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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40화


677화

“쯧쯧, 저 바보들. 신이 났군.”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이야기를 멈춘 상급 기사 하나가 말했다. 그는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제재하지도 않았다.

“멍청하긴! 화원에 와서 저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다른 기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당장 나설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세 번째 기사가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말했다. 

“아아, 좀 참아. 다른 곳도 아니고 은색 기사단의 화원이야. 사방에 어여쁜 여기사들이 가득하니 남자라면 눈 돌아갈 만하잖아. 나도 애써 참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젊은 녀석들이야 두말할 필요 없지. 안 그래? 거기다 지금 지들이 하는 이야기가 여기 주인인 여기사들에게 들린다는 것조차 모르는 불쌍한 놈들이라고. 저 이야기가 퍼지면 어느 여기사가 저놈들에게 관심을 주겠나? 크크큭.”

기사는 생각만 해도 재밌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키득거렸다. 말을 거는 족족 대차게 까이는 기사들의 모습이 상상이 된 탓이다.

도도하고 눈이 높아 공략하기 힘든 은색 기사인데, 그들 중 하나를 연인으로 만들겠다는 소리를 들어 놓으면 그렇지 않아도 높은 경계심이 얼마나 심해지겠는가?

‘최소 나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지, 암. 크하하핫!’

기사는 내심 자신 정도는 되어야 할 거라고 자신했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 당장 한 소리를 할 것 같던 태세의 기사가 인상을 썼다.

“자네는 그 쾌락주의자 같은 태도를 좀 버릴 필요가 있어.”

하지만 정작 말하는 기사도 세 번째 기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생각하는지 떠들어 대는 기사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너무 그러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웃을 일이 없는데, 이렇게라도 웃고 살아야지.”

“흥, 자네는 역시 기사보다는 광대가 체질이었던 게 아닌가?”

“흐흐, 그럴지도 모르지.”

자신의 조롱을 웃어넘기자 눈썹을 꿈틀거린 기사가 다시 물었다.

“그럼 광대가 보기엔 어떤가? 지금 있는 일들 말이야.”

“어떻기는. 소드 팰러스가 우스워진 거지. 안으로든 밖으로든.”

미소처럼 가볍지만 신랄한 평가에 질문을 했던 기사가 입을 닫았다.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수련생 시절부터 앙숙인 두 친구의 대립에 한숨을 쉰 또 다른 기사의 눈에 마침 마지막 기사단이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자자, 지각생들 도착했네. 저놈이 끼면 괜히 시끄러워져. 그만하고 각자 기사들이나 돌보세.”

“그래야지. 자, 수다 시간은 끝이다. 모두 정렬!”

그의 말에 상급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에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던 기사들이 언제 떠들었냐 싶게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자로 잰 듯 그림처럼 도열해 섰다.

화원에 발을 들이고 정신 상태가 반쯤 풀리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통해 확실히 오색 기사단에 속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황색 기사단이 도착하면서 네 기사단이 모두 도열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원 안에서 제대로 정복을 갖춘 백 명의 은색 기사단이 걸어 나왔다. 그 앞에는 번쩍이는 은색 파츠 아머를 입고 검을 손에 쥔 은색 기사단의 부단장이 서 있었다.

타 기사단에서 은색 기사단을 돕기 위해 지원을 와 주었으니, 도움을 받는 은색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환영에 소홀할 수 없는 것이다.

“크흡, 미녀 기사 군단의 환영이라니. 이대로 죽어도 좋아.”

그녀들의 등장에 기사들 사이에서는 우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에 지금 막 도착한 황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 데이노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멍청한 소리를 하다니.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은색 기사단도 그렇다. 이렇게 쓸데없는 정도로 화려할 필요가 있는가? 하여간 여자들이란!’

