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화
462화
살랑살랑
라미아의 머리에 매달린 은색 풀잎이 바람에 날리며 흔들거렸다.
이드와 델프리드는 빠르게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앞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나무 아래로 몬스터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빠르게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둘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빠르게 달린다고 주변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델프리드는 그녀의 특기인 정령을 불러 주변을 살폈고, 이드는 넓은 시야와 라미아의 눈을 빌려 주변을 살폈다.
덕분에 그들 앞에 나타난 작은 전투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오크 세 마리가 쓰러져 있는 별것 아닌 흔적이었다. 지금 시온 숲에서는 수없이 많은 생명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새겨진 것은 분명히 검흔이었다.
이 흔적이 테이를 납치한 자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지난 후 처음으로 찾은 인간의 흔적이다. 이드와 델프리드의 발걸음에 힘이 더해졌다. 여전히 주위를 빈틈없이 살피고 있었지만, 확신을 가진 두 사람의 속도는 조금 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이드는 희미하게 밝아 오는 하늘 아래 검은 숲 속에서 한참을 솟아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좁쌀처럼 보이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상대지만 이드는 그를 찾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그와 동시에 이드의 손가락 끝에 푸르른 기운이 맺히더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무르익었다. 그것은 어쩐지 푸르기보다는 시퍼런 귀화를 연상시키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슈슈슉-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더없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헨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나는 선택받았다.”
바람에 펄럭이던 로브의 두건이 벗겨지며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 자유와 자연스러움이 자신의 앞날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 더러운 누더기도 더 이상 입을 필요가 없다고! 크하하하! 축복받아라, 시온이여, 내가 다시 태어난 곳이여.”
헨리는 마스 왕국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남작가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성에 살고 있던 평민 처녀였다. 수많은
이야기에서처럼, 외유하던 남작의 눈에 띄어 납치되듯이 남작의 소유가 된 것이다. 남작은 평소 여색을 밝혔고 덕분에 헨리의 위로 남자 형제만 열둘이나 더 있었다. 그러나 남작은 본처의 소생 이외에는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적으나마 돈을 쥐여 주어서 배를 곯게 하지는 않았으나 절대 풍족한 삶은 아니었고,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 준 것이었다.
그가 처음 남작을 만나게 된 것은 전쟁터로 끌려갈 때였다. 마스 왕국은 척박한 나라다. 영지 간의 전투도 잦고 국가 간의 국지적인 전투도 적지 않았다. 양 옆으로는 거대 제국, 위쪽으로는 드레인과 맞대고 있는 넓은 국경선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마스 왕국의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가진 호전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의 쉬지 않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싸워 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헨리가 살던 남작 영지는 세 나라가 서로를 향해 창칼을 맞대고 있는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저 거대하고 위험한 레이논 산맥과도 가까웠다.
덕분에 몬스터와의 전투도 많았고, 몬스터의 대규모 침공도 막아야 했다. 이런 몬스터의 준동은 두 제국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레이논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를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마스 왕국의 국경으로 몰아가기 때문이었다.
뭐, 입장을 바꾸면 적당한 대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몬스터와 싸워서 나오는 것은 몇몇 몬스터의 부산물 정도지만, 그로 인해서 생기는 인적, 물적 손해는 그야말로 막심했다. 그 손익을 계산하면 상대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두 제국에서는 전투를 피해서 높은 방벽을 쌓고, 강력한 방패병과 기마병으로 몬스터의 접근을 막았다. 그렇다면 레이논에서 밖으로 나온 몬스터들은 어디로 갈까.
당연히 그들이 쌓아 둔 방벽을 따라 달려 도착하는 곳은 마스 왕국의 국경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스 왕국에서는 두 제국에 항의를 했지만, 애초에 들어 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마스 왕국의 말은 무시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제국와 마스 왕국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이후 두 제국에서는 적극적으로 몬스터를 마스 왕국으로 이끌었고, 마스 왕국의 국경은 끊이지 않는 전투로 바짝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렇지 않아도 호전적인 마스 왕국 귀족들의 호전성을 더욱 돋웠고, 작은 다툼도 참지 못하고 영지끼리 전투를 계속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 버렸다.
당연하지만 헨리가 태어난 영지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 되는 남작은 성급하고, 호전적일 뿐 아니라 여자를 좋아해서 제법 시끄러운 문제를 많이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남작은 이런 상황들을 한 가지 방법으로 무마시켰는데 바로 자식들의 희생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 정신에서 비롯된 말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뭐, 제정(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격히 쇠퇴하기는 했지만, 초기 로마 시대의 귀중한 가르침이었다.
