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268화


705화

다음날, 이그렌은 정오가 되어서야 고개를 숙이고 나타났다. 그것도 이드의 명령을 받은 하녀가 데리러 가서야 겨우 방에서 나온 것이다. 

“술에 취해 후작님께 추태를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모양에 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기절시키는 것도 모를 만큼 취해 놓고 실수한 건 기억하나 보지?”

물론 취하지 않았더라도 이그렌은 이드가 수혈을 점하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죄송합니다.”

이그렌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보통 그와 같이 주사가 심한 경우, 취했을 때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설령 기억하고 있더라도 일부러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 두고 싶어 한다. 왜? 뒷감당이 어려우니까.

기억하지 못하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곤란하다. 그런데 이그렌은 그런 꾀도 부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이그렌에게 따로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술이 과해 실수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괜찮아. 대신 난 너하고 같이 술 안 마신다.”

“예? 아, 예…….”

이드는 어벙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이그렌에게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속이나 풀어.”

“감사합니다.”

이그렌은 어정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 앉아 하녀가 가져다주는 묽은 수프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릇이 비어 가는 것에 비례해 꺼칠하던 그의 얼굴이 살아났다. 그릇이 반쯤 비자 제대로 정신이 드는지 이드와 라미아를 제외하고 비어 있는 자리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식사는 저희 둘뿐입니까? 백작은…….”

“왜, 안 보이니 걱정이라도 돼?”

“끔찍한 말씀 마십시오. 제가 그자를 걱정하는 일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없을 겁니다.”

이드의 말에 이그렌이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말을 더했다.

“항상 후작님 주변에 붙어 있을 것 같던 자가 마주 앉아 식사할 수 있는 좋은 때에 보이지 않으니 궁금했습니다.”

“백작은 아침 일찍 일리나스의 공관으로 갔어. 상의할 일이 있다나?”

“아, 그럼 벤텀 백작과 만나는 모양이군요. 아마 후작님에 대한 일 때문일 겁니다.”

이드는 그 말에 수저를 놓고 이그렌을 바라보았다.

“알아?”

“네. 어제 제가 술을 마신 것도 벤텀 백작이 있는 공관에서였습니다. 후작님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묻더군요.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는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이드는 급히 더하는 이그렌의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는 것이 적은 이그렌이 실수를 해 보았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모여서 내 이야기를 했단 말이지. 뭐라는데?”

“대중없었습니다. 제가 후작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해 달라는 식이더군요. 사무엘 백작이 그걸 이용해서 적당히 이권을 약속받는 것 같았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지만, 그 수단은 배워 둘 만하다 싶었습니다.”

“하하, 술에 취해 놓고 그런 머리도 돌아가고, 제법인데?”

이드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어 보이자 이그렌이 쑥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집사가 반짝이는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눈처럼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후작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또요?]

라미아가 잔뜩 질린 목소리로 부리를 딱딱거렸다. 이드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대장의 주인은…….”

“아아, 굳이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앞서와 같이 거절해 주세요.”

“그럼 그렇게 전달하고, 초대장은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조용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이그렌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물었다.

“후작님을 초대한 거라면 제국의 귀족일 텐데, 그렇게 확인도 안 하시고 거절하셔도 괜찮은 건가요?”

“음, 음.”

입에 음식을 담은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미아가 대신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초대장이 한둘도 아닌데 거기에 다 가려고 했다가는 몸이 백 개라도 모자랄걸? 아침부터 정신없을 정도라니까. 벌써 저렇게 날아온 초대장만 수십 장이야. 직접 방문해서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는 사람은 그 두 배고. 아마 집사가 문과 이드 사이를 오간 거리만 해도 안티로스를 두 바퀴 돌 정도일걸? 저녁에 따로 포션이라도 챙겨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

라미아의 말에 이그렌이 입의 떡 벌어졌다. 자신이 방에 틀어박힌 사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저택을 찾아온 것인가. 그는 어제 있었던 검증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괴, 굉장하군요. 제국 황제의 검증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런데 고위 귀족의 초대면 어쩌려고 초대장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듣지도

않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이드의 말에 정말 발신인을 말하지 않고 물러난 집사도 이상했다. 하위 귀족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이그렌의 추측은 라미아의 생각에 깨어지고 말았다.

[벌써 공작의 초대도 거절했는데 새삼 고위 귀족은 무슨. 오히려 공작의 초대를 거절한 만큼 다른 귀족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공작 이상인 대귀족의 초대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키킥.]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족을 제외한 공작 이상의 고위 작위가 있을 턱이 없다.

“고, 고, 공작 전하의 초대…………… 그거 거절해도 되는 건가요?”

공작의 초대를 거절했다는 말에 놀란 이그렌이 말을 더듬었다. 제국의 공작이란 이름만 해도 자작가의 소공자인 이그렌의 입장에서는 일리나스의 왕과 다를 바 없이 까마득한 존재였다. 백작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귀족에 가진 반감조차 무시할 정도의 고귀한 피를 이은 자.

