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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64화


701화

입장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황녀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여기사가 대전에 들어섰다.

“오오……!”

귀족들 사이에서 기쁨이 담긴 탄성이 작게 터져 나왔다. 주로 젊은 남자 귀족들의 소리였다. 당연했다. 황녀의 등장이었으니까. 특히 빼어난 그녀의 미모가 남자들의 탄성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여자에게 반응하는 것은 남자의 본능. 그들은 황녀를 아름답게 낳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예쁘게 기른 유모와 시녀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아바마마의 명을 받아 밀리아리아가 왔습니다.”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 선 황녀가 자색 드레스를 잡고 어여쁘게 상체를 숙였다.

황녀는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뒤이어 귀족들을 향해서도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제국의 영웅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어 기쁘군요.”

“밀리아리아드 아이넬 아나크렌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아름다운 황녀의 미소에 얼굴이 풀린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게 올리던 인사와는 달리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특히 황녀의 이름을 유독 강조하여 크게 외치는 젊은 귀족들의 모습에 몇몇 곳에서 웃음이 났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모습을 따로 책잡지 않았다. 황녀를 향한 치기 어린 연심이야 충분히 귀엽게 보아 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리 오너라, 밀리아리아. 오늘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

황제의 부름에 황녀가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겨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래, 믿고 있단다.”

황제는 입술을 꼭 문 딸의 모습이 귀여운지,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실에서는 이번 검증에 마인드 마스터가 검후께 선물한 무공을 사용하려 한다. 이는 무공의 내용에 대한 문답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문답은 나의 딸 밀리아리아가 하게 될 것이다.”

사실 검증을 누가 나서서 하건 오로지 황제의 뜻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황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레오날도 후작이 나섰다.

“황제 폐하, 황녀께서 검증을 주관하시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사오나, 대전에서 검증을 하게 된다면 일부나마 황실 보물의 내용이 알려질까 염려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어라? 저거 내가 어제 했던 말인데. 설마 아직 황제에게 전하지 않았다고?’

이드는 미묘한 표정으로 후작을 살폈지만,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서 저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후작의 말을 깨달은 귀족들은 후작의 등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아니, 저 양반이 미쳤나. 이 좋은 기회를 왜 틀어막아!’

‘이래서 무공도 모르는 책상물림은 안 돼!’

단편이지만 황실이 보물처럼 아끼는 검후 무공의 일부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후작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것이니 당연했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지금 세상에 알려진 무공의 모태가 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그 가치는 보물이라는 말이 전혀 아쉽지 않은 대단한 것이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운 좋게 배움을 얻어 갈 수도 있을 기회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의 마음에 아쉬움을 남긴 이 말은 황제와 후작에 의해서 미리 계산된 것이었다.

사본을 들고 이드를 방문했던 후작은 이드에게 사본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그것을 황제에게 고했다. 가볍게 생각했던 사본의 가치에 황제는 깊이 생각하여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생각을 꺼내 들었다.

“후작의 충언은 옳소.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황실을 향한 그 충심을 잠시 접어 두어도 좋소.”

“하오면?!”

황제의 말은 귀족들에게 어쩌면 하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말은 그들의 기대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렇소. 짐은 오늘까지 제국을 위해 힘써 온 경들에게 이렇게나마 작은 선물을 주려 하오. 물론, 각자 어떠한 것을 얼마나 얻어 갈 수 있을지는 개개인의 능력에 달린 것이겠지만. 그래서 기대된다오. 경들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 줄지 말이오.”

즉, 듣는 것뿐 아니라 듣고 깨달은 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떨어졌다. 기대치를 넘치도록 채워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 폐하의 은혜로움에 감사드리며,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귀족들이 감동한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중 홀로 서 있는 이드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헐! 정말 공개하겠다고? 배포가 큰 거야, 뭐야?’

이것은 개인이 개인에게 자신의 무공을 알려 주는 것과는 질이 달랐다.

현 그레센 대륙에서 무공이란 권력에 직결된 힘이었다. 비록 온전한 형태의 공개가 아니라 해도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댐이 작은 구멍에서 시작하여 무너지듯, 짧은 무공 구결이 작은 구멍이 되어 황실의 무력을 위협할 정도로 자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물론 황실 무공인 난화십이식의 진짜 주인인 이드로서는 신공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난화십이식 같은 무공이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세상일에 절대란 없는 법이다.

‘하지만 황제씩이나 되면서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뭔가 방법이 있거나, 목적이 있는 거겠지.’

정치인에게는 먹고 자는 것도 정치라고 했다. 저런 대단한 발언에 정치적 목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러나 제국의 귀족도 아닌 이드가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또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귀족들이 열렬히 반기는 가운데 검증이 시작된 때문이었다. 황제의 허락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중에는 평소 지니고 다니던 펜과 종이를 꺼내 손에 든 자들도 있었다.

“혹시 남는 종이와 펜이 있소?”

그에 빈손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어느 자작이 물었다.

“없소.”

당연하다. 필기구를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귀족이 품에 필기구를 지니고 다니는 것만 해도 범상치 않은 준비성이다. 단호한 대답에 자작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그럼 혹시 이후에 필기한 것을 내게 보여 줄 수 있겠소?”

“흣, 자작 같으면 보여 주겠소?”

