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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96화


833화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무언가 확신 같은 예감이 들 때 말이다. 벨 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를 알 것 같은 그런 때,

이드는 검은 마수의 꼬리에 달려 달그락거리는 상자에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우리 못생긴 고양이가 희한한 방울을 달았네.”

폭.

말과 함께 이드는 손바닥에 만들고 있던 푸른 불꽃을 껐다. 이 작은 꼬마 불꽃은 머리를 잘라도 다시 나고, 몸통에 구멍을 뚫어도 아무렇지 않게

재생하는 검은 마수를 통째로 날려 버리기 위해 광열파의 한 조각을 떼어 낸 것이다.

자르고 부숴도 죽지 않는 이런 놈은 이드도 처음이었기에 준비한 특제 불꽃이었다.

그런데 묘한 예감이 이드의 손을 막고 검은 마수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내가 그 구슬 좀 보고 싶은데 말이다.”

움찔.

“뭐야. 설마 알아들었냐?”

“캬하악!”

검은 마수가 몸을 낮추고 하악질을 했다. 고양이라고 했더니 지가 진짜 고양인 줄 아나.

“그래. 모를 줄 알았다.”

말과 함께 이드가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검은 마수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는 전신에서 검은 창을 뽑아낼 때 이드는 벌써 놈의 엉덩이를 반쯤 잘라 내고 있었다.

“엉덩이 좀 빌리자.”

“끄와와!”

검은 마수가 검은 창을 뽑아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애초에 놈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드는 태연히 엉덩이 살 분리를 마쳤다.

놈의 창을 여유롭게 피한 이드는 엉덩이째로 잘린 놈의 꼬리를 움켜쥐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풀썩.

“응?”

그와 동시에 꼬리를 잃은 검은 마수가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머리를 자르고 허리를 분질러도 죽지 않던 놈이, 엉덩이 살을 잘랐다고 죽다니. 이드는 갑자기 화가 나려고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

그 순간 이드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손에 잡혀 있던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두툼하게 잘린 엉덩이 살이 급격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몸통은 무너지고 거기서부터 재생? 설마 엉덩이가 본체는 아니겠지?”

엉덩이가 본체라니. 도대체 그건 뭐 하는 생물인가! 이름 모를 마수 놈이 마계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있다.

뭐, 그런 남의 사정은 아무려면 어때. 문제는 머리카락 자라는 인형처럼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재생 능력을 가진 이놈이지.

이드는 다시 검을 들어 이번엔 살이 아니라 상자를 깎아 내는 느낌으로 상자와 검은 마수의 살덩이를 완전히 분리시켜 봤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잘라 낸 엉덩이와 꼬리가 잿더미로 변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상자에 검은 마수의 살이 이슬처럼 맺히더니 곧 뱀의 머리 수십 개가 되어 이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과연 상자가 본체냐. 엉덩이보다는 낫네.”

과연 어떤 부분이 낫다는 것인지 밝히지 않은 이드는 수십 개의 머리 중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머리들을 잘라 내고는 반대쪽으로 검은 마수를 재생하는 상자를 향해 손을 내밀어 허공을 움켜잡았다.

털컥!

순간 공격과 동시에 이드에게서 떨어지려던 검은 마수의 상자와 꼬리가 허공에 멈췄다. 이드가 허공섭물의 진기로 상자와 꼬리를 속박한 것이다. 

“그래도 신기하네. 마수의 본체가 상자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과연 마수라고 해야 하나?”

순간 생물의 한계에 대한 고찰에 빠질 뻔한 이드는 허공에 뜬 상자를 끌어당겼다.

이드 앞으로 당겨 온 상자와 검은 마수의 살덩이는 한데 뭉쳐 부르르 떨었다. 놈은 어떻게든 커다랗던 육체를 복구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이드의 내력이 보이지 않는 구속구가 되어 철벽처럼 육체의 확장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덜덜덜.

푸쉬익.

다다닥.

이드는 검은 살덩이가 지금까지 보였던 모든 재주를 꺼내며 탈출하려는 모습을 여유 있게 구경했다.

특이점을 넘지 않아 강기로 변화하지 않았을 뿐, 안에서 포탄이 터져도 깨지지 않을 만큼 기막은 단단했고 또 그만큼 내력의 조성도 안정되어 있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몇 달도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니 아무리 지랄해도 소용없다. 더구나 지금은 덩치가 작아서 원래만큼의 근력을 낼 수도 없다고.”

거기에 처음의 그 거체였다고 해서 제압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저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는 일이라면 드래곤 하트를 가진 이드도 자신이 있다.

“그럼 이제 상자 안에 든 진짜 낯짝을 좀 볼까?”

이드는 상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 개의 상자는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깨알만 한 룬어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정도야 짐작한 사실이고, 문제는…… 이거 뚜껑이 어디야?”

안에서 영원히 나오지 말라는 뜻인지, 꺼내 주지 않겠다는 뜻인지. 이드가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도저히 상자를 열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뚜껑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고, 막혔으면 뚫으면 된다.

찌이잉~

상자를 감싼 기막 안쪽에 솟아난 기검이 통조림 뚜껑을 따듯 상자의 한 면을 댕강 잘라 냈다. 따로 검을 들 필요도 없었다. 이드의 의지가 기우는 방향에 따라 기막이 곧 기검이고, 기검이 곧 기막이 되는 것이니까.

마법이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작은 불꽃이 튀긴 했지만, 애초에 그 정도 힘과 방법으로 막을 수 있는 기검이 아니었다.

새로운 뚜껑을 만든 이드는 조금의 찝찝함과 큰 호기심을 가지고 상자의 뚜껑을 열어 안을 살폈다.

“크윽, 젠장.”

