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0화
697화
[흐음, 저 사람이 레오날도 후작이에요? 듣던 것보다 더 젊네요?]
저 젊은 인물이 현재 제국 권력의 핵심이다. 라미아의 감상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 이드가 후작을 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손님이 많아 바쁘실 텐데 일부러 찾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허허, 내 손님이 아닌데 내가 바쁠 일이 있겠소? 나보다는 곧 경이 바빠지겠지.”
큰 걸음으로 다가온 후작이 창밖의 귀족들을 살피며 말했다.
“대단하지 않소? 저 많은 귀족이 모두 경을 보기 위해 모였으니 말이오. 그리고 어서 오란 환영 인사는 내가 해야 하지 않겠소? 어떻소, 제국의 황성에 든 소감이 말이요.”
“그저 대단할 뿐입니다. 크기나, 화려함이나, 웅장함이 제국의 것답게 부끄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이 방의 맑은 향입니다. 화려한 방은 많아도 향이 좋은 방은 드물거든요.”
“향기라니. 굉장히 섬세한 취향을 가졌구려. 그렇다면 아마 황궁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오. 황궁 곳곳이 이처럼 향기로우니까.”
“그럼 갈 때 향기만 좀 얻어 가야겠습니다.”
“허허허, 나중에 황녀 전하께 부탁드려 보시오. 한데 같이 온 이들은 누구요?”
이드와 인사를 겸한 가벼운 대화를 마친 후작이 그제야 한쪽에 굳은 듯 서 있는 두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드와 후작이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살짝 놀라고 있던 사무엘은 후작이 자신을 보고 묻자 최대한 조심스럽게 귀족의 예를 갖추었다.
“저는 일리나스 왕국의 백작, 사무엘 잭 댑슨이라고 합니다. 대아나크렌 제국의 레오날도 후작 각하를 직접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오, 백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오. 이번에 행동이 참으로 빨랐다지? 어쩌면 이번 일로 승작을 할 수 있겠소이다.”
사무엘은 예상치 못한 후작의 말에 눈알을 살살 굴리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참으로 기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허허허, 기대하겠소.”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드는 내심 실소가 흘렀다. 자신이 듣기에 후작의 말은 조롱에 가까운데, 사무엘은 감사하단다. 과연 진심일까? 아니면 상대가 후작이라 말을 못하는 것일까?
그때 후작의 시선이 이그렌에게 향하자 그가 굳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일리나스 왕국 시온 자작가의 이그렌입니다. 후작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 반갑군. 백작에 대한 일과 함께 자네에 대해서도 내 들어 알고 있네. 오랜 고생 끝에 참으로 고마운 기회를 얻었다지?”
“예, 예! 그렇습니다.”
실로 의미심장한 물음에 이그렌과 사무엘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특히 사무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는 후작이 자신과 이그렌의 관계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안했다.
특히 자신이 시온 가문을 괴롭힌 일은 유명하지도 않지만 철저하게 감춘 비밀도 아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잘 감추었겠지만, 어디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대에 이드가 나타날 거라고 말이다.
만약 후작이 알아보려고 했다면 쉽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설마 후작이 알아봤다고 해도 그 사실을 이드에게 말하지는 않겠지?’
사무엘은 만약 이드에게 진실이 전해질 경우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당장 이후에 황제가 시행하는 검증을 마친 후 이드가 얻을 영향력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곤란하게도, 곤경에 처하게도 만들 수 있었다.
과연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드에게 시온 자작이라는 인질이 통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승작할 수 있겠다는 후작의 말이 새삼 뜻깊게 느껴져 사무엘은 이그렌 옆에서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귀족의 모습에 라미아가 혀를 내둘렀다.
[와, 저 후작 보통이 아니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그러게. 내가 뒤에 사실을 알면 어쩌려고?”
[몰랐다고 하면 끝인 일이잖아요. 전 오히려 이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러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후작의 속셈을 추론하는 이드와 라미아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후작이 다가와 말을 건넨 탓이다.
“저 두 사람은 따로 말해 대전에 들 수 있도록 하겠소. 아마 일리나스 쪽의 귀족들도 와 있을 테니, 그쪽에 어울리도록 하면 되겠지.”
“타국의 귀족들도 와 있습니까?”
“오늘 일은 알려질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소?”
“오는 길에 단두대가 설치된 것을 보았습니다만, 제가 거기에 서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야 경 하기 나름이 아니겠소? 하하하, 농담이오. 그 단두대는 이런 일이 있으면 항상 세워지는 것이라오. 신경 쓰지 마시오. 나는 경이 검증을 통과할 것이라 확신하니까.”
이드는 더 불만을 말하고 싶었지만, 확신이 가득한 후작의 말에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 경은 나와 조용히 이야기를 좀 나눕시다.”
“아, 어제 이야기의 마무리입니까?”
이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작을 따라 방을 나섰다. 이드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던 사무엘도 후작이 함께한 자리에는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이지만 워낙 방 하나의 크기가 커서 문과 문 사이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방문이 닫히자 후작이 앉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경이 원하는 바를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소.”
“그렇군요. 후작님께서 잘 말씀드려 주신 덕분이겠지요.”
이드가 슬쩍 후작을 띄워 주자 후작이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제 그렇게 당당하게 할 말 다하던 사람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려. 한데 만약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어쩔 생각으로 입궁한 것이오?”
