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5화
692화
이그렌은 담배 연기 속에서 번뜩이는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탁자 아래 숨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담배를 물고 당연하다는 듯 기다리는 모습이 분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언급하는 사무엘의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내성이라면 백작 일가가 생활하는 곳인데…………… 언제, 왜 거기로 옮긴 거지?’
누추하다 어떻다 하지만 어차피 백작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인질일 뿐이다. 내성의 경비가 대단하다고 해도 인질을 잡아 두기에 내성은 적당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그런 이그렌의 속을 읽은 듯 사무엘이 느릿하게 말했다.
“자작은 본가의 중요한 손님이야.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약속하지.”
“감・・・・・・ 사합니다.”
정말 감사할 일일까? 이그렌은 말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었다. 중요한 손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백작가에 억류된 인질 신세라는 점은 여전하다.
“우리 시작이 별로 좋지 못했지?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이제야 이드를 통해 사실을 알았지만, 초대 자작의 무공으로 인해 내 가문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던가. 오랜 시간 쌓인 가문의 분노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네.”
‘서로 빤히 아는 일을 두고 어디서 개소리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이그렌의 감상이었다. 초대 자작의 무공으로 고초를 겪어? 따지고 보면 그 일은 결국 그레이의 무공을 백작가의 이름으로 왕국에 바치려다 생긴 자업자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해가 풀렸고, 또 우리가 목표로 했던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까지 얻게 되었으니 서로 경계하기보다는 화합해야 할 때야. 그 일환으로 자작의 대우를 바꾸었네. 자네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렇습니까.”
이그렌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 의미에서 귀족의 일에 무지한 자네에게 충고하지. 우리가 제국의 수도에 있음을 기억하게. 단순히 구경을 온 것이 아니야. 당장 내일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 나설 수도 있어. 이 밤에 레오날도 후작이 다녀간 것만 봐도 그러네. 우린 정말 대단한 인물의 줄을 잡은 거야. 제국 귀족들과의 끈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아나? 자네는 이드라는 끈만 잘 잡고 있어. 나머지 기름칠은 내가 할 테니까. 그렇게만 하면 본국에 돌아가서 자네와 나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거야. 단숨에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지. 하하하, 내가 자네를 이드와 만나게 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어!”
사무엘은 자신의 말에 도취한 듯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그렌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심 어이가 없었다. 우리라니? 언제 그와 자신이 한편이었던가? 인질과 인질범이 한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방금도 버릇처럼 아버지를 언급하며 자신을 압박했다는 사실을 그사이 잊은 게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리 뻔뻔할 수 있는 거지? 과연 저런 놈을 굳이 살려 둬야 할까?’
이그렌은 사무엘을 죽이겠다는 이드와 에단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살인이라는 거부감과 왕국의 백작을 죽인다는 말이 두려워 거부했었다. 비록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재산을 잃어 작은 마을의 촌장이나 다름없었던 그에게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백작이라는 고위 귀족을 말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용병이나, 그저 자신의 앞길을 방해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귀족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권유가 무척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인질을 잡아 협박하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고 마치 한편인 듯 껄껄 웃으며 인생에 대한 충고와 미래의 꿈을 이야기한다.
‘이러다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아버지를 잡고 협박하겠지.’
과연 귀족은 이렇게 때에 따라 휙휙 태도를 바꾸는 자들인가 싶었다. 이런 자를 살려 두고 같은 땅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이자를 죽이고 깔끔하게 처리해 준다고 할 때 그러자고 할 걸 그랬어…
“하하하, 뭘 그렇게 보나. 자네도 기뻐하라고. 우리 앞길은 이제 탄탄대로란 말일세!”
사무엘은 이그렌이 이드의 검에 자신의 목이 떨어지는 상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이 어찌 위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껄껄껄!”
그러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의 위대함을 소리 높여 칭송한 사무엘은 모를 것이다.
그 위대한 인물이 어두운 방 안에서 처량한 표정으로 녹화 영상을 보며 홀로 팝콘을 씹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길어진 이드는 레오날도 후작을 배웅하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은근히 일리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다. 먼저 자라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방안은 캄캄했다.
정지된 일리나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이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했던 일리나의 모습이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실시간으로 연결된 모습은 아니다.
그뿐 아니었다.
색- 색-
침대 위 베개 중 하나에 올라 귀여운 숨소리를 내쉬며 잠이 든 라미아도 있었다. 설마 일리나 뿐 아니라 라미아까지 먼저 잠들었을 줄이야. 이드가 처음으로 늦은 잔업을 마치고 돌아온 가장의 고단함과 고독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잘 자네.”
아쉽긴 했지만 차마 먼저 잠든 라미아를 깨울 수 없어 입맛을 다시던 이드의 눈에 일리나가 비친 거울에 붙어 있는 쪽지가 들어왔다. 거기에는 ‘너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일리나의 영상을 녹화해 남겨 두니, 괜히 자신과 일리나를 깨우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녹화 영상이나 감상하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이드가 홀로 팝콘을 씹게 된 이유였다.
