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8화
465화
흩어져 시온을 뒤지고 있던 정령수의 가지가 한 지점을 향해 빠르게 모여들었다. 헨리의 대답을 들은 델프리드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시온 숲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답게 헨리의 대답만으로도 한 지점을 특정할 수 있었다. 이제 서둘러 테이를 무사히 확보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지 몬스터만 잘 피해서 숨어 있어라!’
테이를 찾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때 테이는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을 만나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누구세요?”
작은 불의 정령을 끌어안은 테이가 물었다.
“그러는 넌 누구냐?”
전신에 몬스터의 체액을 가득 뒤집어써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에단이 물었다.
투두둑.
에단이 주먹 크기의 숯을 불 속으로 던져 넣자 붉은색 불똥이 예쁘게 피어올랐다. 허공을 떠돌던 불꽃은 금방 사라지고 넣어 둔 숯이 붉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내뿜었다. 환한 빛도 없고 타닥타닥 나무가 타오르는 소리도 없지만 온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은밀한 작전 중에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물건이었다. 나름대로 안전한 곳이라고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서늘하던 공간에 온기가 퍼지자 팽팽하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지 각자 물과 포션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에단도 물통의 물을 한 모금 마셔 보인 후 그것을 맞은편에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엘프 소년, 테이를 향해 내밀었다.
“물 좀 마실래?”
도리도리.
에단의 말에 테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따로 간파의 눈이 없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경계심 레벨 최대의 상태다. 안심하라는 뜻에서 먼저 물을 마셔 보이고 권했지만 소용없는 듯했다.
“그래, 그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에단은 손을 거두고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신경은 여전히 테이를 향해 있었다. 시온에 어린아이가 홀로 남겨져 있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엘프의 아이다. 현재 그들이 찾고 있는 엘프의 마을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슨 사연으로 아이가 홀로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만 잘 보호하고 있으면 아이를 찾아온 엘프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행들을 바라봤다. 이제 열 명밖에 남지 않은 일행이었다. 모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머리는 산발에, 전신에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포션으로 부상을 바로바로 치료하고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가 한계에 달한 모습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온기가 돌자 그들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나며 코를 찔렀다.
‘어후, 이거 씻을 수도 없고, 좋은 인상을 주기는커녕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이미 테이에게 들러붙을 생각을 굳힌 에단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꼼짝도 않고 에단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테이가 지독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주섬주섬 주변에 떨어진 잎사귀를 골라 코를 막는 모습이 보였다.
까딱까딱.
저 잎이 냄새를 막는 데 효과가 있나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에단의 눈에 한쪽에 가만히 눕혀져 있던 대장의 손이 까딱거리는 것이 보였다. 에단이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속이 비어 있는 이 나무둥치로 기어 들어오기 직전에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그래, 옆구리에 뚫린 구멍이 막혀서 피가 좀 차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대장의 눈이 테이를 향해 있었다. 테이의 앞에는 그래도 좀 젊고 선한 인상의 테일이 에단을 대신해서 이것저것 말을 시키고 있었다.
“안전하다 싶어 들어왔더니, 선객이 있더라구요.”
씨익.
·목숨 걸고 잘 지켜라!”
역시 대장, 상황 판단이 빠르다. 에단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다.
“대장 목숨보다 더 귀하게 챙기지요.”
“내 목숨값은 너무 싸. 네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라. 이번 임무는 실패했다 생각하고 살아 돌아가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니
연줄이나 확실하게 잘 엮어 놔.”
에단의 말에 대장이 피식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출혈이 많았던 터라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만병통치약 같은 포션이라도 사라진 피를 한순간에 보충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연줄이라.’
에단은 대장의 입에 작은 포션 병을 하나 물려 주고는 테이를 바라보며 어떻게 원만히 관계를 풀어 나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이거다 하고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때 한쪽에서 쉬고 있던 동료의 뱃속에서 밥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다!”
에단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테일이 내려놓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러다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방에서 꺼내는 그의 손에 제법 큼직한 자루가 끌려나왔다.
“일단 쉬는 김에 배도 좀 채우자.”
자루 안에는 푹신한 빵과 우유, 그리고 육포가 담겨 있었다. 힘들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인 만큼 포션을 포함한 먹거리 등의 지원은 항상 넉넉하고, 최상이었다. 동료들에게 빵과 우유를 쥐여 준 에단은 테이의 앞에다가 빵과 우유를 놓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방에서 다시 작은 자루를 꺼내 거기에 담긴 사과도 함께 놓아 주었다. 사과는 보급품은 아니지만 에단이 틈이 날 때 먹기 위해 챙겨 둔 것이었는데, 시온에 들어와서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해서 넉넉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너도 배고픈 것 같은데, 먹어 봐라. 아무 이상 없는 것들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에단은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곧 신경을 끊은 듯 일부러 테이에게서 등을 돌린 뒤 테일을 불러서 동료들과 함께 배를 채웠다. 테이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서였지만, 정말 배가 고프기도 했다.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칼질을 했는지 모른다.