당연히!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

이미 정해져 있는 답에 자작은 할 말을 잃었다. 급한 마음에 꺼낸 말이었지만 바보 같은 부탁이었다. 오늘 대전에서 얻어 갈 무공의 구결은 자신과 가문의 힘으로 직결될 수 있는 물건이다. 어느 귀족이 보물과 힘을 나누겠는가!

하지만 그래서 더 포기할 수가 없다. 이후 자작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정했지만, 그에게 무언가를 내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록 마법을 가진 마법사조차 대전에서는 마법이 금지되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잇, 나쁜 놈들.”

으드득 이를 갈아 댄 자작은 공부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아쉬운 사실은 그가 어린 시절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다는 것이다.

애가 타는 귀족들과는 상관없이 검증이 시작되었다.

“책을 다오.”

황제가 서 있던 단상에서 한 계단 내려선 황녀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여기사가 그때까지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황금색 상자를 들어 올리며 황녀 앞에 무릎 꿇었다.

가슴 높이로 받쳐진 상자 위에 황녀가 손을 선언하듯 말했다.

“밀리아리아 드 아이넬 아나크렌의 명이다.”

황녀의 말과 함께 상자의 네 귀퉁이가 미미하게 진동하더니 상자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황녀의 손바닥으로 모여들었고, 다음 순간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상자를 열자 한눈에 보아도 최고의 장인인 만든 고급스러운 책이 나타났다.

[저게 후작이 가져왔다던 사본의 진본인가 본데요?]

‘이런 자리에 사본을 들고나오지는 않았을 테니 그렇겠지.’

라미아의 말에 답한 이드가 황녀를 살피다 마침 눈이 마주쳤다. 생긋하고 반달을 그리는 황녀의 눈에는 호기심과 호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녀는 곧 책을 펼치며 고개를 숙였다.

이드는 그 모습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과연 저 황녀가……………..’

[황녀가 뭐요?]

뭔가 찝찝한 여운을 가진 이드의 생각을 읽은 라미아가 즉각 반응했다.

‘별건 아니야. 후작이 황실의 가족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고. 그 상대가 앞에 있는 황녀 같은데.’

[뭐예요?! 아니, 언제 그런 일이! 후작 저 사람 안 되겠네! 임자도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이 따로 있지!]

흥분한 라미아가 이드의 목에서 꿈틀거렸다.

‘흥분하지 마. 단박에 거절했으니까. 그리고 저 황녀를 여기 세운 것도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아니라고요?]

당연히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라미아가 의아해하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황녀, 아무래도 난화십이식을 수련 중인 것 같아. 아,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이드의 말과 동시에 검증의 시작을 알리는 황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바마마의 명에 따라 지금부터 검증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검증받기 위해 나선 이드여, 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언제든, 어떤 질문이든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다. 마인드 마스터가 검후께 남긴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디딜 때는 노도처럼 거칠어야 하고………….’ 이후를 말하라.”

한 톨의 긴장도 보이지 않는 평이한 이드의 말이 끝나자 황녀가 책의 한 구절을 읽어 내리다 멈추었다. 그 뒤 이드가 끊어진 나머지 부분을 외웠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거두어들임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내려앉는 눈처럼 가벼워야 한다.’입니다.”

“정확하다. 다음 구결을 말하겠다. ‘비혼(悲魂)의 비는 내력의 흐름에 대한 것으로…………….’ 다음을 말하라.”

“그 뒤는…….”

검증 문구는 차례도 없었다. 책의 뒤쪽에서 나오기도 하고, 다시 앞쪽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거니 받거니 황녀가 묻고, 이드가 답하기를 한참. 이드가 서른다섯 번째의 답변을 끝내자 황녀의 다음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정작 검증을 받는 이드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같이 조금만 더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감히 황녀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황녀의 질문을 기다리던 이드가 물었다.

“검증이 끝난 것입니까?”

“준비했던 서른다섯 개의 질문이 끝났답니다.”

어느새 질문에 답하는 황녀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온전한 하대가 아니라 어여쁜 존대로.

“준비된 질문은 끝이 났지만 허락하신다면 마지막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 싶군요.”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들어온 부탁에 라미아가 발끈했다.

[저, 저게 지금 어디서 꼬리를 쳐!]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드는 애써 라미아의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책에는 적지 않았지만, 마인드 마스터가 검후께 남겼던 말이 있습……”

황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드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했지요. 귀여운 공주님, 이 무공이 멋진 날개가 되어 줄 테니, 마음대로 날아 보세요.”

이드가 시르피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던 당시를 추억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녀는 울컥 치미는 감격에 살짝 몸을 떨었다.

“정확히 검후께 들었던 말씀대로예요. 아바마마, 검증을 마쳤습니다. 그는 마인드 마스터, 우리 제국 영웅의 후예가 맞습니다.”

황녀의 말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리아리아. 너의 검증은 내가 보았고, 대전의 모든 귀족들이 보았노라. 검증을 통과한 이드는 영웅의 후예가 맞다. 모두 영웅의 후예를 환영하라!” 

양팔을 펼친 황제의 선언이 떨어지자 귀족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만세를 외쳤다.

“아나크렌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녀 전하께 영광윤!”

“돌아온 영웅의 후예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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