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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7화


474화

버락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기가 막혀 떡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살려고 들어왔는데 죽게 생겼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살고 싶었고, 그러는 김에 조직에서의 자리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장! 대장!”

“어, 그래.”

부관이 자신을 부르며 흔들었다.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버락의 성격을 아는 부관이 이러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아무래도 정신을 잠시 놨던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대답하고는 곧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시를 바라고 묻는 부관의 눈이 다급해 보였다. 버락의 눈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망간다.”

평소 거의 쓰지 않는 단어였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임무의 성격상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번 후계자 확보 임무처럼 확실한 목표가 없는 임무가 아니라면 후퇴도 철수도 없는 것이 그들이다. 덕분에 버락도 지금까지 도망이라는 말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버락은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숲에 길이 나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음과 파괴의 현장 속에 그들이 있었다. 몬스터. 그것도 하나만 나타나도 작은 시골 영지는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대형 몬스터들. 괴물들이 길 안에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놈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져 올 때마다 올라서 있는 나무가 흔들렸다. 저런 괴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기사단이 아니라 기사단 할애비가 와도 힘들다. 그런데 저 앞에서 보통의 기사단보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자신들이 서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도망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 지금 쓰지 못하면 평생을 쓰지 못할 말이다 싶었다.

그나마 심상치 않은 소리와 땅울림에 나무 위로 올라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저들의 발에 밟혀 죽었을 것이다. 버락은 빠르게 사방을 다시 돌아본 후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친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전속력으로 따라와라!”

한번 말하고 나니 도망이라는 말이 입에 착착 붙는다. 버락은 뛰어내리기 전 봐뒀던 방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부하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이해되지 않는 모습에 의문이 가득해 보였다. 무엇보다 무슨 일인지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버락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길을 잡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어차피 부하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를 대신해 같이 나무 위에 올랐던 부관이 뒤에서 따라오며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뒤처져 있던 부하들이 버락의 뒤로 바짝 붙어왔다.

그들도 버락만큼이나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사에 그 부하였다.


하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미아가 버락이 도망치는 방향을 가늠하고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왜 그쪽으로 가는 거야! 이드.]

“그래, 보고 있어.”

라미아와 시선을 공유하고서 몬스터를 몰고 있던 이드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다 싶었다.

생각지도 않게 결계 가까이로 접근한 사실도 놀라웠고, 몬스터를 피해서 그들이 왔던 곳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의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저놈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어떻게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드는 혀를 차고는 자신의 앞뒤를 돌아봤다. 뒤는 자신을 쫓아오는 두 마리의 사이클롭스, 앞에는 자신과 사이클롭스를 피해서 도망가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몰이를 하려던 이드의 실력 행사가 반만 성공한 모습이었다.

강력한 힘으로 사이클롭스 두 마리를 처리하고 남은 여력으로 몇 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하자 사이클롭스를 제외한 몬스터들이 도망을 갔다. 그러나 절대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가진 사이클롭스는 이드에게 덤벼들었다. 도망가는 몬스터들을 몰지, 아니면 사이클롭스를 상대할지 고민하던 이드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은 생각에 사이클롭스를 뒤에 달고 정령수의 가지와 함께 몬스터를 몰았다.

아무리 몬스터가 멍청하다지만 눈앞에 빽빽한 나무와 광기로 눈이 뒤집힌 몬스터들이 다가서는데 주춤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지 밖으로 나온 순간 시온을 뒤덮은 광기가 뒤늦게 그들을 흥분시켜, 그들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게 만들었다. 일단 속도만 붙으면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능숙한 뱃사공에게는 쉬운 일이다.

정령수의 가지와 이드에게는 능숙한 뱃사공의 능력을 대신할 힘이 있었다. 사이클롭스는 달리기만 해도 잘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시온에 들어와 있는 각국 단체들의 위치는 비슷했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로 그들에게 향하려고 했다. 라미아가 공중에서 방향을 잡아 주기로 했다. 그런데 공중에 날아오른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의외로 마을의 결계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로브스였다. 라미아의 말을 들은 모두는 놀랐다.

그들을 확인한 이드는 좀 더 깊게 들어가서 그들을 시작으로 각국의 세력을 몰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몬스터들이 들이닥치자 이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드는 검사의 입장에서 단순하게 생각했고, 버락은 로브스의 능력을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숲 속 깊이 들어가서 로브를 이용해 모습을 숨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로브 속의 물건들과 로브를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이드가 몬스터를 몰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몬스터가 그들을 지나쳐도 이드는 그들을 봐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락은 그런 사실을 몰랐고, 이드는 버락의 속셈을 몰랐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하르만! 제가 사이클롭스를 끌고 이쪽을 맡을게요. 다른 쪽을 부탁해요.”

“알았어. 그리고 저기 보이는 커다란 나무 있지? 저 나무를 기준으로 왕의 영역이야.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드가 부르는 소리에 가까이 다가왔던 하르만이 주의 사항을 이야기해 주고서는 다른 엘프들과 함께 몬스터를 인간들에게 몰아가기 시작했다. 등 뒤로 비명과 함께 도망치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드는 저 앞에 앞서가는 자들도 같은 비명을 지르며 숲 밖으로 나가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로브스는 이드의 바람과 다르게 더욱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했다.

“이대로 가면 왕의 영역이다. 제발 거기 그대로 딱 서라, 좀!”

이드는 라미아의 시야를 통해서 하르만이 지목한 나무 근처까지 다다른 로브스의 모습을 포착하곤 애가 탔다. 혹시라도 히드라가 깨어나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 날 수가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막아야겠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처가에 와서 더 이상의 소란과 문제는 일으키고 싶지가 않은 이드였다.