사실 이드의 가치가 공작에 비해 절대 모자라지 않지만, 이드는 가까이 있고 공작은 멀리 있는 존재라서 이그렌의 감각이 살짝 비틀려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접시를 비운 이드가 입술을 닦고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아쉬울 것도 없고, 제국의 정계에 발을 담그고 공작과 얼굴 볼 사이도 아닌걸. 무엇보다 파티와 황제의 고심으로 기분 나빠하지 않게 적당히 포장했으니까 불만은 있어도 불쾌해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후작이라고. 공작에 크게 꿀릴 위치는 아니란 거지. 귀족 작위가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잘 받았다 싶어. 하하하.”

그 말에 이그렌이 못 말리겠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후작이라는 작위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대륙에 후작님밖에 없을 겁니다.”

“쯧쯧쯧, 그건 너무 단정적이야. 세상에 괴짜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을 그렇게 좁게 보지 마. 그러면 무공을 보는 시야도 같이 좁아질 뿐이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무공으로 넘어가자 이그렌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드의 이런 가르침이 짧다 하더라도 얼마나 큰 기회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과 무공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도.

이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손을 흔드는데도 공관의 귀족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던 이유가 바로 이드에게 무공을 배울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던가.

“시야. 넓은 시야를 가져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밥 먹는 중에 그렇게 진지해지지는 말고.”

물론 이그렌을 진지하게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오늘 수십 번 넘게 본 집사가 은쟁반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또……에요?”

“이번엔 방문 요청입니다. 후작님.”

“으으~!”

이드는 이제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팔로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그렌은 반밖에 남지 않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4번이나 더 집사가 접시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렇게 자주 사람이 찾아 왔다면 확실히 질색할 만하다 싶었다.

그렇게 이드가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모든 초대와 요청을 철통 방어하고 있는 사이, 수도는 뜻하지 않은 소문으로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다름 아닌 검증 당일 대전 앞에서 게일이 던져 놓은 폭탄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의 확인 결과 게일의 말처럼 소문은 존재했다. 그냥 두면 술안주로 흐지부지 사라질 이야기였다.

그러나 게일이 그 소문을 언급함으로써,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되어 끝날 소문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 논란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소문을 가장 예민하게, 또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의외로 기사들이었다.

폴럼의 주장대로 실력자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초인과 달리, 기사들은 이드의 실력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소문은 이전 사건에 대한 좋은 변명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인들은 기사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시끄러웠다.

온전히 기사 측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이드가 사실은 초인이었다? 그것도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을 꺾을 정도의 강력한 초인이었다니.

검증을 남의 잔치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초인들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늘 각을 세우는 기사 측의 힘이 줄고, 자신들의 힘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동시에 소문을 접한 초인들은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그가 초인이라면, 어쩌면 초인을 위한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을까?’

적지 않은 수의 초인이 초인기와 함께 무공을 수련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무공으로 초인기에 부족한 힘을 더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확실한 수련법이 정립되어 있는 무공과 달리, 초인기는 그 수련법이 정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 강해지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혀 효과를 보는 초인은 많지 않았다.

초인기로 인해 절실하지 않아 수련에 매진하지 않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초인이 익혔을 때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 무공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아 배우기가 힘이 든 것이다.

가까운 예로 에단처럼 익히고 있던 무공과 새롭게 각성한 초인기가 잘 매치되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법사 하일라이드의 논문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의 논문 제목은 ‘초인기와 무공 간 속성의 부조합으로 인한 결과’라는 재미없는 것이었다.

하일라이드는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 많은 초인들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동일한 무공을 익히게 했다. 그 결과, 무공을 익힌 초인은 크게 네 분류로 나뉘었다.

무공을 익혀 기사보다 강력한 무력을 손에 넣는 경우, 미미한 효과를 보는 경우,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 무공을 익혀 내상을 입어 몸이 상하는 경우로 말이다.

하일라이드는 이 중에서 몸이 상한 초인을 주목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분류와 비교 연구하여 결론을 얻었다. 바로 준비된 무공과 내상을 입은 초인의 초인기 속성이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무공은 무속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무속성의 무공도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미약하나마 한쪽으로 기울어 있기 마련인데, 이때 이 미약한 속성, 또는 초인기를 가지지 않은 무속성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무공이 가진 속성과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새롭게 가지게 된 초인에게는 해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초인이 무공을 적극적으로 익히지 못하는 이유가 나타난다.

대부분 무속성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무공의 미세한 속성을 밝히기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초인기 역시 효과만으로 단순히 속성을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무공과 초인기의 속성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결국 초인이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익히는 것은 순전히 운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일라이드는 논문에 자신이 그에 대해 연구해 밝히겠다고 선언했지만, 현재까지 전혀 진척이 없는 실정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도 강한 힘에 목마른 초인은 복권을 긁는 심정으로 벼락을 맞고 살아나기를 기도하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무공을 익힌다.

이런 상황에서 이드의 존재는 특별하다. 다른 무엇보다 대륙에 무공을 전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면 무공과 초인기의 속성에 대한 해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