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9화
476화
대형 몬스터들을 피해서 도망가고 있던 각국의 단체는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히드라의 거체를 보고는 달리는 발에 힘을 더했다. 단순히 자신들만으로 시온을 조사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몬스터들도 앞서 달리는 인간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원래 그들은 왕을 피해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왕이 더 거대해지고, 강해져서 날뛰고 있으니 대형 몬스터들도 살기 위해 달렸다. 이 순간 인간과 몬스터는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네 번째의 목이 꺾였다.
왕이 이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몸을 말았다. 앞서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모습에 이드가 한발 물러섰다.
슈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왕의 모습이 검은 기운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성긴 그물 같던 기운이 안으로 모여들며 촘촘히 왕을 감쌌다.
그러나 이드는 그 모습을 그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일라이져가 붉게 번뜩이며 오늘 두 번째로 혈악이 모습을 보였다.
혈악은 예의 기괴한 모습과 음습한 소리를 안고서 검은 안개로 날아가 부딪치며 본모습을 전개했다. 똘똘 뭉쳐놓은 그물이 펼쳐지듯 혈악이 펼쳐지며 검은 안개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물에는 날카로운 강기의 칼날이 빽빽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이 회전하며 기괴한 비명 소리를 만들어 냈다.
끼아아아아!
그러자 단단해 보이던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브레스가 터져 나와 혈악과 부딪혔다. 잠시 후 모든 기운이 사라지자 그 안에서 크기가 절반 이상 줄어든 왕의 모습이 보였다.
비단 달리진 것은 크기만이 아니었다. 이드가 철저하게 부숴 놓았던 네 개의 머리가 멀쩡하게 살아나 있었다. 죽었던 눈에서는 독기가 철철 흘러 넘쳤다.
작아진 몸 위로 번들거리는 검은 마기가 흘렀다. 거대한 몸을 지탱하며 간간히 모습을 보일 때는 몰랐지만, 몸집이 줄어들자 왕의 몸 위로 흐르는 기운이 명확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마기였다. 그것은 바로 며칠 전 찐하게 느껴 본 기운이었다.
“라미아, 이 기운 어쩐지 사흘 전쯤에 상대한 그 마족의 기운과 비슷한 것 같은데. 어때?”
[맞아요. 아무래도 지옥 시스템으로 중화시키던 마기를 흡수해서 마수로 진화한 것 같아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다른 기운도 아니고 이렇게 비슷한 힘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라일로시드가가 날림 공사를 했나 보다.”
며칠 전 봉인에 빈틈이 생긴 것도 그렇고, 봉인된 악마를 자연 소멸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마기를 뽑아 먹고 진화해 버린 히드라까지. 생각지 못한 빈틈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날림공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둘 다 조금만 잘못했으면 푸른 나무 마을이 날아갈지 모를 대형 사고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부실 공사에 대한 보상금을 톡톡히 받아내야겠는데!”
이드는 독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왕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미아는 허공에서 이드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아무렴 이드의 일인데 라일로시드가가 그렇게 허술하게 했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뭐, 결론만 놓고 보자면 며칠 전의 봉인 문제는 몰라도 눈앞의 히드라만큼은 변명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대신 이드가 말하는 보상금을 받으려면 우선 행방이 묘연한 당사자부터 찾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그것도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볼 일이다. 라미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왕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봤다.
‘두 배 이상 빨라졌다.’
이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왕의 모습에 놀랐다. 처음 사이클롭스를 덮칠 때도 느꼈지만 덩치가 줄어들고서 더 빨라졌다.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흡사 기는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이드 앞으로 다가온 왕의 머리 중 하나에서 검은 선이 쭉 쏘아져 나왔다.
이드는 그 속에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지독한 비린내를 맡았다. 왕이 코브라처럼 독을 쏘아낸 것이다. 하지만 독에서 자유로운 이드 입장에서는 그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악취가 나는 침일 뿐이었다.
‘덩치도 줄었겠다. 숲이 더 부서지기 전에 끝을 내는 게 좋겠어.’
