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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85화


822화

적당히 낡았지만, 잘 손질되어 사용자의 애정이 느껴지는 파츠 아머는 제법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이거 네 거 아니냐?”

“아, 아셨어요?”

모를 리가 있나. 그레이의 검과 함께 매일매일 꼼꼼하게 손질하던 모습이 눈에 박힐 정도인데.

“그런데 상태가 왜 이래?”

“어쩌다 보니 훈련 중에………….”

이그렌이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드는 그런 이그렌을 두고 파츠 아머를 들어 살폈다. 이그렌의 파츠 아머는 상당히 연식이 있는 물건으로, 파츠 아머라는 개념이 도입된 후 초기에

생산된 모델이었다. 현재의 파츠 아머와 비교하면, 파츠 아머라기보다는 전신 장갑 쪽에 가까운 물건이다.

그런 파츠 아머의 흉갑이 깨져 있고, 견갑에는 금이 갔다. 다행이라면 깨진 흉갑에 안쪽으로 터진 자국이 없다는 점일까?

“그래도 다행이네. 그냥 깔끔하게 깨져서 다치진 않았겠어.”

“예. 흉갑이 깨지는 걸 보고 3조 기사가 급하게 멈춘 덕분이기도 하고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는 3조라는 소리에 이그렌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무공을 수련한 이그렌은 임시로 2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정신의 관에 도착하면 다시 배정될 수도 있지만, 현재는 2조에 속해 있어야 기사단과 함께 손발을 맞추고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조면・・ 뭐야 또 단체전이냐?”

황녀와 함께하는 힘든 훈련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조금 희석되긴 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훈련과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열심히 싸우는 두 조였다.

심지어 그냥 싸우는 것도 아니다. 승패에 조건을 걸어서 패한 조는 다시 승부가 갈릴 때까지 승리한 조의 심부름을 해야 했다.

이러니 싸움이 끝이 날 수가 있나. 중간에 황녀가 조건을 조정해서 당일에 한해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바꿔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매일매일 싸움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싸움이 정도 이상으로 격렬하지 않아 이드들이 허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멈춘다는 것 정도다.

오늘 파츠 아머가 부서진 이그렌이 몸에 상처가 없는 것도 그 덕분이라고 봐야 했다.

첫날 이드가 봤던 두 조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흉갑이 아니라 이그렌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을 수도 있으니까.

“아하하,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하는 놈이, 대련에 빠지는 날이 없냐?”

이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움츠러드는 이그렌을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열심인 이유가 사무엘이라는 목표 때문일 테니까.

그런 이드의 생각은 옳았다.

이그렌으로서는 악연을 끊기로 마음먹은 이상 확실히 하고 싶었다. 또 이드 앞에서 다짐한 만큼 자신과 아버지를 도와 준 이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사무엘의 목을 베는 것이 기사로서, 그리고 일리나스의 당당한 귀족으로서 온전히 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현재의 이그렌은 귀족도, 기사도 아닌 수련생에 가까웠으니까.

“대련도 좋지만 적당히 해. 너무 힘을 빼면 정작 힘을 써야 할 때 못 쓴다. 그나저나 끝까지 주인을 지킨 걸 보면 좋은 갑옷이야.”

이드가 들고 있던 파츠 아머를 내려두자 이그렌이 아기를 받아 안는 것처럼 애정 가득한 손으로 받아 들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파츠 아머라서 그런지 아버지 같기도 합니다.”

아공간에 들어 있는 갑옷 중 하나를 골라 줄까 고민하던 이드는 그 말에 고민을 접었다.

성능도 중요하지만 물건에 저만한 애정이 있다면 함부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파츠 아머와 같은 방어구는 기능도 중요하지만, 방어구 자체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랫동안 마음을 통한 무구에는 특별한 기운이 깃든다는 전설도 있으니까.

“그럼 고쳐서 쓸 거야?”

“네. 그렇지 않아도 그걸 부탁하려고 왔다가 사무엘 백작과 대면한 겁니다.”

“과연. 뭐, 사소한 건 넘기고, 이 정도면 라미아가 한방에 깨끗하게 고쳐 줄 수 있을 텐데. 없네? 어디 갔지?”

“저도 사무엘 백작을 상대하느라 아직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한순간에 사무엘 백작을 사소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이드의 말에 이그렌이 고개를 저었다.

이드는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평소 이드와 일리나의 곁에 있는 라미아였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드 대신 일리나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아서다.

“라미아는 2조 막사에 있어요.”

이드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아는 일리나가 묻기도 전에 답했다.

“2조에는 왜…… 아, 물을 것도 없겠네요. 무구 때문이겠네요.”

의문을 표하던 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자문자답했다. 라미아가 기사들의 무구를 봐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훈련이 격해지면서 그런 일도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그렌이 오기 전에 자리를 비웠다면 모든 기사들이 대련에 나선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그렌이 라미아가 막사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곳으로 달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럼 비올라는 3조 막사에 있겠네요?”

“호호, 맞아요. 2조와 3조의 기사들이 같이 찾아 왔었거든요.”

라미아가 2조 소속 기사들의 무구를 봐 주고 있는 반면, 비올라는 3조의 청색 깃털 기사단의 무구를 봐 주고 있었다.

이것은 무공을 수련하는 기사와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이 사용하는 무구에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마법 실력에서야 라미아를 비올라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초인과 초인기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간 연구해 온 비올라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겠지.