그런 이드의 부탁을 들었는지 로브스들이 왕의 영역 바로 앞에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에 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저놈들은 어떻게 시온 밖으로 쫓아낸다?”

이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뒤에 따라오는 사이클롭스로 인해서 도저히 발을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드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하르만이 알려준 왕의 영역과 왕이 스스로 생각하는 그의 영역이 절대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슈르르륵-

날름거리는 긴 혓바닥을 통해서 느껴지는 냄새에 왕은 오랜만에 흥분했다.

“별식이구나.”

그리고 짜증이 났다.

‘왜 더 들어오지 않지?’

조금만 더 들어오면 자신의 머리 중 하나를 빼서 독으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어 살살 녹여 먹을 텐데, 이것들이 애매한 곳에서 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까마득히 오래전 먹어 본 이놈들의 맛을 왕은 기억하고 있었다. 달짝지근했다. 좀 더 이전에는 별식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게 여의치가 않았다.

바로 왕을 한 단계 끌어 올려준 힘이 어느 순간부터는 무겁게 가라앉아 왕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츄릿츄릿-

왕은 지금도 그 힘만 생각하면 흥분되었다. 까마득히 오래전 왕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며 그 힘을 맛봤다. 처음 그 힘은 나무 수액처럼 끈적거리고 자신을 아프게 만들었던 작고 하얀 것들과 같은 쌉싸래한 맛이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든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덕분에 식욕이 돋아서 한동안 열심히 배를 불려 과식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고기를 먹는 것보다 하루 한 번씩 자신의 입과 코를 통해 섭취되는 그 힘이 더욱 자신을 배불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먹는 데 집중했다. 왕이 먹은 힘이 몸 안에서 커질수록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졌다. 무언가 그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사실은 이 때문에 갈등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강함이라는 자연계의 절대 법칙을 따라 왕은 움직임을 포기하고 열심히 다른 배를 불렸다. 가끔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움직여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는 별식만을 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 며칠간 배가 찢어지도록 쏟아지는 힘을 통해 기쁨을 알았고, 오늘 눈앞의 별식을 통해서 짜증과 후회라는 것을 알았다.

츄릿츄릿-

‘조금만, 조금만 더 들어오면 먹을 수 있는데!’

왕의 머리가 닿을 수 있는 한계지점에 별식들이 꼼짝을 않고 있는 것이다. 혓바닥 뿌리가 아플 정도로 혀를 휘둘러 보지만 도저히 닿지 않았다. 왕은 어쩌면 이번에 기쁨과 짜증과 후회에 이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포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왕을 찾은 감정은 포기가 아니라 환희였다.

슈르르륵- 슈르르륵―

놀람과 흥분에 왕의 혀가 파르륵 떨렸다. 왕을 묶고 있던 주박이 사라지고 외부와 이어져 있던 힘의 끈이 사라지며 지금까지 포식한 힘이 왕 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어 완성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왕은 꼬리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힘의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거대한 크기와는 다르게 왕은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먹을 수 있다.’

그 단순한 사실에 왕은 기뻐했다. 군침으로 독액이 입가를 따라 뚝뚝 덜어졌다. 이제 힘으로 가득한 배를 두고 오랫동안 비었던 다른 배를 채울 것이다. 왕이 가진 아홉 개의 머리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씨에에에엑!

“끄아아악!”

여덟 명의 섬뜩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하나는 머리부터 먹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신경을 바짝 세우고 사이클롭스가 달려오는 것을 살피던 버락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스치며 부하들을 낚아채는 모습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돌아본 그의 눈에 거대한 아홉 개의 검은 그림자 끝에 버둥거리는 부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받은 훈련이 무색하게 버락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X벌.”

입만 빼고.


“헐”

사이클롭스를 뒤에 달고 달리고 있던 이드는 생각도 못 한 광경에 지구에서 익힌 전천후 감탄사를 토하고 말았다.

왕의 영역으로 들어서기 전에 엎드려서 몸을 숨기는 로브스를 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지만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번엔 생각지도 않게 왕이 움직였다. 비록 몇 미터 차이라고는 하지만 놈은 분명히 하르만이 말한 영역 밖에 있던 로브스를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다. 로브스의 은신술도 왕 앞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머리가 아홉 개나 되니 한입씩만 해도 아홉 명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왕의 크기.

“엄청 크다.”

멀리서 보고 있던 이드가 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꼿꼿이 세운 아홉 개의 머리 높이만도 아파트 십 층 높이는 되어 보였다. 로브스 여덟 명이 히드라의 입안으로 또 사라졌다. 이제 남은 로브스는 얼마 되지 않았다. 히드라의 여덟 개의 머리가 그들을 노렸고, 하나의 머리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는 듯 이드와 사이클롭스를 향해 번뜩였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등 뒤에서 죽일 듯 따라붙던 사이클롭스가 움찔하며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몬스터 몰이는 못 하겠는데?”

[몰이가 문제가 아닌데요?]

그 말대로였다. 저놈이 움직이면 몰이가 아니라 시온이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저놈이 갑자기 왜 움직여? 지금까지 조용했다는데, 어떤 놈이 저놈을 자극한 거야!”

이드는 그 말과 함께 히드라의 머리를 피해 메뚜기처럼 날뛰는 로브스를 ‘범인은 네놈들이다!”라는 눈으로 노려봤다.

그렇지 않아도 목숨이 백척간두에 선 로브스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와르르르륵!

“…….”

에단은 자신의 눈앞에서 작은 돌조각으로 부서져 무너져 내린 해골 탑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등 뒤 마을에서 웅성거리는 엘프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썅! 일냈다.”

이드가 찾는 범인이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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