“어쩌긴요. 그대로 돌아가면 그뿐인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렇지만 충분히 허락할 거라고 예상했다. 황제도 후작도 잃을 것이 없는데, 거부할 리가 있나. 하지만 이드는 굳이 그런 점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드는 허탈하게 웃는 후작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그 말 외에 더 말씀하실 건 없습니까? 겨우 그것 때문에 따로 보자고 하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황제의 허락을 ‘겨우’라고 말하는 이드를 보며 후작은 포기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마주 앉았다.
“오늘 알현 후에 자네에게 있을 검증이 이전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까다로워질 것이오.”
“한 줄 외우나, 열 줄 외우나 다를 게 없지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까다로워진 것은 황제 폐하의 뜻에 순순히 따르지 않은 괘씸죄가 적용된 탓입니까?”
“끄응, 내 어지간하면 지적하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 경은 황제 폐하 앞에서만이라도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이오.”
이드는 이마를 짚는 후작의 모습에 낭랑하게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장 후작님이 제 말을 받아 주실 걸 파악하고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섭군요. 제가 알기로 괘씸죄는 죄 중에서도 특히나 무서운 죄인데 말입니다. 특히 뒤끝이 굉장히 길어서 어지간히 끝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이드가 은근히 여운을 남기면서 말했다.
후작은 그것이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후작과 황제에게 경고하다니. 그 어이없는 배짱과 과격함에 기가 막혔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드가 검증을 거친 후에도 이런 관계가 이어지면 서로만 곤란할 뿐이었다. 특히 검증 후 본격적으로 후예의 이름을 팔아 기사들의 마음과 믿음을 사려는 황제의 계획도 틀어지고 만다.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그리고 검증 후에 황궁에서 경의 이름이 몇 차례 입에 오를 예정이오.”
이드가 눈을 번뜩였다. 후작의 말이 그저 유명인을 언급한다는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분명 자유를 원했는데요.”
“조건이 바뀌는 것은 아니네. 다만 경이 소드 팰러스가 아닌 우리 쪽 사람이라는 것은 확인해 주어야지 않겠소. 그것이 불가하다면 경은 아까 말한 대로 당장 돌아가야 할 것이오.”
그 말에 이드는 턱을 고아 생각을 정리한 후 라미아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저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소드 팰러스에서도 이드의 이름을 대놓고 쓰지만 않았을 뿐이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사방에다 나팔을 불었잖아요. 이쪽은 예고까지 해 주니, 이 정도면 양반이죠.]
사실은 초인파 쪽에서 손을 쓴 일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드와 라미아로서는 소드 팰러스를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라미아의 생각을 확인한 이드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드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먼 길을 왔는데 구경만 하고 돌아갈 수는 없지요. 적정선만 지켜 주세요, 적정선만.”
“경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는 없을 거라 약속하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드는 따로 그 내용을 증거로 남겨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드에게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황궁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허튼짓하면 지금 영상을 그대로 까 버리면 되지. 안 그래?’
[당연하죠.]
이드가 턱 아래 깃털을 살살 긁자 라미아가 대답했다. 이 현장이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후작이 불쾌해하겠지만, 이 세계에는 녹화가 불법이라는 법도 없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럼 이야기는 끝난 거지요?”
“그렇소. 머물던 방으로 돌아가겠소?”
“그래야죠. 아무래도 제가 새로 알아야 할 황궁 예절도 있다니까 말입니다.”
이드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복도로 나온 이드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기 전 후작이 말했다.
“아, 그리고 경의 복장 말인데, 지금 그 차림으로 황제 폐하를 알현할 생각이오?”
“집사가 신경 써서 준비해 준 옷입니다만, 이상합니까?”
이드는 한쪽 팔을 들어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 옷은 집사가 이드의 취향을 살펴 새벽같이 수도를 뒤져 구해 온 옷이었다. 깔끔하고, 쓸데없이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검은색의 정장.
무엇보다 가격이 제법 된다는 사실이 믿음직스러웠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은 귀족들이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 즐겨 입는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는 않네. 다만 경의 검증을 보기 위해 모인 귀족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면 하기 때문이오. 괜찮다면 내가 적당한 갑옷을 준비해 주겠소.”
후작은 황제에게 검증을 받는 이드가 좀 더 강하고 화려하게 보이길 원했다.
“갑옷이라………….”
[갑옷보다 이전에 리폼해 두었던 장포가 신비한 느낌도 나고 어울릴 것 같아요!]
이드가 고민할 때, 지금까지 영혼을 통해 이드하고만 이야기하던 라미아가 목소리를 내고 나섰다. 이드의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만있지 못한 것이다.
“호오.”
갑자기 입을 연 라미아를 보고도 후작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미아를 살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장포가 무어냐?”
[장포가 뭔지 대답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초면에 왜 반말이세요?]
“내게 반말을 듣는 것이 기분 나쁘더냐?”
[그럼 좋겠니?]
“허허허허!”
톡 쏘는 라미아의 반말을 들은 후작은 껄껄 웃더니 라미아와 서로 반말을 쓰기로 합의를 보았다. 후작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고작 에고를 가진 물건에 존대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이렇게 뛰어난 에고와 대화하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식욕이 왕성한 후작에게 생명체가 아닌 에고와의 대화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관계가 정리되자 라미아가 장포에 대해서 말했다.
[장포는 이드가 입던 전통 복장이야. 제국에서는 낯설겠지만 화려하고 멋지니까 원하는 효과는 충분히 낼 수 있을걸?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갑옷보다 낫다고 장담해.]
작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감을 보이는 라미아의 말에 흐뭇하게 듣고 있던 후작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기광이 스쳤다.
‘전통 복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