그것이 미묘한 차이로 나타났고, 뛰어난 기사들인 3조의 기사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크게 느끼고 라미아가 아닌 비올라에게 무구의 보수를 부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올라가 3조의 무구로 바빠지자 보수할 무구들이 밀리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2조의 무구를 라미아가 맡게 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은색 기사단의 1조의 무구도 라미아가 봐 주고 있었다. 1조에는 초인이 없을 뿐 아니라, 초인 전용의 미묘한 조종도 필요치 않는 무구의 보수는 무조건 라미아가 빨랐으니까.

“그렇다는데?”

일리나의 말이 끝나자 이드가 이그렌을 돌아보았다.

“하하, 괜히 마음만 급해서 서두르다가 보기 싫은 얼굴만 봤네요. 전 그럼 막사에 가서 라미아에게 파츠 아머의 수리를 부탁해야겠습니다.” 이그렌이 파츠 아머를 주섬주섬 안아 들며 말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다 이그렌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모습에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 멈춰 봐.”

이드는 이그렌이 멈춰 서자 그의 팔에 들려 있는 부서진 흉갑을 다시 빼 들어 이리저리 살피다 부서진 부분의 철판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끼이익. 틱.

그러자 흉갑의 철판이 조금 휘더니 힘없이 부러졌다.

원래는 부러지지 않고 접히거나, 부러지더라도 직각 이상으로 넘어갈 때까지는 견뎌야 했다. 단단하게 적의 공격을 막는 한편 충격을 흡수해야 할 갑옷으로는 좋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마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래전에 만들어진 데다 그 시간만큼 금속 피로가 쌓이면서 이렇게 변했을 것이다.

이드는 손에 들린 철판 조각과 자신의 손가락이 꺾인 것처럼 아픈 표정을 한 이그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 파츠 아머, 상당히 성능이 떨어진 건 알고 있지? 라미아가 수리를 하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철판의 강성 자체가 떨어진 건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다른 갑옷으로 바꿀 생각은 없지?”

이드의 질문에 이그렌이 수더분한 얼굴이 되어서는 히죽 웃었다.

“예. 바보 같긴 하지만 이 녀석이 진짜 끝이다 할 때까지는 사용하고 싶습니다.”

“바보 같은 줄은 아네.”

아직 한계는 아니지만, 끝이 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파츠 아머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입고 있다가 잘못하면 막아야 할 공격을 막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이그렌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드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싫지 않았다. 무인이라면 자신의 손발이 되어 주는 무구를 아낄 줄 알아야지. 저런 마음과 애정이 밑바탕에 있어야 평범한 물건에 신이 깃드는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과 애정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물건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고, 곧 이그렌이 이 파츠 아머가 신품일 때도 막기 힘든 적을 상대할 일을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무엘이 아니라도 정신의 관에서 싸우다 보면 어디서 날아오는 마법이나 칼에 맞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네 파츠 아머, 바꾸지 않을 거면 강화해 볼 생각은 없어?”

“그렇지 않아도 라미아가 전투가 있기 전에 파츠 아머에 새 마법을 새겨 준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라미아 또한 이그렌의 파츠 아머를 손보며 미리 생각을 해 둔 모양이다.

“그건 라미아 몫으로 두고, 내가 말하는 강화는 마법이 아니라 이 파츠 아머의 재질에 대한 이야기야.”

“재질이요?”

이그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그렌 뿐 아니라 각자 일을 하던 스폴과 일리나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스폴은 서류 작업하던 것도 손 놓고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츠 아머의 재질이면 강철인데, 그걸 강화하려면 녹여야 하지 않나요?”

“그건 새로 만드는 거잖아요. 그걸 강화라고 하진 않죠.”

이드가 부정하자 반사적으로 파츠 아머를 와락 끌어안았던 이그렌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일리나가 이그렌의 어깨를 토닥였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이드는 이그렌이 싫다고 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하하, 저도 모르게 그만…….”

이드는 민망해 하는 이그렌의 모습에 혀를 찼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손수 강화해 주겠다고 나선 건지.”

“죄송합니다~”

“그럼 단장님은 무슨 방법으로 파츠 아머를 강화시키시려는 건가요?”

스폴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이면에 은근한 욕심도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무구를 아낄 줄 아는 기사로서, 무구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에 흥미가 없을 수가 없다.

『이드가 각성한 초인기에 대해서 말할 건가요?』

일리나가 이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직 이드가 초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니까. 이드는 일리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드도 초인기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스폴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고, 쉴라와 검후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꾸준히 함께 일을 할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밝히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싶었다.

특히 이드가 초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괜히 꺼진 불을 다시 피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제게 조금 특별한 재주와 무공이 있거든요. 거기에 정령의 도움까지 받으면 가능해요. 적당한 재료만 있으면.”

“재료라면 어떤 거요?”

“당연히 무구를 강화시킬 만한 재료죠. 가령 미스릴이나, 블랙 스틸 등의 재료죠. 하지만 이번엔 그런 재료가 아니라 이미 완벽한 합금을 이뤄서 강도가 확실한 물건을 재료가 쓰려고요.”

“그런 물건이 있나요?”

“여기 있잖아요. 단단함 하나로 황제의 인정을 받던 물건.”

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 사람을 보며 슬그머니 허리에 매달린 스틸 하트를 만졌다.

우우웅~

그에 스틸 하트가 자신의 불행한 미래를 느낀 듯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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