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0화
477화
숯덩이가 되어서 마을로 돌아온 이드를 반긴 것은 아쉽게도 따뜻한 일리나의 미소가 아니라 마을의 엘프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에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돌무덤으로 변해 버린 제단의 모습도 함께.
현장을 목격한 라미아는 수십 년 후 마족이 소멸할 때에나 발생할 현상이라고 했다.
“그럼, 마족이 소멸한 거야? 아, 아니겠구나. 그랬으면 저 인간이 저러고 있을 이유가 없겠구나.”
누구는 나가서 생고생을 하고 왔는데, 어떤 인간은 눈곱만큼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래도 좀 믿어 볼 결심을 하고 풀어 줬더니 사고나 치고 앉았다. 그것도 이드 개인의 판단으로 풀어 준 인간이 마을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봉인에 사고를 쳐 놨으니 고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스터!”
엘프들의 중심에서 천고의 죄인인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단은 이드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한껏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여자도 아니고, 시커먼 남자의 애절함은 같은 남자인 이드 입장에서 더러울 뿐이었다.
이드는 잠시 에단과 봉인, 그리고 우디를 포함한 엘프들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우디에게 슬쩍 한마디를 남기고 휙 하니 돌아섰다.
뒤에서 에단이 정말 다급하게 이드를 불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있는지 방금 전까지도 에단의 눈에는 여유가 보였다. 설마, 저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자신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는 좀 생각이 달라졌으리라.
‘어디 고생 좀 해 봐라. 고생고생해서 봉인을 고쳐 놨더니 그걸 완전히 무너트려 놔?”
딱 봐도 원상태로 돌리기엔 늦은 일이었다. 거기다 포위는 하고 있다지만 당장 무슨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에단에 대한 가벼운 훈계도 목적이었지만 우선은 샤워가 급한 이드였다.
“마, 마스터! 가지 마세요!”
왜 이렇게 귀가 웅웅거리는지 모르겠다. 귓속에도 잿가루가 들어갔나 보다. 이드는 에단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샤워를 하고 돌아온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수호수의 가지와 정령수의 가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이드와 함께 몬스터 몰이로 고생한 정령수의 가지는 이드처럼 샤워를 한 것인지 정령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잿더미 속만 뒤지지 않았다면 이드도 딱히 급하게 샤워를 할 필요는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돌아오신 거예요?”
왕을 잡은 후 몬스터 몰이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거의 끝나간다고, 올 필요가 없다는 페르디움의 말에 정령수의 가지보다 일찍 마을로 돌아온 이드였다.
“아, 좀 전에 도착했다. 너도 고생했다. 설마 왕이 그렇게 변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몬스터를 몰고 있던 페르디움은 이드가 향한 곳에서 들리는 땅울림과 자신의 기억보다 네 배 이상 거대해진 왕의 모습에 여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거대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덩치에 페르디움은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저 덩치가 마을을 덮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악마 결계가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왕을 막아 줄 수 있을지, 아니면 막지 못하고 마을을 왕 앞에 내다 바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몬스터는 그냥 두고 이드에게 합류할까도 생각했지만 라미아의 걱정 말라는 말과 이드의 실력을 믿고 몬스터 몰이를 계속했다. 여전히 마음의 한쪽은 이드와 왕에게 두고 말이다.
다행히 이드는 그의 믿음대로 무난하게 왕을 처리해 주었다.
“저도 그런 거체는 처음 봤어요. 라일로시드가보다 크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그분보다는 작은 듯한데… 그것보다 악마 결계가 사라졌다.”
나름대로 마을에서 카리스마 있다고 평가되는 페르디움 이었지만, 그도 감히 라일로시드가와 몬스터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조율자이자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을 감히 어디에 비교할까. 페르디움은 대충 이드의 말을 넘기고는 말을 돌렸다.
“네, 저도 돌아오면서 알았어요. 봉인도 부서져 있고요. 이번 일은 제 잘못인 것 같아요. 괜히 저자를 풀어 놔서는.”
이드는 심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의도적으로 일을 벌인 것 같지는 않지만, 저자를 내어놓은 건 성급한 일이기는 했다.”
