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71화
708화
산 위에 간신히 걸려 있던 해가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완전히 넘어갔다.
해가 귀가하는 사이 대부분의 귀족들이 파티장에 모였다. 마법등이 밝혀진 황궁은 대낮보다 밝고 화려했다.
오랜만에 한데 모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오늘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평소 수도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사람도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사람들의 신경은 문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오늘 가장 보고자 하는 파티의 진짜 주인공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제 그 주인공이 등장할 때가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보자, 이제 슬슬 얼굴값 비싼 주인공이 나타날 때가 되었을 텐데?”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투덜거릴 때였다. 마치 그와 같은 자의 인내심에 시간을 맞춘 듯 시종이 큰 소리로 황녀의 입장을 외쳤다.
“아직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황녀 전하께서 먼저 입장하시다니?”
귀족들은 주인공보다 먼저 입장한 황녀의 존재에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족들의 머리 위로 시종의 소개가 다시 이어졌다.
“아나크렌 제국을 수호한 영웅이며 무공의 시조로 대륙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자, 제국의 네 번째 검왕이신 이드 예. 천. 화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낯선 이름이 틀리지 않도록 바짝 신경 쓴 시종의 소개에 고개를 숙였던 귀족들이 황녀가 입장하는 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주인공보다 빠른 등장에 이상하다 싶었더니, 설마 황녀가 이드의 파트너로서 에스코트 받으며 나란히 입장할 줄이야! 귀족들은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황녀와 함께 입장할 줄이야.’
‘게일 경의 처지가 참으로 미묘하게 되었구나. 이제 그가 아니라 새 후작을 주시해야겠다.’
하지만 눈치 없는 자는 다른 문제에 머리를 긁기도 했다.
“왜 작위를 밝히지 않는 거지?”
“쯧쯧, 자네는 저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밖에 안 드나?”
자신의 질문에 옆의 귀족이 답답한 듯 대답하자 말을 꺼냈던 귀족은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또 뭘 파악하지 못한 건가?”
“아니, 다행일세. 그보다 우리도 가서 안면을 트자고. 이러다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군.”
그의 말처럼 십 년 동안 헤어진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얼굴을 한 귀족들이 이드와 황녀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말이다.
하지만 황녀에 대한 예의로 적당한 거리 이상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 하나만으로도 도끼눈을 한 라미아를 달래고 황녀와 함께 입장한 의미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레오날도 후작의 요청이라고 했다.
‘하기야 황녀가 갑자기 같이 입장하자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지.’
보는 사람도 많은 자리인데 말이다. 후작이 요청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들었던 것이니까.
그래서 라미아도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좋은 것도 잠깐, 시종의 소개말에 아연한 이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할 뻔했다.
무공의 시조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으윽, 무, 무공의 시조?”
“대단하죠? 우리는 누가 인간에게 마법을 전했는지 몰라요. 처음 글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무공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 시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지 않을까요?”
황홀한 듯 감격을 숨기지 못하는 황녀의 모습에 이드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배운 것인데, 무공의 시조라니! 이건 도둑질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거 잘못 알고 있으신 겁니다.”
“네?”
“제국에, 아니 대륙에 무공을 알린 것은 마인드 마스터가 맞습니다. 하지만 무공을 창안한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마인드 마스터는 그들의 무공을 배웠을 뿐이죠.”
“아…….”
놀라운 사실에 황녀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마인드 마스터의 이야기. 황녀는 자신이 대륙인들 중 가장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감격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 입술이 들썩였지만 그런 황녀보다 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정확히는 시조보다 전달자에 가깝죠. 시조라는 말은 바꿔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빼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꼭!”
부탁이라기보다는 강요에 가까운 이드의 말에 황녀는 즉시 곁에 있는 기사를 불러 시조라는 말을 빼도록 했다. 황녀도 저 소개가 계속된다면
마인드 마스터가 타인의 무공을 빼앗은 파렴치한이 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지적할 사람이 없으니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당사자가 싫다는 데야.