이드는 독을 피하며 왕을 향해 달려갔다. 이드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독이 땅을 녹이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몸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의 백 미터에 가까운 길이를 가진 거구다. 이드는 이번에는 머리를 노리지 않고 그 머리의 시작점인 가슴을 노리기로 했다. 번거롭게 아홉 개의 머리를 노리기보다는 아홉 개의 머리가 공유하는 하나를 노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주 달리던 만큼 이드는 순식간에 왕의 가슴 앞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를 기다린 듯 머리 위로 왕의 꼬리가 떨어져 내렸다. 왕도 자신의 몸인 만큼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약한 곳에 대한 방어는 생각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빨라진 속도에 본능적인 움직임이 합쳐지자 왕의 꼬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순간적으로 음속을 돌파하는 채찍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이드를 잡기에는 느렸다.
꼬리는 요란한 소리로 땅을 때렸고, 이드는 왕의 가슴 앞에 섰다. 그리고 검을 올려치며 뛰었다. 마기가 꽉 조여지며 이드의 검을 막았지만 순간일 뿐이었다.
지지지직!
촘촘한 갑옷 같은 가죽이 찢어지며 가슴에서 세 번째 머리가 시작되는 목 사이가 갈라지고 뜨거운 피가 터져 나왔다. 그 자리로 아홉 번째 머리의 브레스가 쏟아졌지만 이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벌써 다른 머리의 입을 피하고 그 옆에 달린 머리의 목을 베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날리는 이드의 앞을 꼬리가 막고 이드는 그 꼬리를 피해 칼질을 했다. 갑자기 왕의 몸 위에서 열 개의 머리와 꼬리 그리고 이드 간의 숨바꼭질 같은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숨바꼭질은 왕의 몸 위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왕에게 불리한 공간이었다. 이드가 어디에 칼질을 하건 왕의 몸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덩치가 너무 커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 달랐다. 그러나 언젠가는 왕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왕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르르렁!
이것은 이미 뱀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왕의 머리 하나가 커다랗게 포효하고는 슬금슬금 줄어들어 왕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머리가 사라졌다.
“뭐야. 이건!”
이드는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했다. 그리고 다음 변화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섯 번째 머리까지 연이어 사라진 후 이드를 공격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몸을 더 많이 때리던 꼬리가 종잇조각처럼 구겨지고 펴지기를 반복하더니, 뾰족한 꼬리에서 흉측한 왕의 머리로 변해 버린 것이다.
[쿼럴!]
그 모습에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미아가 소리쳤다.
“뭔 럴? 이크!”
머리와 꼬리가 변하는 모습에 기막혀하던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되물었다. 마침 공격해 들어오는 새로운 머리를 피하며 디디고 서 있던 왕의 몸에 검을 꽂고는 꼬리였던 머리의 목 밑까지 그어 버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커다란 상처에 왕의 몸이 쩌억 갈라졌다. 그러자 다시 하나의 목이 사라지며 상처가 순식간이 붙어버렸다. 왕의 몸도 조금 더 줄어들었고, 속도는 빨라졌다. 네 개의 머리와 이드가 한 덩이로 뭉쳐 멀리서 보면 검은 구름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이드에게 이상한 상대일 뿐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라미아가 이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드, 쿼럴이에요, 쿼럴 히드라가 쿼럴로 진화하는 것 같아요.]
“그게 뭔데?”
이드는 라미아에게 반문하며 자신에게 달려들던 머리의 눈을 터트려 버렸다. 그러자 앞을 볼 수 없게 된 머리가 다시 왕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쿼럴은 마계에서도 드문 마수예요. 머리가 두 개라서 항상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만 하는데, 주변에 쿼럴이 있으면 항상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결국에는 자멸하게 된대요.]
집 주변에 있다면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필히 퇴치해야 할 놈이다.
돌아보니 이제 머리가 세 개다. 하나만 더 없어지면 최강의 가정파괴범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없애야겠구나.”
갓 신혼의 단맛을 맛보고 있는 이드에게는 악마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다.
