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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46화


683화

스위트 경의 호명을 받은 네리베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후흡~”

더 이상 수련생이 아닌 은색 기사단에 속한 한 명의 당당한 수련 기사로서 타 기사단의 기사와 대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 압박감에 꼼작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다. 그녀는 숨을 가득 담아 가슴을 부풀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로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이 환호와 응원을 퍼부었다.

“네리베르, 한 방에 날려 버려!”

“그래, 여자를 무시하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라고!”

“물러서지 말고 버텨. 그러기만 하면 돼!”

시끄럽고 두서없는 응원이었지만, 친근한 그녀들의 목소리는 기사단의 이름을 걸고 하는 첫 대련에 대한 압박감을 조금 덜어 주었다.

네리베르는 불끈 쥔 주먹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러자 여기사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꺄아악~ 언니, 이겨~”

“이년이 술도 안 먹고 취했나! 네 딸 또래를 두고 어디서 언니야!”

“이게 은근히 내 나이를 밝히고 있어! 죽을래?”

뭐, 개중에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그 모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네리베르를 상대할 기사였다.

“제기랄. 저쪽은 저렇게 열심히 응원해 주는데, 이놈들은………….”

애써 무시하던 더글라스가 슬쩍 돌아보자 그와 눈이 마주친 몇몇 기사들이 으르렁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 기사 상대로 수작 부리면 죽을 줄 알아!”

“수련 기사 상대로 대충하다가 지면 죽일 줄 알아!”

“여기사들 본다고 혼자 멋진 척하면 절대로 죽인다!”

“황색 기사단 가자! 이기자! 부수자!”

말끝마다 죽인단다. 이건 대련을 잘하란 말인지, 대련하고 죽으란 말인지 구분이 안 간다. 아무리 같은 기사단의 기사가 아니라도 너무한다 싶었다. 응원만 들어서는 같은 편인지 적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나마 같은 기사단이라고 구호를 외치는 정상적인 놈이라도 끼어 있으니 다행이긴 했다. 그렇지만 평상시에도 쓰는 흔한 응원구나 대충 외치는 동료의 모습이 수련 기사를 응원하는 은색 기사단의 기특한 말과 비교되어 힘이 나지는 않았다.

“젠장, 황색 기사단 때려치우고 은색 기사단에 들어가는 방법 없나?”

물론, 그냥 해 본 말이다. 소속 기사단을 변경한다는 문제 이전에 성별을 바꿔야 한다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 대련자가 마주서자 스위트 경이 대련에 앞서 주의할 점을 주지시켰다.

“두 기사 모두 알겠지만 이후 우리에겐 중요한 임무가 있다. 스스로 멈춰야 할 선을 잘 판단하도록! 인사!”

“기사도에 어긋남 없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슴을 탕 두드리며 외친 네리베르의 눈이 바위처럼 단단하다.

“기사도에 어긋남 없이, 경의 선전을 기대하지.”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자신을 낮잡아 보는 더글라스의 발언에 네리베르가 날이 선 목소리로 답했지만, 더글라스는 그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그는 눈앞의 네리베르를 어떤 식으로 패배시켜야 욕을 덜 먹을지 궁리하고 있었다.

‘적당히 교육하면서, 아니면 단번에 제압해서?’

그에게 이 대련의 승리는 이미 기정사실과 같았다.


스위트 경에게 대련을 맡긴 쉴라는 일리나 곁으로 다가서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대련을 진행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저도 화원에 머무는 동안은 쉴라 경의, 아니 단장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일리나의 가벼운 허락에 그녀의 눈치를 보던 쉴라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렸다.

“명령은 아닙니다. 그저 부탁드릴 뿐이죠. 아무튼 거절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단장님이 아무런 의미 없이 갑자기 대련을 하자고 하실 리 없으니까요. 그렇죠?”

“일부러 만들기도 어려운 자리인 만큼 잘 사용해야죠.”