역시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엘프다운 말이었다. 이드도 잘잘못이 확실한 그의 말이 편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했기에 봉인이 저렇게 된 거래요?”
“그건 내가 이야기해 주마. 외부와 연락을 끊고 살면서 쌓였던 사건들이 한 번에 일어나는지, 네가 오고 나서는 꽤나 시끄럽구나.”
어느새 다가온 우디가 말했다. 연이어 일어나는 소동에 이드를 탓하는 듯했지만 정작 우디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죄송합니다.”
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우디의 표정과 상관없이 지금 이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일단 이드가 에단을 마을로 데려온 만큼 그에 대한 관리도 이드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죄송할 건 없다. 나는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 골칫덩이가 마을에서 사라지게 될 것 같고 말이다.”
우디가 말을 하며 에단을 바라봤다. ‘골칫덩이’가 마을에 발을 들인지 삼 일 된 에단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드가 봉인 쪽을 한 번 보고는 말했다.
“소멸한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보기엔. 봉인에서 끌려 나와서 저 남자의 몸으로 들어간 것 같아. 그런데 그 느낌이 봉인과도 닮았단 말이야. 묘하지 않나?”
묘하다. 며칠 전 손보면서 확인까지 했던 봉인을 부수고 나와서는 에단의 몸에 다시 봉인되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일단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어서 지금 베르디와 라미아가 다시 확인하고 있으니, 곧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
그러고 보니 샤워를 하러 가면서 일리나와 함께 기다리겠다던 라미아가 베르디와 함께 에단의 얼굴 앞에서 날고 있었다. 에단의 주변에는 누가 만들어 냈는지 모를 마법진 세 개가 번쩍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끝났나 보네요.”
잠시 후 이드의 말대로 마법진이 사라지고 에단과 몇 마디를 더 나눈 라미아가 이드를 향해 날아왔다.
[이드! 저 인간이 사고 제대로 친 것 같아요.]
에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라미아의 말은 가차 없었다. 처음부터 좋지 않게 라미아에게 찍힌 탓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봉인이 풀린 건 아니지?”
내심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마을이 이렇게 조용하고, 우디의 얼굴이 지금처럼 편안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라미아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에요. 봉인은 풀렸어요.]
“…………뭐? 그럼 큰일 아니야?”
이드가 놀라 물었다. 우디를 제외하고 옆에 있던 페르디움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저 인간과의 계약으로 다시 묶여 있어요.]
“어떻게? 도대체 무슨 수로 봉인되어 있는 놈과 에단이 계약을 한 건데?”
봉인으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존재가 계약이라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에단에게 그런 재주가 있어서 계약을 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눈치가 빠른 사람인 만큼 이런 위험한 일을, 이렇게 무리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은 이드의 생각대로였다.
[그래서 물어보고 확인해 봤는데요, 며칠 전에 이드가 상대한 마족의 사념 있죠? 그때 작은 조각이 마을 밖으로 도망갔잖아요. 아무래도 그중 하나가 에단에게 들러붙은 것 같아요. 같이 있던 마법사가 쫓아내지는 못하고, 단순히 시온에 살고 있는 미확인 요정이라고 생각하고 계약을 진행한 모양이에요. 계약자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계약을요. 성급하고 바보 같은 짓이죠.]
라미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에 죽을 것 같은 상황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일을 진행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럴 때는 수준 높은 마법사나 신관을 찾아서 정화 의식을 통해 처리해야지, 정체도 알 수 없는 존재와 계약하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위험한 짓이었다. 열에 아홉은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나마 계약 내용이 철저하게 계약자에게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는 내용이라서 다행이었어요. 아니었으면 이번에 저 마족이 제대로 봉인에서 튀어나와서 날뛰었을 테니까요. 에단의 영혼이 잡아먹히는 것은 당연하구요. 아무튼 에단 안에 자리 잡은 사념과 접촉하면서 봉인에서 탈출한 것 같아요. 동시에 사념이라곤 하지만 이미 계약되어 있던 내용이 계승되면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봉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계약을 이행 중이에요.]