이는 그레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 약자를 지킬 줄 아는 자, 명예를 아는 자는 존경받고, 찬양받았다. 남작은 자식들을 위험한 전쟁터의 선두에 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허물을 덮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자리에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닌 자신의 자식을 세우는 것으로 명성을 높였다. 누군가는 자식들이 많으니 한둘 정도 죽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자식은 그들의 분신이며, 모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작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남작의 심장에 흐르는 차디찬 푸른 피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헨리의 위에 있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형들이 하나둘 죽거나 불구가 되자 결국은 헨리의 차례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영주성에서 나온 기사에게 끌려가서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작자의 얼굴을 봤다. 그때 남작이 한 말은 ‘네 책임을 다하라’는 말뿐이었다.
헨리는 그 자리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남작은 그저 두려운 귀족일 뿐, 아버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남작도 한 번도 그런 자상한 모습 같은 것은 보여 주지 않았다. 헨리는 영주성에서 기사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한 달 뒤 몬스터와의 전투에 끌려 나갔다. 반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를 키운 어머니가 영주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그의 형들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를 위한 인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주의 아들로서 전쟁터에 나가기 때문에, 어머니가 비가 새는 집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집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아마 그가 죽거나 불구가 되어서 돌아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안전할 것이다. 헨리는 전쟁터에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위험한 상황을 넘기기도 했고, 죽을 만큼 심한 부상에서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독기도 생기고, 실력도 키울 수 있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한 덕분에 국경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의 눈에 띄었다. 헨리는 그의 밑에서 몇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후 변경백의 기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작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도 헨리에게 더없이 만족스러운 형태로 말이다. 남작이 아무리 성급하고 호전적이라지만, 변경백의 위엄에는 감히 항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국경은 언제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그때부터 살기 위해, 좀 더 안전해지기 위해, 또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빛을 발했다. 제국과의 국지전에 출군한 중앙군 장군의 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헨리는 드디어 자신의 신세가 폈다고 기뻐했다. 수도인 림몬에서 자리를 잡으면 어머니를 모셔 올 생각도 했다. 늦었지만 결혼도 생각했다. 수도 기사단의 파츠 아머를 걸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헨리는 최종적으로 파츠 아머가 아니라 짙은 갈색의 로브를 걸치게 되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 그의 실력은 어중간했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훈련 해 온 기사들을 앞지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관은 상위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수도 기사단이 아닌 다른 기사단에 배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잘못하면 수도 기사단에 들 수 없다는 생각에 헨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그는 간신히 수도 기사단의 커트라인에 들 수 있었다. 그의 바로 아래 등수부터 마스 왕국의 어둠에서 정보 수집, 암살, 추적,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기사단 로브스로 배속될 예정이었다.
한데 배속이 확정되기 며칠 전, 헨리의 서열이 갑자기 내려가면서 그의 소속이 로브스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헨리는 이럴 리가 없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것이다. 상부에서는 이 일이 철저히 능력을 기준으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그 이상의 항의는 받아 줄 수 없다며 은근한 협박을 포함한 위협도 주었다.
어쩔 수 없는 상관의 명령에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로브를 입게 되었다.
누구든 로브스가 되는 순간 10년간 죽은 사람이 된다. 외부와는 아무 소식도 주고받을 수 없고, 자신의 존재를 밝힐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유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헨리가 림몬으로 오면서 가졌던 꿈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초인에 대해서는 로브스가 된 뒤에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헨리는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어느 순간 갑자기 능력을 각성한 축복받은 존재. 그들은 왕국에서 애지중지하는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기사들과는 달랐다. 기사의 자리는 비는 순간 바로 채워지는 것이 가능했다. 기사를 목표로 단련하는 수많은 수련 기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대체가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초인들은 다르다. 그들의 각성은 어떤 특정한 조건을 달성해야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누가 각성하게 될지 모른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도 알지 못한다. 때문에 훈련을 시키거나 준비를 할 수도 없다. 또 대부분이 비슷한 능력을 보이긴 하지만 나름의 성격과 생각에 따라 특색을 보였다. 개중에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초인도 있어서 이들은 하나하나가 유일한 존재로서 가치가 높았다. 기사와는 달리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바로 초인이었다.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이미 초인은 각국이 가진 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브스의 선배는 기사와 마법사의 시대가 가고, 초인의 시대가 올 거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헨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며 자신도 초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초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심 자신은 아닐 거라고 포기하기도 했다.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이 질투로 변하는 데는 하루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