일리나의 말을 들은 쉴라는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일리나의 말대로 갑자기 만들어진 이 대련을 통해 다양 한 것을 노리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로 대련의 시작이 수련 기사가 합당함을 알리는 것인 만큼 케마란과 네리베르, 그리고 일리나에 대한 실력 증명을 통해 타 기사단 뿐 아니라 혹시 은색 기사단 안에서도 오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기사들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을 함께 해결하는 것으로 은색 기사단과 타 기사단의 화합을 유도하고, 또 그 일을 스위트 경이 주도하게 하여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명령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까지.

누가 알았다면 대련 하나로 너무 많은 걸 해결하려고 한다고, 욕심쟁이라고 할 만한 의도들이 가득했다.

“갑작스럽지만 일리나 님이 제게 검후님의 검법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막 무대에 오른 대련자를 바라보던 쉴라가 지나가듯 무심하게 물었다.

그에 일리나가 쉴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짐작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맞을 거예요.”

“아……”

짐작의 확인에 쉴라의 숨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느낀 일리나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요?”

쉴라는 일리나의 말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놀랄 일이 아니면 어떤 일에 놀라야 하는 것일까. 바로 소드 팰러스의 다음 주인에 대한 이야기다.

삼검왕이 수작을 부리는 것도 바로 그 후계와 소드 팰러스의 주인 자리 때문이 아닌가.

“이 문제가 놀랍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냥 만약을 대비한 장치일 뿐이에요. 난화십이식을 배운다고 해서 이곳의 주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분명 그렇다. 난화십이식이 검후의 상징이긴 하지만, 소드 팰러스의 주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전권은 될 수 있다. 후계가 명확하지 않은 소드 팰러스에 오랫동안 검후의 곁을 지켜 온 은색 기사단장이 난화십이식을 가지고 등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검후의 뒤를 이을 다음 대 검후로 주목할 것이다.

뿐인가! 혹시라도 그 뒤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쉴라가 난화십이식을 배운 것이 이드의 의도였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것이 가지는 의미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쉴라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결코 은색 기사단장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겐 벅찬 일입니다.”

일리나는 가라앉는 쉴라의 목소리에 가볍게 대답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드도 만약을 대비한 보험이라고 했으니까요. 앗, 대련 시작이네요.”

“휴우~”

마침 들린 시작 신호에 일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쉴라도 더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참고 대련을 살폈다.


쩌엉!

스위트 경의 시작 신호와 동시에 대련장 중앙으로 달려 나온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선배를 상대로 긴장한 수련 기사로 인해 지루해질 거라고 예상하던 기사들은 그 순수한 힘의 격돌에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네리베르는 그 한 번의 격돌로 인해 강한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기사들을 흥분시킨 격돌을 통해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선배 기사의 존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케마란을 상대할 때처럼!

‘케마란이라니. 어쩐지 질 것 같지 않네요.’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케마란의 얼굴이 상대에 겹쳐지자 네리베르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저 덩치에 케마란의 얼굴이라니. 오히려 너무 어울려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 한 번의 웃음과 함께 스스로의 몸이 최상의 상태로 풀어지는 것을 느낀 네리베르는 입술을 살짝 핥았다.

‘상대가 선배님이지만, 이길 수 있다면 이겨 버려도 괜찮은 거겠죠?”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에서 승리로 목표를 바꾼 네리베르는 순식간에 평소 자신의 흐름을 찾아 정석대로 꼼꼼히 상대를 공격해 나갔다. 

“크윽!”

더글라스는 신음을 삼키며 낭패한 심정을 다잡기 바빴다.

‘젠장, 아직 어린 계집애 주제에 힘이 보통이 아니잖아. 너무 얕봤나.’

첫 충돌로 은색 기사단의 수련 기사의 실력이 예상보다 좋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 그녀가 터트린 웃음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대응이 한발 늦고 말았다.

이미 네리베르의 무시무시한 연격이 시작된 후였다.

순식간에 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린 그는 이를 악물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나갔다.

“투지는 제법 봐 줄 만하지만 아직 어설프다!”

예상 이상의 실력과 모습을 보였지만 상대는 수련 기사. 소나기 같은 연격을 넘기자 군데군데 이상한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는 수련 기사에게 밀렸던 순간을 지워 없애려는 듯 강한 힘으로 허점을 파고들어 케마란을 튕겨 냈다.