“이런 실수가 생기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는 마인드 마스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요. 정작 그가 대륙에 알린 무공을 사용하면서도 말이죠.”
“그때 대륙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와 다시 떠올려 보아도 머문 시간에 비해 너무 진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래도 이제 후작님이 계시니 마인드 마스터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겠죠. 기대하고 있답니다.”
기대라. 하는 건 자기 맘이지만 자신이 그 기대를 채우길 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두 사람이 작게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장 깊이 들어가지 않자, 결국 주변에 있던 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하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 파트너로 있으셔서 그런가요?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황녀 전하.”
“그렇습니다. 두 분이 작게 속삭이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요. 옛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각각 콧수염이 멋진 중년과 반쯤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었다.
“부끄러운 말씀이에요. 베링건 후작님. 휘테커 백작님.”
황녀가 두 사람을 웃으며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역시 레오날도 후작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측근들이었기 때문이다.
황녀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이드에게 향하자 그에게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물꼬가 트이자 황녀 때문에 망설이던 자들이 서둘러 다가와서는 황녀와 이드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아, 황녀 실드가!’
이드는 한순간에 소용이 없어져 버린 황녀의 위엄에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었다. 파티의 목적 자체가 이드인데, 황녀 때문에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해서야 본말전도다. 무엇보다 이드의 가치는 황녀 못지않았다.
그렇다고 황녀에 대한 예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두 후작과 백작이 먼저 나서서 길을 터 주기까지 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게 소용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이드는 툴툴거리는 라미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부탁을 전했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일단 이 사람들 대신 기억해 줘. 한두 명도 아니고 정신없어 죽겠네. 한 번에 인사하면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그러나 사실 이드의 불만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제국의 수많은 귀족을 모두 기억하는 자는 없다. 그저 자신에게 필요하고, 득이 될 자만 기억할 뿐이다. 이드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드 주변의 인구밀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지구의 아프리카와 대한민국만큼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는 중에도 사람들이 계속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마치 먹이를 향해 모여드는 잉어들 같았다. 그리고 인구밀도가 대한민국에서 인도급으로 올라가려 할 때, 황녀와 이드의 입장을 알린 후 침묵하고 있던 시종이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황제의 입장을 외쳤다.
“대아나크렌 제국의 온당한 지배자이시자, 제국 신민을 지키는 가장 고귀하고 현명하신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와 함께 입장하십니다.”
황제의 등장에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왕좌로 향하며 이드 주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여겨본 황제는 곧 파티장을 채우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일어들 나시오.”
황제의 명령에 모두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오늘 뜻깊은 축하 파티는 즐기고 있소?”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잘 즐기고 있사옵니다.”
“좋구려. 검증 때보다 많은 귀족들이 파티에 참석하여 참으로 기쁘오.”
흡족한 미소를 보인 황제의 시선이 귀족들 중앙에 서 있는 이드와 황녀에게 향했다.
“오! 파티의 주인공이 저기 있군. 밀리아리아, 그리고 이드는 가까이 오라.”
황제의 부름에 앞으로 나간 이드는 황제와 나란히 선 황후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황제와 달리 수수하고 순종적인 인상이네.’
젊은 나이에 열정적으로 보이는 황제라서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세력의 황후를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로 보아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외척에 의한 권력 누수를 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문득 황제의 가족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런 이드의 잡념이 더 이어지기 전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파티는 즐거운가?”
“배려해 주신 덕분에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옆에 파트너는 마음에 들고?”
장난기가 묻어나는 황제의 질문에 이드가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아내와 떨어진 외기러기 신세를 구해 주신 황녀께는 감사할 뿐입니다.”
“하하하, 외기러기라. 재미있는 표현이군. 그럼 파티를 좀 더 편히 즐길 수 있도록 검증 날 내리지 못한 포상을 내려야겠군.”
