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6화
473화
파파파팟!
푸른 나무의 숲을 나는 듯 달려가던 여덟 개의 그림자가 한 나무의 가지 위에 나란히 내려앉았다.
“대형 몬스터들이 주로 서식하는 곳은 이 안쪽부터야.”
이드는 하르만이 가리키는 검은 숲 안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콧김을 뿜었다.
“후, 생각보다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네요. 전 대형 몬스터라고 해서 숲이 좀 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초입이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면 네가 생각하는 모습일 거야.”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솟은 듯 거대한 그림자가 한가운데에서 안쪽의 모습을 가린 숲이 이드의 시선을 막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 소수의 그레이트 오크와 드레이크, 오우거 등의 대형 몬스터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생각처럼 되려나 모르겠네.’
이드는 숲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과 함께 숲에 들어와 있는 자들의 처리 방법을 궁리한 끝에 이드는 그들에게 몬스터를 몰아주는 방법을 택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처리하려면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나서기는 했지만,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일에 살짝 걱정이 되었다.
사실 숲에 들어와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이자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간단했다. 마을 실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움직이면 놓치는 인물 하나 없이 모두 처리가 가능했다. 비록 그들이 보통이 아닌 실력을 가진 인물들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숲이었고, 숲에서만큼은 엘프들이 절대 강자였다. 모 이론처럼 붉은색은 세 배 빠르고, 엘프는 숲에서 세 배 이상 빠르고 강하다. 적들은 화살이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반수 이상이 죽을 것이고, 남은 반수 정도가 놀란 상태에서 칼을 맞을 것이며, 마지막 남은 자들은 상대가 엘프라는 사실을 알고 몇 번 검을 나누다 죽을 것이다.
적들 사이에 환경적인 불리를 극복할 만한 강자도 있겠지만, 이쪽에도 보통 엘프 이상으로 강한 수호수의 가지와 정령수의 가지가 있고, 무엇보다 이드가 있었다. 정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검은 삭풍이 훑고 지나간 듯 모든 온기를 지워 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 이드였다. 후환만 생각하면 직접 처리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기는 했다. 테이를 납치한 헨리의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한 인물의 일로 나머지 생명까지 도매금으로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이번 처리에 헨리의 일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귀찮게 뒤에 붙은 인간들이 자신과 주변의 지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이 이번 일로 인해서 죽을지도 모를 사람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들었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뒤쫓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밖에.
일단 몬스터를 몰아 숲 밖으로만 밀어내면 재정비와 인원 보충에 최소 몇 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 아나크렌으로 향하는 길목에 이드가 모습을 보여 그들을 시온으로부터 불러들인다는 것이 에단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 몬스터들이 필요했다. 그것도 저들이 근근이 버티며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라, 도저히 감당 불가라 판단하고 시온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 중대형 몬스터들이 필요했다.
이드는 우디에게 에단이 세운 계획을 마지막으로 상의한 후 대형 몬스터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번 계획에 대해서 우디는 별말 없이 정령수의 가지를 지원해 주었다. 테이의 납치로 인해서 현재 시온에 들어와 있는 인간들은 이드를 제외하고 모두 우디에게
잠재적인 적으로 찍혀 버린 것이다. 평소 좋은 인상으로 허허거리고 웃는 애처가이지만, 마을과 가족의 위험 앞에서는 수백의 인간도 웃으며 죽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로의 직책을 가진 우디였다.
[어떤 몬스터들이 있어요?]
라미아가 물었다.
“다양해. 그레이트 오크, 그리핀, 트롤, 드레이크 등등. 아마 평소 보기 힘든 몬스터는 대부분 볼 수 있을 거야. 괜히 인간들이 시온을 두려워하고 접근하지 않는 게 아니지.”
[신기하네요. 일반적으로 대형 몬스터는 확실한 자신만의 활동 영역이 있어서 서로 겹치는 지역에는 살지 않을 텐데. 이렇게 좁은 지역 안에 모여 있는 건 처음 봐요.]