데이노스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단장을 닮아 남성 우월주의 기조가 강한 황색 기사단의 기사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속한 황색 기사단 대부분의 기사들이 애써 얼굴을 굳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사이 정식으로 기사들의 명령권을 넘긴 상급 기사들이 돌아가고 네 기사단에서 파견된 기사들은 그들이 임시로 사용할 숙소로 이동하였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럼 이쪽도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쉴라는 창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십 명의 기사들을 확인하고는 돌아앉았다. 이제 저들의 명령권을 인계받고 지휘하는 것은 온전히 스위트 경의 책임이 되었다.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쉴라는 그녀가 충분히 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쉴라에게 중요한 것은 전날 수련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욱씬-

“끙, 제대로 뭉친 모양이네. 따로 마사지를 좀 받아야 할까?”

쉴라는 수련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서인지 다시 저리기 시작하는 어깨를 주물렀다.

근육통이라니. 실로 오랜만이었다. 은색 기사단의 대대적인 훈련에서나 생기는 근육통이 그 짧은 시간의 대련으로 생길 줄이야.

“일리나 님이 대단할 줄은 예상했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느낌이 달라.”

수련장에서 검을 마주한 일리나는 실로 강했다. 하지만 그보다 쉴라의 머릿속에 더 강하게 남은 인상은 따로 있었다.

“꼭 검후님 같았어.”

일리나가 수련장에서 보여 준 난화십이식은 검후의 난화십이식과 다르면서도 또 같아 보였다.

화려하고 우아하고 고고하며 강렬했다.

이드의 난화십이식을 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드의 난화십이식은 하나로 완전하기보다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느낌으로, 오히려 초라해 보이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일리나가 보여 준 난화십이식은 달랐다. 색색이 화폭을 가득 채운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검후의 난화십이식과 완전히 같지 않은 것은 일리나와 검후가 가진 생각과 육체의 차이, 그리고 인간과 엘프라는 종족의 차이 때문이리라.

그리고 격렬한 대련 후에 나온 일리나의 마지막 말.

“난화십이식을 익히세요.”

그 말이 화인처럼 머리에 남아 귓가를 맴돌았다.

“휴우, 도대체 내게 어쩌란 말씀이신건지.”

물론 자신에게만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함께 있었고, 일리나는 그녀들에게도 난화십이식을 가르치겠다고 했으니까. 검후의 상징과 같은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에 두 사람이 발광하듯 환호작약한 것은 당연했다. 흥분이 과해서 기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쉴라는 두 사람처럼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물론 강한 무공을 배우게 된 것은 즐겁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왜 난화십이식인가? 그녀가 본 대로라면 이드에겐 그 외에도 강력한 무공이 있을 텐데. 그리고 왜 하필 지금인가? 곧 자자수 영지에의 출동에 토벌전도 있는데.

쉴라는 그 이유를 난화십이식의 상징성이라 짐작했다. 소드 팰러스의 주인인 검후의 무공이라는 상징성 제국 황궁에 남아 있을 테지만, 공식적으로 익히고 있는 것은 오로지 검후뿐인 무공. 그것을 익힌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이드 님은 만약의 경우 나에게 소드 팰러스를 책임지라고 하시는 것인가?”

검후가 후계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난화십이식을 익히고 있는 쉴라가 등장한다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검후의 후계로 남자보다 같은 여자인 쉴라가 더 당연하다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닌데.”

쉴라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닥친 고민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말, 왜 하필 지금 이야기를 하신 건지. 이건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답답하구나.”

쉴라는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 묻지 못했던 사실을 일리나에게라도 물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억지로 펜을 손에 잡았다.

어차피 무공을 익히는 일이 하루 이틀에 될 것도 아니고, 지금은 당장 급한 일이 먼저였다.


“흥흥흥, 흥흥, 흐흐흥, 흥~”

무구를 손질하는 네리베르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벌써 얼마나 이어지는지 끝날 생각을 않는다. 케마란이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지켜보고 있자 별안간 네리베르의 흥얼거림이 멈췄다.