더글라스는 그 모습을 보며 흥분해서 외쳤다.

“날 밀어 붙이기엔 여자인 네 힘은 어설프다. 하하하!”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 기사들은 작게 혀를 찼다.

“저놈도 그렇고, 데이노스도 그렇고. 황색 기사단에는 바보들뿐이냐?”

“쯧쯧쯧, 저 멍청한 놈도 여자 사귀기는 틀렸구나.”

성난 황소처럼 힘을 쓰는 더글라스의 검이었지만 네리베르는 익숙하게 받아 넘겼다.

‘고작 이 정도의 참격도 막아내지 못해서야 링스피어를 막아 낼 수 없다고요.’

물 흐르듯 끊이지 않는 연격이 막혔지만 네리베르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더글라스의 반격에 두 걸음을 물러선 이후 그 자리를 지켰다. 그의 공격이 강력하긴 했지만 링스피어의 크기와 길이에서 나오는 파괴력에 매일 단련된 네리베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요. 오히려 항상 새로운 공격 방법을 들고 나오는 링스피어 쪽이 오히려 상대하기 번거로워요. 그에 비하면……………..?

두 사람을 비교한 네리베르는 케마란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케마란 양에 비하면 선배님의 공격은 단순해요. 의외성도 모자라군요. 링스피어와 달리 하체가 비었어요. 오른쪽 어깨 부위의 방어가 물러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케마란과 비교된 더글라스의 모습이 네리베르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 위에 가면처럼 덧씌워져 있던 케마란의 얼굴이 점점 더글라스의 것으로 변해 갔다.

그에 따라 케마란과 싸우는 것처럼 더글라스를 상대하던 네리베르의 움직임도 오로지 더글라스에 맞춰서 변해 갔다. 그의 힘을 앞세운 공격과 방어를 무너트리기에 알맞게.

네리베르는 케마란을 천재라고 인정했지만, 그녀 역시 세간에서는 천재라 불릴 법한 재능을 가졌다.

그녀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더글라스와 짜 맞춘 듯 맞아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호흡이 하나가 되는 순간.

“흐읍!”

등 근육을 바짝 조인 네리베르의 공격에 더글라스의 가슴이 활짝 열리며 커다란 허점이 생겨 버렸다.

“허억! 이게 무슨!”

그리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네리베르가 예의 바르게 경고를 날렸다.

“실망하지 않도록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하아악!”

그리고 그녀의 연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따다다다당!

“이거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는걸?”

쉴라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내며 진땀을 흘리는 더글라스를 보며 승부가 났음을 알았다.

“그렇죠. 내공을 사용하면 벗어날 수 있지만, 후배와의 대련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두고두고 망신으로 남을걸요? 크크큭. 그나저나 네리베르의 실력 어떤 것 같으세요? 많이 는 것 같죠?”

쉴라는 자랑 같은 스폴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야. 어제 수련장에서 일리나 님의 수업을 받는 걸 보고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더글라스 경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면 내 예상 이상이야.”

“아무래도 케마란의 링스피어를 상대한 것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점을 감안해도 실력의 상승이 눈에 보일 정도야. 역시 이드 님의 수업 덕분이겠지?”

“따로 수련한 게 없다면 그렇죠.”

“흐음, 스폴 경. 이드 님이 하셨던 수업 내용 알지? 그거 따로 정리해서 올려 주겠어? 아무래도 우리 기사단에서도 쓸 만한 건 진행해 봐야겠어.”

“시도는 나쁘지 않지만, 전 조금 회의적이에요. 이드 님 수련 중 몇몇은 이미 세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세세한 부분이 다를 뿐이지.”

입술을 매만진 스폴이 고민스럽게 대답했다.

“바로 그 세세한 부분. 그 작은 것이 큰 차이를 만드는 거지. 저 대련에서 꼼꼼한 네리베르의 공격을 더글라스 경이 막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쉴라의 눈앞에서는 네리베르의 연격을 끊어 내지 못한 더글라스가 연신 뒤로 주춤거리며 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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