그녀의 말대로 대형 몬스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오히려 활동 영역이 겹치는 경우 상대를 죽이거나, 패해서 도망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모여 있는 경우는 몬스터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대한 존재에 의해서 제압되어 있는 경우뿐이었다. 자연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라미아도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도 처음 보는 경우야. 이전에는 시온 전역에 흩어져 있던 놈들이었는데.”
“그럼 갑자기 달라진 건가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드가 끼어들었다. 일단 대형 몬스터가 있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어떤 변수가 있다면 미리 알아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악마 결계가 작동된 뒤부터 천천히 변했지. 덕분에 처음에는 우리도 전혀 몰랐으니까.”
악마 결계는 라일로시드가가 만들어 놓은 지옥 시스템의 힘으로 강력해진 결계와 회색 안개를 뭉쳐서 이르는 말이었다.
[그럼 지옥 시스템이 시온 숲의 몬스터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에요?]
라미아가 놀라서 물었다. 라일로시드가가 만들어 놓은 봉인과 결계에 그런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놀라는 이드와 라미아를 보며 하르만이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확신하기가 힘들어. 일반적인 소형 몬스터들이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건 대형 몬스터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면서 자연히 개체수가 늘어난 것뿐이고 그 이외에 몬스터들의 모습에 변화는 없었거든.”
“그래도 모여 있지 않는 놈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면 이상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우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좀 더 알아보니 시온의 왕이 활동을 시작했더라고.”
“시온의 왕이요?”
이드는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하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을 중심으로 대형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의 반대쪽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히드라야. 시온의 최상위 포식자지. 우리는 놈을 시온의 왕이라고 불러.”
히드라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 몬스터로 유명한 몬스터였다. 대형을 지나 거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크기와 재생력, 그리고 강력한 독이 자랑인 놈이다. 전설에서는 아홉 개의 머리를 한꺼번에 잘라내지 않고서는 죽일 수 없다고 알려진 놈이지만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다. 머리가 잘리면 하나를 회복하는 데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놈으로, 그 보름 안에 아홉 개의 머리를 자르면 죽일 수 있다.
주로 늪지나 강 주변에 살고 있는 놈인데 시온의 왕은 특이하게 숲 속에 둥지를 틀고 앉은 것이다.
“조용한 놈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더니 포악해져서는 주변의 중대형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더라고.”
“아, 설마 그래서?”
“그렇지. 이놈들은 그놈을 피해 살기 위해 뭉친 거야. 왕도 이 녀석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 영역 밖으로 나가서 그런지 딱히 움직이지 않고.”
[그럼 결계의 영향은 없는 게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조용하게 지내던 왕이 갑자기 난폭해진 것이 악마 결계가 작동되고 난 이후라서 꼭 영향이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어. 악마 결계 외에는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었거든.”
확실히 악마 결계의 영향 때문이다 아니다 말하기 애매했다. 그렇다고 시온의 왕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드는 왕의 사정보다 몬스터들의 사정이 더 신경이 쓰였다.
“왕이 무서워서 무리 지은 거라면 밖으로 몰 수 있을까요?”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계획은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나 그건 이드의 괜한 걱정이었다.
“하하. 걱정 마. 이놈들도 종종 먹이를 찾아서 숲 중앙으로 내려오거든. 아무래도 덩치 큰 놈들이 모여 있는 만큼 이 안에 있는 녀석들만으로는 먹이가 모자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죠!”
이드의 말에 따라 다섯 개의 그림자가 다시 전방을 향해 쭉 뻗어나갔다. 세 명은 밖으로 뛰어나오는 몬스터들의 방향을 유도하기 위해서 남았다. 과연 하르만의 말대로 술병처럼 좁은 입구 부분을 지나자 같은 시온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휑한 모습의 숲이 모습을 보였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나무가 한둘이 아니었고, 맨땅을 내보이고 있는 곳도 있었다.
대신에 그런 자리에는 꼭 한 마리 이상의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말 사방에 몬스터가 가득했다. 시온의 모든 대형 몬스터가 모였다고 하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력한 몬스터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아. 저 안쪽에서부터 몰아 나오면 될 것 같다.”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대답했다.