“뭐예요?”

“아니, 별로. 계속해. 나도 기분 좋은 건 마찬가지라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지만, 잘 부르지 못해서 말이야. 네가 나 대신 흥얼거려 주는 것 같아 듣기 좋아서 본 거야.”

•별꼴이에요.”

네리베르는 자신이라면 하지 못할 소리를 뻔뻔한 얼굴로 잘도 말하는 케마란의 모습에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는 다시 무구를 닦았다.

아직 손질할 무구가 절반 이상 남았다. 도대체 자오는 무슨 수로 이 많은 무구를 손질할 생각이었을까? 그것도 혼자서.

“정말 기분 좋다고. 아까 봤잖아. 백 명의 은색 기사단 언니들이 도열한 모습. 정말 환상적이었어. 우리도 곧 그 속에 낄 수 있겠지?” 다시 무구를 닦던 케마란이 말했다.

“당연해요. 마스터와 단장님 말씀처럼 실전만 잘 치른다면 충분해요. 우리 실력은 이미 인정받았으니까.”

“그리고 이번에 더 강해질 기회가 생겼지. 난화십이식을 배우게 됐잖아. 크~ 정말 부럽다고.”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는 듯 케마란이 몸을 떨었다. 네리베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케마란이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검으로 난화십이식을 익혀 볼까?”

“정말이에요?”

“이런 기회 다시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뜻밖의 말에 놀란 네리베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평소 상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게 조심하던 그녀가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서 그렇게 말리고 비난함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놓지 않던 링스피어를 놓겠다니!

동기 중 가장 앞서서 링스피어를 치우기 위해 노력했던 네르베르의 입장에서는 놀라지 말라고 하는 것이 무리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난화십이식을 배울 기회에요. 아무리 저 고집불통이라도 무릎 꿇을 수밖에 없겠죠.’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또 가지고 싶기 때문에 부러운 것일 테다. 더구나 당장 사용하는 무기를 바꾼다면 바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 눈앞에 있으니까 더 흔들리는 것이겠지.

일리나가 케마란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은 난화십이식 자체는 아니었다. 그중 링스피어를 다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흡수하라는 것이었다. 케마란 입장에서는 진수성찬을 차려 두고 그중 몇 가지 요리만, 그것도 한 입씩 맛만 보라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얼마나 애가 탈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아마 여기서 그의 등을 밀어주는 말을 딱 한 번만 한다면 저 케마란의 손에서 링스피어를 놓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링스피어를 들지 않은 케마란 양이라니. 별로 멋진 모습은 아니네요.’

이제 겨우 그녀의 천재성과 고집을 인정했는데, 그것이 엉뚱하게 무너진다 생각하자 괜히 억울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어쩐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만둬요. 그래도 익힐 마음이 있다면 링스피어는 내게 주세요. 에고가 생긴 아티팩트라면 쓸데가 많겠죠.”

딱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정도의 건조하고 덤덤한 목소리다. 뭐, 그 속에 은근히 자존심을 긁는 눈빛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눈을 마주한 케마란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어 버리고는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며 말했다.

“흥, 어림없는 소리 말아. 그냥 슬쩍 해 본 소리에 링스피어를 내놓으라니. 이런 도둑고양이가 옆에 있었을 줄이야!”

“도둑고양이라뇨. 나니까 그런 고물을 잘 써 주겠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거라고요.”

“흥이네요.”

카르릉, 아르릉.

서로 털을 세우고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곧 피식 웃고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케마란이 말했다.

“뭐, 이렇게 된 이상 난화십이식도 내 식대로 익히고 말겠어.”

과연 가능할까?

피식 웃은 네리베르가 말했다.

“가끔 도와는 줄게요.”

“기대도 안 해!”

코웃음 친 케마란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묵묵히 무구 손질을 이어 갔다.

두 사람에게 한 남자 기사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네들이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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