그러나 라미아가 그런 이드를 말렸다. 쿼럴을 잡아야 놈에게서 떨어지는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쿼럴을 잡는 방법에 따라 각각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다른데, 몸의 중심을 시작으로 순간에 잡아내면 사로잡힌 심장이 나오고 머리를 하나씩 처리하면 외면하는 눈이 나온다. 사로잡힌 심장은 멀리 떨어진 한쪽을 소환할 수 있게 만들고, 외면하는 눈은 소지자들을 절대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드가 보기에는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라미아는 사로잡힌 심장을 강력하게 원했다. 굳이 들어주지 못할 부탁은 아니라 이드는 좀 더 몸을 움직이기로 하고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머리에 철황포를 박아 넣었다. 마지막 남은 머리가 사라지자, 왕의 몸이 한순간에 십 미터 크기로 줄어들고 남아 있던 두 머리의 이마와 턱으로 어른 키만 한 뿔이 솟아 나왔으며 기운도 단순한 검은 마기에서 좀 더 복잡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상대가 변신 중일 때는 기다려준다는 무언의 약속을 깨고 쿼럴의 몸 중앙을 찔러 버렸다. 그리고 수라섬광단의 붉은 검광으로 쿼럴의 전신을 난자했다. 막 변신을 마치고서 몸이 굳어 있던 쿼럴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순간 몸이 굳은 쿼럴의 목을 일라이져가 간단히 베어버렸다. 이백 미터일 때와 지금의 목 굵기는 거목과 나무젓가락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덩치가 컸다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조심해야 할 상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기가 줄어들면서 이드에게는 오히려 쉬운 상대가 되어 버렸다. 분명 히드라보다 강력한 마수이기는 하지만 이드에게는 오십보백보인 존재였다.
몸에서 분리된 두 개의 머리는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급히 날아 내려온 라미아의 말로는 원래 남는 보물을 제외하고 녹아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마법의 불을 일으켜 쿼럴의 남은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법의 불에 쿼럴의 몸은 순식간에 검은 잿더미가 되었다.
[아마, 사로잡힌 심장이 이 어디쯤 있을 거예요.]
이드의 어깨에 오른 라미아가 쿼럴의 중앙 부분을 가리켰다. 그런데 말하는 투가 묘했다.
숲 한가운데 생겨버린 공터를 바라보고 있던 이드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라미아를 돌아봤다. 지그시 바라보는 라미아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 부근에서 찾으면 된다고요.]
“내가?”
[에헤헤. 이드 부탁해요. 지금 모습으로 제가 찾을 수는 없잖아요. 네? 네?]
영 내키지 않아 하는 이드의 모습에 라미아가 양 날개로 이드의 얼굴을 잡고는 볼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이럴 때는 라미아에게 일승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이드였다. 특히 반짝반짝 자신을 바라보는 라미아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드가 결국 고약한 노린내를 피우는 잿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로잡힌 심장은 호두알 크기의 붉은 보석이라고 했어요.]
“뭐야, 그렇게 작아?”
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짚더미에서 바늘 찾는 레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해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잿더미 속을 하나하나 바닥까지 뒤져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드는 잠시 코를 막고 검은 덩어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쩐지 본 경기보다 뒷정리가 더 난감한 시온의 왕이었다.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게 만드는 것은 생명이 걸린 위기 상황이다.
진입하는 데만 며칠이 걸린 숲을 단 하루 만에 돌파해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몬스터와 한마음 한뜻으로 도망치긴 했다지만 경악할 만한 속도였다.
하기사 등 뒤에서 세상을 무너트릴 기세로 요동치던 거대한 히드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런 초인적인 힘 정도 내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몬스터들과 인간이 별 탈 없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질 수 있었다. 몬스터는 그대로 주변의 산과 숲, 페이라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시온의 몬스터 밀도가 확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한데 모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며 몬스터들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를 못 본 척 각각의 세력으로 헤쳐 모여 흩어졌다.
함께 고생한 잠깐의 동지애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지치고 힘들어 더 이상은 싸우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여기에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빌어먹을, 그런 괴물이 시온에 살고 있을 줄이야. 시온의 이름이 악명 높은 이유가 있었어.’
흩어지던 사람들은 시온을 돌아보며 한마음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상부에는 뭐라고 보고하지? 미친 몬스터 떼에 거대 괴수 히드라? 믿어 줄까?”
그리고 한뜻으로 걱정했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다른 팀과 다르게 홀로 시온에서 멀어지고 있는 버락이 그랬다.
“절대, 후계자다!”
도망가다 돌아본 중에 히드라와 싸우고 있는 작은 인영을 확실히 확인한 버락이었다. 그것이 후계자인지, 다른 사람인지, 엘프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는 무조건 후계자여야 했다.
“빌어먹을, 그런데 왜 통신은 아직도 안 되는 거야!”
부하도 없이 먼 거리를 직접 움직일 생각에 짜증이 겹치는 버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