐만, 사무엘 백작님?”
라미아의 말을 멈춘 이드가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사무엘은 하이에나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이드와 라미아의 이야기를 살피고 있었다.
‘저걸 푹 찔러 버려?’
재수 없는 눈길에 불쑥 치솟는 충동을 참고 이드가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겠습니다. 누가 급하게 절 찾는 모양입니다.”
“예, 그런 것 같군요. 한데 에단이라면 이드 님의 수하가 아닙니까? 급해 보이는데, 혹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성심성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혹시 뭐 주워 먹을 게 있을까 하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말에 이드가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전혀요. 백작님께서 도와주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극히 개인적인 일이에요.”
“아…… 예.”
다시 묻기도 무서울 정도로 단호한 거절에 사무엘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확실히 거절하면 다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드는 그런 사무엘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는 떠밀듯이 밖으로 내보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참, 출발은 내일입니다. 황궁에서 나온 자작께서 그리 원하셨으니 미리 준비를 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슨 외판원 쫓아내듯 사무엘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이드가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에단이 무슨 일이래?”
[직접 들어 보세요. 이드가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그래?”
자신을 직접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드는 라미아를 쫓아 통신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반면, 쫓겨나듯 밀려난 사무엘은 불쾌함이나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호기심에 눈을 번뜩이며 저택을 돌아보았다.
“흐음, 과연 무슨 급한 일이었을까? 진짜 말처럼 가벼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잘만 하면 저 대단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구워삶을 수 있는 좋은 건수를 얻을 수도 있을 듯한데, 도저히 무슨 일인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이드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거, 이그렌 놈을 내가 쥐고만 있을 게 아니라 이드 옆에 붙여 둘 필요가 있겠어. 아무렴! 둔하고 어리석은 놈이니 아비를 붙잡고 있는 이상 허튼수작은 못 하겠지.”
그의 생각과 달리 이그렌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라 음흉한 곰이었다. 이미 일찌감치 이드에게 그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무엘은 딱히 연줄이랄 것이 없는 이드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이그렌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마차에 올랐다.
“일단 살롱으로 가자. 아무리 급해도 그동안 공들인 얼굴들에 인사는 해야지.”
목적지가 정해지자 마차가 출발했다.
“에단? 급한 일이라고?”
은은히 발광하고 있는 통신구 앞에 선 이드가 에단을 불렀다.
“검은돌에서 알려 온 정보입니다. 자자수 영지의 1구역에 추가 병력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마스터.”
“몇 명 더해진 걸로 급하다고 한 건 아닐 테고, 인원이 많은가 봐?”
이드는 고저 없이 무심한 듯 사실을 전하는 에단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예. 다섯 시간 전까지 확인된 추가 병력만 183명입니다. 검은돌에서는 최소 50명 이상의 병력이 더 추가될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검은돌 전 인원이 동원되어 자자수 영지 전반을 감시하며 내놓은 수치이기 때문에 확실한 정보일 것이다.
“인원이 두 배 이상 늘었다는 말이잖아.”
이드가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쓸었다. 어제 쉴라에게 에단의 보고를 전할 때만 해도 1구역에 숨어 있는 인원은 200명. 그 인원이 500명까지 불어나 버린 것이다.
“자기 영지에 정체불명의 무장 인원이 500명이나 숨어 있다는 걸 자자수 영주가 알면 기겁하겠군.”
어디 기겁으로 끝날까. 단순 병사도 아니고 초인이 500명이나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앉은 자리에서 벌벌 떨며 오줌을 지릴 것이다. 그 숫자의 초인이면 자자수 영지 따위는 순식간에 지워 버릴 수 있으니까.
동시에 상대 전력을 200명으로 알고 있을 은색 기사단도 위험했다.
“늦게 알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쉴라 경에게 다시 알려야겠어. 적절한 때 잘 알려 왔다. 에단.”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런데 추가 병력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상한 점?”
“그렇습니다. 분명 놈들도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 텐데. 너무 당당히 모여들고 있습니다. 마치 보란 듯이 말입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변장을 하고 몰래 모여도 모자랄 판에. 하기야 습격당할 걸 알면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모이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지. 보란 듯이 행동한다라………… 함정일까?”
“저와 검은돌에서는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1구역을 노린 함정이 아니라 다른 곳을 노리고 미끼를 좀 더 위험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살찌우는 것이 아닐까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악!
“빈집털이네.”
에단의 말을 듣던 이드는 순간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겼다.
“모인 500명 모두를 초인이라고 가정하면, 그자들을 안전하게 제압하고 상대하기 위해서 이쪽에서도 두 개 이상의 기사단이 움직이겠지. 은색 기사단을 중심으로 작전이 운영되니까 당연히 화원은 텅 빌 테고.”
[그때 빈 화원을 공략해서 잡혀 있는 렉터를 구하거나 처리하겠다?]
이드는 자신의 말을 이어받는 라미아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비올라도 같은 의견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검왕 측에서 빈틈을 살짝 만들어 준다면 침입은 정말 쉬워지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미끼로 초인 500명이라.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대담한 작전이네.”