조용히, 또 한편으로는 열심히 일리나의 이야기를 듣던 이드는 문득 가려워진 귓구멍을 후볐다.
“아우, 가려워.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나?”
이드는 문득 말을 하고 보니 웃음이 났다. 당장 좀 전 돌아간 레오날도 후작을 비롯해서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과 초인들까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실로 많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시온 숲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도 참 열심히 돌아다녔구나. 난 조용한 시온 숲이 좋은데 말이야. 시르피, 넌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아직 시르피의 행방에 대해 무엇 하나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작게 한숨을 내쉬던 이드는 계속되는 일리나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계속해서 가려운 귀를 후비면서.
우우웅-
황금색 빛 무리 속에서 라울이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라울 님.”
그에 기다렸다는 듯 일단의 남자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 가볍게 답한 라울이 사내들 중 가장 앞에 선 자를 보며 말했다.
“고생한다. 변동 사항은 없나?”
“없습니다.”
언제나와 같은 답을 들은 라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사내들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라울의 말에 대답했던 사내가 그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검후는 여전히 대답이 없고?”
“아무런 글도 적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구사항이 있다면 적어 보내라며 식기와 함께 종이를 넣지만, 매번 빈 종이만 돌아올 뿐이었다.
“직접 대화를 시도해 보진 않았지?”
라울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사내가 처음으로 망설이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수준으로는 너무 힘든 일이라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난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보다………… 어때? 여전히 정열적이신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수하의 말이었지만 라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검후를 협박, 회유하기 위해서 나섰던 자들 중 아홉이 죽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열흘에 한 번씩 공간 능력자들이 천국의 방 구조를 약화시켜 검사를 할 때면 귀신같이 그 부분을 파악해서 반응합니다. 덕분에 공간 능력자들은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시험을 하는 순간마다 공간을 떨어 울리는 천둥 같은 폭음과 진동을 떠올리고는 꼴깍 침을 삼켰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힘이 있어야 현실 공간과 분리된 공간을 넘어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로 인해 사내를 포함하여 검후를 감시하고 있는 자들은 검사 때마다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로 누가 갇힌 사람이고 누가 감시하는 사람인지 분간이 힘들 때가 아닐 수 없었다.
‘저건 검후 같은 얌전한 것이 아니라 괴물이야, 괴물.’
사내는 빨리 이번 임무가 끝나기만을 바라며 부르르 떨었다.
라울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울도 그가 검후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겁이 많기 때문에 조심에 또 조심을 더하는 신중함을 지니고 있어 검후를 지키는 일을 맡겼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상대는 검후, 어쭙잖은 힘자랑이나 우월감에 실수하는 놈보다는, 덜덜 떨면서 최대한 실수하지 않는 겁쟁이가 더 낫다. 어지간한 자들은 검후를 만나는 순간 죽는다. 결국 이곳을 지키는 자들이 할 일은 실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 사이 조용히 계단을 오른 사내와 라울이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색 문 앞에 섰다.
“들어간다. 문 열어.”
라울의 명령에 침을 삼킨 사내가 목에 걸린 길쭉한 끈을 풀어냈다.
그는 올 때마다 매번 위험한 인물인 검후와 직접 대면하는 라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상사 짓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야.’
사내는 끈에 걸린 열쇠를 검은 문의 구멍에 넣어 돌렸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자 사내는 열쇠 안에 숨은 두 번째 열쇠를 분리해서 두 사람이 서 있는 반대쪽 벽의 틈으로 찔러 넣어 돌렸다. 슈루루룩.
열쇠가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검은 문이 차츰 투명해지며 내부를 비추기 시작했다.
새하얀 방과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세 바퀴를 돌린 사내가 열쇠를 멈추고 말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라울은 고개를 끄덕이고 불투명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질척-
라울은 전신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숨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매번 문을 통과할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지만, 여전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꼭 굳은 핏물에 몸을 담그는 느낌이란 말이야.’
당연히 라울에게 그런 경험은 없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강렬한 광경을 본 적이 있어 문을 지날 때면 생각이 났다.
‘확실히 성능은 좋은데………… 이번에 돌아가면 이 감각만 어떻게 고칠 수 없는지 알아봐야겠군.’
그가 생각하는 사이 질척이는 느낌이 사라졌다.
번쩍.
동시에 날카롭게 눈을 번뜩인 라울의 눈에 온통 하얀색으로 물든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과 천장, 탁자와 침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새하얀 공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단숨에 눈에 띄었다.
하얀 방과 반대되는 검은색의 반바지와 가슴만 겨우 가리는 짧은 상의를 입은 여성.
하얀 의자에 앉아 지긋이 라울을 노려보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서는 민망한 옷차림이 무색하게 고고하고 당당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여성의 모습을 확인한 라울이 한 손을 가슴 아래로 늘어트리며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검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