꼬물꼬물
밤새 납치를 당하고, 납치범에게 매달려 하늘을 달리고, 그러다 숲에 떨어져 몬스터를 피해 한참을 뛰었던 테이는 배가 고팠다. 그러던 차에 에단이 건네준 사과의 달콤한 향기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어쩌면 저 인간들도 이드처럼 좋은 인간일지도 몰라.’
결국 테이는 배고픔에 지고 말았다. 자신을 납치한 자와 같은 인간이라 잔뜩 경계하고 있던 마음이 먹을 것 앞에서 힘없이 스러져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하지만 선은 지킨 에단의 행동이 테이의 결정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이 확실했다.
테이가 손에 든 사과를 작게 베어 물었다. 마을에서 먹던 사과보다는 맛이 좀 덜했지만 허기가 조금씩 가시며 불안감도 가시는 것 같은 테이였다. 역시 종족을 가리지 않고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장땡인 모양이었다.
‘좋았어.’
에단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삭거리는 소리에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어쩐지 순진한 아이를 먹을 걸로 꼬셔 납치하는 인간 같지 않은 것들과 같은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들은 아이를 지켜 주고, 아이는 이후에 찾아올 엘프들을 통해 자신들을 지켜 주는 기브 앤 테이크의 실천일 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자리에 있는 대장과 동료들을 포함,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등 뒤의 아이를 실제로 납치할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이런 에단의 흉측한 생각이 나빴던 것일까. 에단의 시야가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으로 물들고, 곧이어 사방에서 질척거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제기랄, 싸우는 것도 좀 쉬어 가면서 해야 할 거 아냐. 베일, 대장 업어!”
에단은 서둘러 풀어 놓은 짐을 챙기며 말했다. 그러자 대장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그냥 가라. 그리 비싼 목숨도 아닌데, 굳이 챙길 필요 없다.”
“싼 거라서 들고 가는 겁니다. 죽으면 그때 놓고 가죠. 하하.”
에단이 말을 마치자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대장을 업고는 그를 등에 묶었다. 시온에 들어오고 누구도 죽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대장이었다. 에단의 말처럼 그가 죽기 전에는 그들도 이 남자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사이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졌다.
테이는 그 소리를 듣고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테이의 곁으로 에단이 다가왔다.
“어린 엘프 친구, 아까는 내 소개를 못 했지? 난 에단이다. 네 이름은?”
“…테이.”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을 이름이었다.
“좋아, 테이, 지금 상황은 알지?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건 위험해. 우리는 이곳을 탈출할 거야. 그런데 어린 널 여기 혼자 두고 가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와 같이 가자.”
테이는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잠시 바라보다 그 손을 잡았다. 지금 현재로서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다. 이 손을 잡지 않는다면 여기에 남아 있다가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그것은 이미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였다.
거대한 오거 한 마리와 트롤 세 마리를 선두로 수많은 몬스터와 맹수가 썩어서 부러진 거대한 고목의 나무둥치를 향해 천천히 모여들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향긋한 마나의 향기와 불꽃의 냄새가 그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분명 저 안에 자신들의 공허함을 채워 줄 무언가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본능의 속삭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퍼퍼퍼펑!
썩은 고목이 터져 나가며 사방을 부연 먼지로 가득 채웠다. 그 속에서 아홉 개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정확하게 몬스터들이 가장 적게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듯 검을 휘둘러 길을 확보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막 몬스터들의 포위망을 탈출한 순간, 등에 작은 아이를 업고 있던 남자가 소리치자 그들의 몸이 휘청이며 바로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아이를 업은 남자가 등 뒤의 아이를 향해 말했다.
“지금 시온이 많이 위험해. 그래서 너희 마을에 도움을 좀 청하고 싶은데 말이야, 너희 마을이 저쪽이지?”
위급한 중에도 정보를 얻고 적당히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에단이었다.
“저희 마을을 알아요?”
“아니, 몰라.”
“그럼 어떻게 저기에 우리 마을이 있다는 걸 알아요?”
테이도 푸른 나무 마을의 위치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로서의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너무 멀고 위험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제 봤거든! 자, 슬슬 날도 밝아 온다. 빨리 뛰어!”
에단들은 슬금슬금 밝아 오는 숲 속을 빠르게 달렸다. 앞서도 이런 식으로 위급한 상황을 몇 번이나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주변에 몰려오는 맹수와 행동이 재빠른 소형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달렸지만, 앞서와 달리 그 속도가 느렸다. 자연히 주변에 달려드는 몬스터가 많아지고, 차츰 덩치가 큰 녀석들도 자리 잡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에단은 순간 아차 싶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들의 빈자리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는 만큼 전투력이 떨어지고, 자연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자리에 묶이면 위험하다. 에단은 급하게 테일에게 스크롤을 사용하도록 말했다. 하지만 사용된 것은 대표적인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과 와일드 윈드라는 날카로운 바람으로 공격하는 범위 공격 마법이 다였다.
“야, 테일. 너 지금 장난해! 큰거 날리란 말이야, 큰 거!”
“선배님, 큰 거 없습니다. 더 이상 공격 마법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