가볍게 건네는 황제의 말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미루었던 포상을 내리겠다는 말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여러 사람이 눈을 빛내는 가운데 황제가 한 걸음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두 가지 중요한 발표를 하고자 한다. 우선 그 첫 번째로 우리 제국의 영웅 마인드 마스터에게 내리지 못했던 포상을 그 후예인 이드에게 내리려 한다. 나는 이 포상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원래 검증을 마친 직후 내려야 했을 포상이나, 이미 사검왕이라 불리며 마인드 마스터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이드의 행보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고심한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잠시 말을 멈춘 황제는 좌중을 둘러보고는 이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가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고 온전히 제국의 품에 안길 때까지 그에게 충성의 맹세를 받지 않으려 한다. 이는 그가 본래 제국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니, 경들은 동요치 말라. 그리고 맹세를 받지 않는 대신 제국 귀족으로서 그가 가질 권리 또한 제한하겠다. 그런 의미로 그에게 명예 후작의 작위를 내리고, 황실이 소유한 땅 중 백작령에 해당하는 영지를 맡겨 그곳에서 나는 소출을 줄 것이다.”
“…….”
뭔가 복잡하고 기묘한 내용에 귀족들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무엇보다 황제가 내리는 포상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충성 맹세가 빠지긴 했지만, 그만큼 권리 역시 제한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저 모든 것이 결국 임시라는 점이다. 언제든 이드가 마음만 먹으면 온전히 약속된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이드는 앞으로 나서라.”
황제의 말에 이드는 그 앞에 나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황제가 시중을 들던 기사에게 검을 받아 이드의 어깨와 머리를 두드렸다.
“그대 이드 예천화에게 아나크렌 제국 황제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의 이름으로 명예 후작의 작위를 내리노라. 명예 후작이라 하나 그 책임과 권한이 작지 않다. 또한 제국의 귀족은 명예로운 기사이기도 하다. 그대가 그 의무와 책임을 잊지 않기를 바라노라.”
“명예로운 기사로서 기사도를 지키겠습니다.”
원래는 곧바로 제국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절차지만, 앞서 황제가 선언한 대로 그 부분은 빠져 있었다.
검을 거둔 황제가 이드의 손을 잡고 귀족들에게 들어 보이며 외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국의 새로운 명예 후작이 탄생하였다.”
순간 파티장이 무너질 것 같은 만세 소리와 박수 소리가 터졌다. 잠시 후 박수와 함성이 멈추자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축하할 일에 이어 하나 더 명예 후작과 경들에게 발표할 것이 있다. 얼마 전 제국의 땅에 숨어 사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 비밀 집단이 발견되었다. 이는 록마틴 후작의 프랑 기사단과 은색 기사단이 우연히 확인한 것으로, 그들은 초인들을 납치하여 제국에서 금지된 연구와 실험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재가 아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내 땅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제국의 주인으로서 분노가 인다. 하여 이 간악하고 흉악한 자들을 벌하고, 제국의 땅에서 제거하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나는 이 자리에서 악마들을 토벌할 토벌대를 만들 것이다.”
뜬금없는 사악한 집단의 등장에 갑작스런 토벌까지. 몇몇을 제외하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황제의 말에 눈만 끔뻑였다.
그러나 곧 황제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이건 기회다!’
토벌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쌓아 왔던 힘을 정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이며, 명성을 쌓고 공을 세워 승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수년간 큰 사건도, 전쟁도 없어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그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나는 경들이 이 토벌에 나서 명예를 드높이고 공을 세우기를 원하노라. 경들은 그리하겠는가?”
과연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그들의 짐작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특히 젊은 귀족들은 말이 끝나자마자 번쩍 팔을 들어 올려 외쳤다.
“제국의 정의를 위하여 토벌에 나서겠습니다!”
“사악한 자들에게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벌을!”
“황제 폐하 만세!”
순식간에 파티장이 각자의 다짐을 외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황제는 그 모습을 퍽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레오날도 후작과 미소를 나누었다.
‘참으로 좋구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이어 토벌까지. 당분간 기사들은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황궁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