“그럼 이대로 안전한 거야?”
계약대로라면 마족은 봉인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에단이 갑자기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글쎄요.]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슬쩍 말꼬리를 늘리며 에단을 돌아봤다.
라미아의 이야기를 같이 들은 에단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진행한 계약이 마족과의 계약이었다니. 에단은 가볍게 이야기하던 막내 마법사 놈을 당장이라도 찾아서 반쯤 죽여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이어질 라미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념일 때는 모르겠지만, 이제 완전해진 마족에게 빵 한쪽은 계약의 대가로 너무 약해서 이후에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도장을 찍어 버린 만큼 무르지는 못하겠지만, 차후 클레임이 없을 거라고 확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힘 있는 귀족들에게 그런 계약은 종잇조각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에단이 급히 물었다.
“저, 저기 그 계약을 해지할 방법은 없겠니?”
스스로의 위치를 재인식한 덕분인지 라미아를 향한 말투부터 바뀌어 있는 에단이었다.
[계약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상대가 원할까요? 그 방법 이외에는 없어요.]
“그런・・・・・・ “
그러나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에단이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절망했다.
[뭐, 너무 걱정 말아요. 운이 좋으면 당신이 죽을 때까지 아무 문제도 없을 수 있어요.]
너무 심각한 그 모습에 라미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우디는 라미아와 베르디를 통해서도 자신과 같은 결론이 나자 모여 있던 엘프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동시에 마을에서 봉인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을 기념하는 저녁 파티를 준비시켰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의 실사판이었다.
며칠 사이에 다시 벌어지는 파티에 엘프들이 시끌벅적하게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우디가 조용히 이드와 일리나와 라미아, 그리고 베르디와 페르디움을 불렀다.
그들은 에단과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 움직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생각에 마족이 저 남자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조용히 마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아.”
우디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한두 달도 아니고 오랜 세월 봉인해서 소멸시켜 가고 있었다. 원한이 깊을 테다. 그러니 쉽게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계약을 이룬 상태야. 이대로 특별한 변동 사항 없이 저 남자가 수명대로 살고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마족도 자연스럽게 마계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렇죠.”
“하지만 놈이 무슨 수를 강구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또 저 남자가 욕심 부릴 만한 조건을 제시해서 계약을 갱신할 수도 있습니다.”
베르디가 말했다.
“함부로 처리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마계로 돌아가기까지 잠시의 시간만 있어도 마을에 큰 피해가 있을 겁니다.”
페르디움의 말이었다.
우디는 그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단 저 남자와 밖으로 나간다니 네 역할이 크다. 부디 저 남자가 엉뚱한 짓을 하지 않도록 잘 감시하고, 마을로는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없도록 잘 부탁한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에 폭탄까지 떠안게 된 이드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단을 바라보며 작게 이를 갈았다.
“걱정 마세요. 마을이 있는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놓겠습니다.”
“믿겠다.”
우디는 에단을 향해 살벌하게 타오르는 이드의 눈에 어떤 수단을 쓸지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 않았다.
“그럼 에단의 일도 있고, 최대한 빠르게 출발하겠습니다.”
폭탄이 마을을 나간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세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럼 빨리 돌아가서 짐이나 싸죠.”
이드가 라미아와 일리나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러고는 정신을 놓고 있는 에단의 목덜미를 달랑 잡아 들고는 일리나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결국 에단 덕분에 길지 않던 신혼 생활이 더욱 일찍 끝나 버렸다. 이드는 그 원한을 결코 잊을 생각이 없었다.
‘계약 갱신? 마족에게 홀려? 내가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없도록 만들어 주마.’
질질질.
이드에게 잡혀 가는 에단의 흔적이 길게 땅에 남아 이어졌다.
퍽!
한쪽눈알이 터지는 고통에 버락이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이런 병신 같은 놈. 치워!”
채챙!
버락의 눈에 칼을 꽂은 남자는 칼을 던져 버리고는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칼과 함께 버락을 끌고 문밖으로 나갔다.
질질질ᅳ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바라보던 남자가 몸을 돌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후계자라.”
톡톡톡.
남자가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