그 직후 이드의 얼굴이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치미는 욕지기를 애써 누른 이드는 상자 안을 다시 살폈다.

상자에 든 것.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그것도 단순한 머리가 아니라 끔찍한 형태의 머리였다.

눈이 있던 자리는 검은 구멍이 되었고, 두피와 두개골은 절개되어 회색 뇌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상자에서 뻗어 나온 검은 혈관 같은 것이 거머리처럼 늘어붙어 있었다.

일반인이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할 끔찍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반인과 달리 더욱 끔찍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미친! 차라리 편하게 죽일 것이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바로 상자 안의 머리만 남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부디 제정신이 아니길 빌지만 분명 때때로 경련하는 근육이나 희미한 생명력은 분명 이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연 이드의 눈이 남은 두 개의 상자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는 앞의 상자와 똑같은 형태인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이드는 생명의 관에서 본 인간과 결합되어 있던 몬스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자연적으로 생각이 그쪽으로 이어졌다.

조금 더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검은 마수와 상자 안의 머리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이 그쪽으로 이어지자 자연 상자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짐작이 갔다.

“초인인가. 도대체 미완의 마탑, 이 빌어먹은 미친놈들은 인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꼴을 보면 초인의 발생 초기, 마법사들의 연구 대상으로 사냥당하고 수집당한 초인들이 어떤 흉한 일을 당했을지 상상이 갔다.

특히 당시는 전 대륙적으로 일어나던 일이니만큼, 그중에는 지금의 광경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법으로 그런 일을 금하고 있지만, 당시 그 끔찍한 시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기록을 통해 당시의 참상은 전해졌을 터.

이드는 어쩐지 마법사에 대한 초인의 적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지독한 불신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다.

“초인파 놈들은 여기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초인들을 지원해 준 건가?”

의문이긴 했지만, 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알고도 넘겨줬을 것이다. 바보들이 모인 집단도 아니고, 제국의 실권을 놓고 싸우는 자들이 이런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이런 끔찍한 일보다, 이후에 올 달콤한 열매만이 보였을 것이다.

이드는 다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

같은 초인에게 배신당했을 상자 안의 머리를 불쌍하게 바라보던 이드는 곧 혀를 차고는 앞을 보았다.

화르르륵.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백색의 불길이 생겨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력을 태워 피워내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불 중 하나인

삼매진화였다.

이드는 상자에 든 머리만을 꺼내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끔찍한 생명을 이어 가던 세 사람의 머리가 불길 안에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악취가 진동하는 상자와 이드에게 막혀 재생도 하지 못하던 검은 살덩이. 그것은 세 사람의 머리가 사라지자 갈색 연기도, 검은 창도 만들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드는 어쩌면 갈색 연기와 검은 창 같은 것이 마수의 것이 아니라 초인들의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 사람의 머리가 남아 있어도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머리만 남은 사람들에게 당신 초인기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화장을 마친 이드는 이번엔 그 자리에 상자와 검은 살덩이를 놓고 다시 불길을 피웠다. 앞서 백색 차분한 불과는 달리 이번의 불길은 차가운 푸른색에 거칠고 사납게 타올라 상자와 검은 살덩이를 태워 버렸다.

이후 올 토벌대를 생각해서 상자는 증거로 남겨 둘까 생각했지만 역시 아니다 싶었다.

이 상자를 손에 넣은 제국이나 마법사들이 연구를 명목으로 똑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초인으로 검은 마수를 만드는 기술이 대륙에 꼭 필요한 기술도 아니고,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물건은 분란이 되기 전에 처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검은 살덩이는 물론이고 상자까지 쇳물조차 남기지 않고 검은 연기로 만들어 버린 이드는 혹시 검은 마수와 연관된 것이 있는지를 살피고는 검은 나무 주변에 있던 시체와 백골 앞에 섰다.

“아무래도 이쪽은 감시조가 확인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이들도 화장해 버리면 혹시 있을지 모를 다잉 메시지도 같이 사라져 버릴지 모르니까. 물론 있다면 말이지만.

이드는 시신들의 안식을 뒤로 미루고 전투를 피해서 던져둔 조원들을 챙겼다.

그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드는 그들을 바로 깨우지 않고 탐색 때의 벤처럼 공중에 띄워 들고서 알단테를 찾아 산을 내려갔다.

먼저 내려보낸 알단테는 산 아래 있지 않고, 숲을 조사하고 이드와 합류하기로 했던 곳까지 물러나 있었다.

산 위에서 들리는 폭발과 폭음 때문에 적들이 몰려올 것을 피해 물러선 것이다.

“적이 몰려오진 않았지만, 정확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런 큰 소란이 있었는데도 달려오는 적이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그만큼 그 마수를 믿고 있거나, 그놈 한두 마리가 없어져도 그 뒤가 있다는 자신감이겠지. 자, 이걸로 해독은 끝났다.”

이드가 마지막 조원에게서 손을 뗐다.

알단테가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섯 명을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단장님이 아니었다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단장이 조원들을 책임지는 건 당연한 거야. 그보다 조원들이 깨어나면 최우선으로 마수 주변에 있던 시신을 살펴.”

“물론입니다. 명예로운 제국 병사들의 마지막은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래도 그들과 치털링 감시조의 원수를 단장님이 갚아 주셨으니 원은 없을 겁니다.”

“글쎄. 그건 어떨까?”

“예?”

“치털링 감시조에 남은 치흔은 두 개였잖아.”

“아!”

“이놈은 큰놈이었으니, 아직 작은놈이 남았어. 무엇보다 진짜는 마수를 부리는 놈이고, 제대로 복수를 하려면 그놈을 잡아야 해.”

이드의 말에 어금니를 꽉 깨문 알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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