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1화
688화
“링스피어로 난화십이식을? 정말이에요?”
팝콘을 집어 먹는 것도 잊고 일리나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이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일리나의 말인데 당연히 사실이죠.]
엘프라고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리나가 이드를 속일 이유가 없다. 라미아가 일리나의 편을 들자 이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짓말했다는 게 아니라 놀라서 그러지.”
“쿠쿡, 알아요. 그리고 분명 난화십이식의 분영화였어요. 많이 생략되고, 초식의 핵심 무리를 잃지 않는 선에서 딱 지금의 케마란이 감당할 수 있는 일부만 담아 겨우 성공했지만요.”
‘조금 많이 엉성했어요.’
고민하던 일리나가 마지막에 총평을 더했지만, 이드의 놀라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천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난화십이식을 접하고 하루 만에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로 뛰어난 줄은 몰랐어요. 다시 봐야겠는걸요.”
중원에서는 미첨도, 또는 협도라 불리는 완성도 높은 무기를 혼자 만든 데다 그 활용법까지 만든 모습에 천재라고 평가를 내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의성을 보고 매긴 높은 점수였다. 새롭게 만드는 것과 기존의 것을 배우는 것은 다른데, 케마란은 두 가지 모두 뛰어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케마란이라면 이드가 가르쳐 주는 창술도 곧잘 따라 했잖아요.]
라미아는 최근 들어 이드가 케마란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창술로 변형시킨 풍운십팔봉법에 대해서 말했다.
“아니야. 이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창술로 바꾼 풍운십팔봉법은 개방의 삼결제자가 배우는 무공이야. 하지만 난화십이식은
신공절학급의 무공이고, 두 무공을 배우는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지. 쉽게 말하면 물가에 앉아서 물장구치는 것과 크루저를 타고 바다를 여행하는 정도의 차이지.”
[물장구하고 크루저를 비교하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니까 한 말이야. 그만큼 두 무공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거지. 케마란이 한 일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야.”
연신 케마란의 대단함을 칭찬하며 일리나에게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이드를 보던 라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런 이드는 난화십이식을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응? 오래 걸렸지. 제대로 입문하는 데 육 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
[케마란처럼 대충 따라 한 건요?]
이드는 연이은 라미아의 질문에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채고 살짝 대답을 우물거렸지만, 일리나나 라미아 앞에서 내외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사실대로 말했다.
“…뭐, 오래 걸리진 않았지. 몇 번 구르고 나니까 대충은 되더라고. 일단 초식의 기본 형태만 비슷하게 흉내 내는 정도라………….]
[흐응, 결국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안 걸렸다는 말이네요. 케마란은 하루가 걸렸는데. 케마란이 천재면 이드는 뭐예요? 그러고 보면 풍운십팔봉법을 창술로 바꾸는 데도 며칠 걸리지 않았고.. ·.]
눈을 가늘게 뜬 라미아가 짓궂게 물었다.
순식간에 자화자찬이 되어 버린 상황에 이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콜라를 쪼록쪼록 빨아 먹었다.
[어휴, 이래서 천재들이란 말에 진정성이 실리지 않아요. 한 시간 걸린 사람이 하루 걸렸다고 칭찬하면 누가 진심으로 기뻐하겠느냐고요.]
진정성이 없기는 라미아도 마찬가지였다. 투덜대는 내용과 달리 흐뭇한 눈매와 으쓱한 어깨로 이드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표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작은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이드는 부끄러움에 라미아의 이야기를 끊고 화제를 돌렸다.
“천재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태어나자마자 고클래스의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넌 어떻고?”
[뭐, 제 경우야. 천재라고 하기도 어렵죠. 종특 아니겠어요? 종특, 그레센 신화와 역사책 속에 등장하는 신검과 마법 검들도 모두 저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났다 구요.]
신검과 마법 검을 묶어 종족으로 분류하는 뻔뻔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폭소하는 일리나의 웃음소리에 괜히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신검이 종족으로 분류되긴 힘들지 않아? 종족 번식이 안 되잖아.”
[뭐, 지금까진 그렇죠, 지금까지는. 하지만 제가 있으니까 지금부터 달라질 거예요. 제 아이가 태어나면 신검 종족의 후손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이드의 노력이 필요한데… 최근 제 모습에 변화가 없어요. 알죠?]
“물론 알지. 아무렴. 열심히 하겠습니다.”
갑자기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이드는 조건반사처럼 간사한 미소와 함께 양손을 비볐다. 라미아의 변화는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보니 이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갓 입소한 신병처럼 충성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드였다.
똑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이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칫’ 하고 작게 들리는 혀 차는 소리가 들리자 문을 두드린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문 앞에는 조금 다급한 얼굴을 한 집사가 서 있었다. 노련함으로 무장한 첫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실례합니다, 이드 님. 쉬시는 것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귀한 손님이 오셔서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집사가 말했다.
“귀한 손님이면 어떤 분인가요?”
소드 팰러스 흑색 기사단장의 저택을 지키는 집사가 놀랄 정도면 최소한 제국의 백작 이상의 인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레오날도 후작 각하께서 이드 님을 만나기 위해 직접 밤길을 달려 찾아오셨습니다.”