대형 몬스터들이 자리 잡은 곳은 일종의 분지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가장 안쪽은 좁은 마름모 형태였다. 입구에서 중앙부까지 중형 몬스터가 자리했고, 중앙부에서 그 위쪽으로는 대형 몬스터와 비행형 몬스터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지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자리할 것 같았던 마름모의 가장 안쪽에는 의외로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시커먼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워어어엉!”
“씨아아악!”
조용하고 평화롭던 분지 안에 어느 순간 흥분한 몬스터들의 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분지 안으로 들어와 있는 이드와 정령수의 가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분지 밖의 몬스터와 달리 분지 안의 대형 몬스터들은 빠르게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것이다.
몬스터의 덩치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하다는 말과 같아서, 이드와 정령수의 가지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드들이 모습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몬스터들의 주목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몬스터들이 이드와 정령수의 가지를 바라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것은 역시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형 몬스터였다. 퍼엉!
이드들의 주변을 돌며 기회를 보던 그리핀 한 마리가 라미아의 파이어 볼에 나가떨어졌다.
“저 동굴 안에 있는 놈이 이곳의 최강자 같은데, 어떤 놈들인지 아세요?”
이드가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리핀을 바라보다 물었다. 하지만 같이 달리고 있던 엘프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도 이 안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라 몰라.”
엘프들로서는 그저 대략적인 상황 파악만 해뒀을 뿐이었다. 딱히 몬스터를 사냥할 이유도, 그들의 식생을 파악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누런 호랑이가 나올지, 하얀 호랑이가 나올지 한번 볼까요.”
입구에서부터 제일 안쪽의 동굴까지 순식간에 가로지른 이드가 일라이저를 빼 들었다. 그리고 지난 팔 년간 새롭게 가다듬은 검식을 위해
일라이저가 붉게 번뜩였다.
수라참마인, 수라섬광단, 수라만마무의 수라삼검이 한순간에 풀려나왔다. 세 초식은 사방으로 풀려나가지 않고 수라참마인을 중심으로 커다란 구의 형태로 뭉쳤다. 수백의 붉은 철사를 구겨 만든 구에는 삐죽삐죽 날카로운 강기의 칼날이 섰는데, 그냥 봐도 괴상하고 흉측한 모양이었다. 그 안에서는 당장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아 보여 이드와 함께 달리고 있던 정령수의 가지들이 흠칫하고 놀랄 정도였다.
“좋아, 첫 실전이다. 가라, 혈악(血惡)!”
푸스스슷—
기괴한 소리였다.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날아가는 혈악의 수많은 틈으로 스치는 비람이 으스스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악마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동굴 속으로 사라졌고, 다음 순간 동굴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아!
그것은 인간의 것도 몬스터의 것도 아니었다. 뭉쳐진 혈악이 진면목을 드러내며 나는 소리였다. 외형과 더불어 이드가 이 기술을 혈악이라 이름 지은 가장 큰 이유였다.
“끄아아아악!”
혈악의 비명에 뒤이어 동굴을 무너트릴 폭음과 함께 동굴에서 거대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거목 이상의 키에 흉측한 뿔과 그 아래 하나뿐인 눈을 번뜩이는 놈의 손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육각 형태의 모닝스타가 들려 있었다.
“사이클롭스!”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는 놈의 모습을 보고 이지문이 놀라 소리쳤다. 사이클롭스는 대형 몬스터 중에서도 특히 머리가 좋고, 강력하기로 유명한 몬스터였다. 그런 놈이 동굴에서 세 마리가 더 뛰어나왔다. 모두 전신에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그중 한 놈은 눈을 다친 듯 사방으로 모닝스타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럼 견적을 뽑아 볼까요. 유인이 나을지, 몰이가 나을지.”
도망가면 몰이고, 도망가지 않고 달려들면 유인이다. 일단 검을 날려 보고 나서 판단할 문제였다. 이드를 따라 정령수의 가지가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두두두두!
“……이런 씨펄!”
빌은 옆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욕설에 울상을 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발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과 높은 나무 위로 삐죽이 솟아 오른 흉측한 몬스터들의 얼굴에 울고만 싶었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서 겨우 한 마디를 했다.
“도・・・・・・망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