어떤 세력이 초인 500명을 미끼로 던져 줄 수 있을까. 500명이 투입된 시점에서 그들이 잠복한 1구역도 단순한 미끼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미끼라고 쉽게 보고 덤볐다가는 도리어 이쪽이 잡아먹힐 가능성도 있다.
통신을 마친 이드는 쉴라와 클라인을 급하게 불렀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두 사람은 날듯이 저택으로 달려왔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헐떡대는 두 사람에게 일리나가 물을 권하는 것을 보며 이드가 에단이 전해 주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빈집털이군요. 놈들이 진짜 노리는 건 화원일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클라인이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이드의 질문에 클라인이 쉴라를 돌아본 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마 초인 500명을 미끼로 던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럴 경우 삼검왕 측에 붙은 두 개 기사단을 제외하면 현재로서는 이쪽의 숫자가 모자라게 됩니다.”
이드는 클라인이 말하는 숫자가 단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알기로 은색 기사단과 흑색 기사단이 중심이 된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기사의 수가 500명이었다. 두 배 이상의 숫자로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상대를 처단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전력이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출신도 불분명한 500명의 초인보다 명성 높은 오색 기사단의 평균 전력이 뛰어난 것이 당연하니 최종적으로야 승리하고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기기묘묘한 초인들의 초인기를 볼 때 자칫 생각지 못한 큰 피해가 생길 수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기사들의 충원이 필요하고, 가장 빠른 방법은 두 개 기사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화원을 지키기로 한 적색 기사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저들이 노리고 있는 화원을 수호할 전력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사들이 지키기는 할 테지만, 과연 단단히 준비하고 숨어들 자들을 막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쉴라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이끄는 기사들에 대한 굳은 믿음이 실려 있었지만, 믿음과 현실이 언제나 일치할 수는 없는 법.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언급하지 못한 불안 요소도 있었다. 삼검왕 측에 붙은 두 개 기사단에서 파견된 기사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느냐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습격자와 함께 동료 기사들이 등을 찌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있다면 외부에 파견된 기사들을 불러들이겠지만, 아마 저들이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들이 은색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당장 자자수 영지에서 철수하려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은색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급히 출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저들을 놓칠 수 있으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드가 말했다.
“제가 화원을 지키고 있으면 어때요?”
“그렇게 된다면 저들에게 저희 뜻을 들킬 겁니다. 무엇보다 습격이 없을 수도 있고요. 출발 날짜를 정해 두고 갑자기 미루면 당연히 의심하겠지요.”
이드는 클라인의 반대에 순순히 수긍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쩌면 렉터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저들은 더욱 은밀하고 음흉하게 나올 것이다.
‘화원을 수호할 전력이라. 결국 화원을 습격할 놈들은 소수 정예의 실력자들일 터. 그들을 상대할 전력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지. 특히 가능하다면 사로잡아야 하는데, 평기사로는 힘들어. 라미아를 두고 갈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드는 일리나의 무릎에 앉아 클라인과 의견을 나누고 있는 라미아를 보았다. 그녀의 마법이라면 어지간한 자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 이외에 대안이 떠오르지 않은 이드가 막 라미아를 부르려 할 때 일리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화원에 남을게요.”
“일리나가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네. 제가 화원을 지키고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이드가 안 된다고 라미아가 남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기에 그녀의 마법은 너무 화려하죠.”
“음…….”
사실 이드도 그 부분이 걱정이었다. 무공이든 마법이든 적만 잘 때려잡으면 되지만 아무래도 화원에서 마법이 뻥뻥 터지면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그리되면 지금까지 라미아를 특이하지만 딱히 경계할 필요 없는 아티팩트로 인식하던 자들로부터 쓸데없이 진지하고 귀찮은 주의를 끌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될 수 있는 한 그런 요란한 등장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드도 알지만 전 무척 강하니까요.”
“그거야 알죠. 하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것이………….”
이드는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일리나가 강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이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드 옆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검후보다 오랫동안 난화십이식을 익힌 고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검후의 숲에서 초인들을 쉽게 제압한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는 기사가 없을 정도다.
기사단장 중 하나가 몰래 남는 것보다 그녀가 화원을 지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법이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리나가 습격자들 사이에 놓이는 게 말이지……………’
하지만 감성이 언제나 이성을 따르라는 법은 없다.
‘거기다 어떤 상황이 닥칠지 누가 알겠어?’
아무래도 일리나는 라미아와 달랐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었다. 일리나와 달리 라미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의 계약으로 이어진 이드를 통해 몸을 뺄 수 있다. 그리고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일리나와 달리 현재 라미아는 신검이라는 불괴에 속하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칠 일도 없었다.
혼돈의 파편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라미아가 잘못될 일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리나의 말대로 소드 팰러스에서 마법은 너무 눈에 띄는 것이 문제였다.
고민하던 이드가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친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화원에서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무공을 돌본 후에 일이 끝나면 바로 이드에게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