황제의 남자. 권력의 핵심. 갑작스런 거물의 등장에 집사는 흥분한 듯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드는 갑작스런 후작의 방문에 마땅치 않은 표정을 했다. 수도에 이제 막 도착한 밤에 만나기에는 부담스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라미아 잔소리도 한 템포 쉬면서 충분히 피했고, 대련 이야기도 이제 일리나가 나서는 부분이라 하이라이트인데.’
입맛을 다신 이드는 무슨 일인가 하고 살피는 일리나와 라미아를 돌아본 집사에게 말했다.
“밤에 찾아오다니 예의가 없으신 분이네요. 그냥 내일 다시 만나겠다고 전달해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말을 할수록 시퍼렇게 질리는 집사를 보면, 이대로 돌려보내라고 했다가는 후작 이전에 집사가 먼저 하늘나라로 돌아갈 판이다. 이드는 한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말끝을 살짝 바꿨다.
“아, 아무래도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레오날도 후작 각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실까 말씀드리자면.. 후작이 어떤 분인지는 대충 알아요.”
혹시 이드가 후작에 대해 모를까 싶어 설명하려던 집사는 알면서 돌려보내라는 말이 나오느냐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참아야 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집사의 애타는 속을 모르는 이드는 문을 닫고 말했다.
“음, 뜻하지 않은 손님이 와서 일리나 이야기는 다음에 들어야겠어요. 일리나의 대련 이야기가 제일 기대됐는데.”
“괜찮아요.”
언제나 인자한 일리나의 말에 더해 라미아가 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가 듣고 나서 이야기해 줄게요.]
“응?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가야지.”
당연히 라미아도 함께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드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왜요? 후작이 찾는 건 이든데. 전 여기서 편하게 일리나 이야기나 마저 들을래요.]
과연 틀린 말은 아니다.
“흐아, 더 가기 싫어졌다.”
어쩐지 똑같이 일하고 자신에게만 추가 업무가 생긴 기분이다. 하지만 이드의 마음과 달리 문 앞에 선 집사의 마음은 급하기만 한지 문을 두드려 재촉했다.
“투정부리지 말고 다녀오세요. 전 이드가 올 때까지 기다려도 좋아요.”
이드는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일리나의 말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라미아와 수다가 끝나면 먼저 자요. 후작과의 만남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까요.”
똑똑똑!
“나갑니다!”
당장 똥 싸기 직전인 사람이 화장실을 두드리는 듯 다급한 노크 소리에 이드가 문을 열고 나갔다.
팔락팔락 날개를 흔들어 이드를 보낸 라미아가 말했다.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됐어요? 일리나의 대련만 남았잖아요.]
“제 대련보다는 케마란을 돌보는 게 먼저였어요. 그러니까………”
비록 이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힐끔힐끔.
레오날도 후작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과 그런 후작을 귀찮아하는 이드의 태도에 놀란 듯 집사는 이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주인인 카일란에게 이드를 대함에 최선을 다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제국 권력의 핵심에 있는 후작의 방문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그 명령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후작의 방문을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인물이라면 자신의 주인이 당부하고, 후작이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지만 굉장한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이 분명하다.’
집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앞으로 더욱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런 집사의 발언에 이드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관찰하며 말이 없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한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쁜 심보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잘 부탁합니다.”
집사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이드가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드에게 향했다.
방에는 두 명의 하녀와 벤 자작, 그리고 청수한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레오날도 후작이구나. 듣던 대로 젊네.’
이드는 자신을 보고 벌떡 일어선 벤 자작에게 걸어갔다.
“이렇게 빨리 다시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은근히 뼈가 있는 말에 벤 자작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푸근히 웃으며 말했다.
“이틀간 정이 들어 이드 님의 얼굴을 또 뵙고 싶지 뭡니까.”
“뭘요. 하하하.”
이드는 넉살 좋은 그의 말에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드나 벤 자작이나 두 사람의 신경은 아직 자리에 앉은 후작에게 가 있었다.
“그리고 저도 저지만, 제가 반한 이드 님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뵙고 싶다는 분이 있어 이렇게 빨리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인사하시지요. 레오날도 울 그린 후작 각하이십니다.”
벤자작이 한 발 물러서고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대단함을 들어서인가 작은 동작에도 품위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명성 높은 후작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드입니다.”
“나야말로 현 그레센을 진동하고 있는 유명인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소.”
벤 자작은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을 보며 은근한 우월감에 취했다. 이 두 유명인의 은밀한 첫 만남을 누구도 모르게 자신이 주선하고, 또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꼈다.
일반 귀족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이 맛에 내가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니까.”
벤 자작이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된 사이, 집사의 손짓에 따라 이드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하녀들이 자리를 비우고 방에는 온전히 세 사람만 남았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중에도 레오날도 후작은 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보면 레오날도 후작의 성적 성향을 의심할 정도로 뜨겁고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이드는 태연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호로로록-
쌉싸름하고 은은한 향에 콜라로 달달하던 입안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드가 말했다.
“그만 좀 보시죠. 그러다 제 얼굴에 구멍 나겠습니다.”
“쿠훕!”
과연 두 사람의 첫 대화는 무엇일까 기대하고 있던 벤 자작은 퉁명스런 이드의 말에 놀란 기침을 겨우 눌러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