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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09화


846화

‘저 전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이드에게 순식간에 당해 버린 자신이기 때문에 안다. 저 전력으로는 이드를 이길 수 없다.

거기에 자신의 허락도 없이 몰래 달아 놓은 혐오스러운 마커라는 것까지 들켜서 엉뚱한 곳으로 유인당하고 있는 놈들이 자신을 구출해 줄 수 있을까?

프리실라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지. 오히려 전멸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구출될 가능성이 없으니 우선 자신부터 살고 볼 일이다.

고개를 들던 프리실라가 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추적자가 생겼는데도 긴장은커녕 여유 있게 웃는 모습에 재차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는 얼굴이 있다고?”

이드는 치열하게 고민하던 프리실라가 결심을 한 듯하자 물었다. 두 개뿐인 선택지에서 그녀는 어느 쪽을 택했을까.

“이름은 베일록. 나와 같이 정신의 관 장로인 자다.”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계속적인 협조를 선택한 것 같다.

이드는 협조적인 그녀의 태도에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장로라니, 거물이 나왔네. 누가 베일록이지?”

“제일 앞에 있는 꼽추가 베일록이다. 미친 스토커 새끼. 감히 내게 마커를 붙여? 어쩐지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고. 꼽추 따위가 감히 누굴 넘봐!”

프리실라는 영상 속 베일록을 향해 부득부득 이를 갈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의 외모를 보자면 베일록이 아니라도 누구나 반할 만한 늘씬한 미녀이기는 했다. 침침한 지하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어두운 인간들 속에 화사한 미녀가 있으니, 마법사 이전에 이성으로서 호감이 생기는 것은 비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자연의 이치. 베일록의 호감이 정도를 넘었을 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뭐, 모든 문제가 정도를 넘는 것에서 생기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기가 많았나 보죠?”

마법 영상을 지운 라미아가 물었다.

“당연하잖아? 나처럼 강하고 아름다우면 인기 있는 게 당연하지. 지금이야 이 꼴로 당신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지만, 정신의 관에서는 아이돌이었어. 매일 날 보려고 내 연구실 앞에 줄을 섰었단 말이야.”

“오~ 대단하네요.”

라미아가 작게 환호하자 프리실라가 우쭐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포로가 되어 사지가 박살 났어도 자존심은 살아 있는 것 같다.

이드는 한편에서 그 모습을 기가 막힌 듯 바라보다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팬이 많은데 구하러 올 사람이 없다고 한 건 뭐야? 정작 팬심은 별 볼 일 없었나 보지?”

“호호호.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정신의 관은 마법에 미친 인간들이 모인 곳이야. 아이돌과 팬 놀이는 잠깐의 유희일 뿐이라고. 유희에 목숨을 바칠 멍청이가 세상에 어딨어?”

“여기.”

이드와 라미아가 기다렸다는 듯 영상 속 베일록을 손으로 가리키자 프리실라가 재수 없다는 듯 탁, 하고 침을 뱉었다.

“그 새낀 미친 스토커고!”

“그럼 이 베일록이라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누구지? 이 중에도 장로가 있나?”

“장로는 없다. 아는 얼굴은 몇 있는데, 모두 베일록의 제자인 걸 보면 나머지도 다 그놈의 제자일 거다. 아무리 미친 스토커라도 내가 당했는데, 겁 없이 혼자 나오진 않겠지.”

“무슨 제자가 이렇게 많아? 정신의 관에 마법 학교라도 있나?”

이드가 놀라 물었다. 무슨 마법 학교의 교수도 아니고, 서른 명이 넘는 제자라니. 일반적으로 일대일 교습법을 택하는 무공이나 마법의 성격상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제자의 숫자였다.

“있을 리가 없잖아. 제자가 많은 건 저 스토커 놈의 변태스러운 마법의 모자란 부분을 숫자로 채워서 그런 거다.”

변태스러운 마법이라.

그러고 보면 프리실라의 마법도 일반 마법사들의 마법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변태스럽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베일록의 마법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정신의 관에 있는 마법사들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점이 변태스러운지 말해 줄 수 있나?”

곧 싸워야 할 상대에 대한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이드는 이어질 답에 귀를 기울였다.

“흣, 이제 와 새삼스럽게 묻는 건 뭐지? 일단 미친 스토커를 엿 먹일 수 있는 일이니 기쁘게 말해 줄 수 있긴 하지만.”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물어 놓고 새삼스러운 질문이긴 하다. 쿡쿡 웃던 프리실라는 곧 그녀가 알고 있던 베일록에 대한 모든 것을 꺼내 놓았다. 의외로 그녀는 베일록에 대해서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드가 그 점이 이상해 묻자 프리실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알고 싶어 아는 게 아니라 억지로 알려 줘서 아는 거라고. 괜히 변태 스토커라고 하는 게 아니다.”

상대를 나만의 색으로 천천히 물들이고 싶다는 스토커의 심리는 스토킹당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것이었다. 분명 싫어하는 상대인데, 그런 상대에 대해 알아 가는 만큼 심리적인 거리감은 줄어드는 느낌을 받아야 하니까. 물론 그녀가 베일록의 마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오로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마법이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모인 만큼 다른 마법사들의 연구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토커의 스토킹과 마법사의 호기심의 환상적인 콜라보라고 할까?

뭐, 이드야 덕분에 질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감사하게 잘 쓸 뿐이지만 말이다.

“슬슬 도착했으려나.”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겠다. 베일록과 제자들이 마커를 둔 곳 가까이 접근했을 거라 짐작한 이드가 일어났다.

두 번째 포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물론, 이미 훌륭하게 협조적인 첫 번째 포로가 있으니, 두 번째 포로의 가치는 비교적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저기…….”

그런 이드를 프리실라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딱 봐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습이다.

“왜 부탁할 거라도 있나?”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도 있으니, 어지간한 것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살려 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대가가 있어야 앞으로도 협조적일 테니까.

그런 이드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프리실라가 불쌍한 얼굴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큰 건 아니지만. 손이 잘린 상처. 좀 더 붕대를 감아 주면 안 될까? 당신이 점혈이란 걸 해 준 덕분에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볼 때마다 괴로워.” 잘린 손을 보는 것이 괴롭다니. 초인의 머리만 잘라 상자에 넣어 다니던 여자가 하기에는 심약한 발언이지만. 어차피 인간이란 남이 칼에 찔린 상처보다 자기 손톱 밑의 가시에 더 아파하는 법이다.

“잘 협조해 준 것도 있으니. 그 정도는 해결해 주지.”

이드는 바로 라미아의 아공간을 뒤져 붕대 대신 찾은 엄지장갑으로 프리실라의 손목을 가렸다.

“붕대보다는 이게 나을 거다.”

“고, 고맙다. 그런데 해 주는 김에 다리도 치료해 주면 안 될까?”

뼈가 산산조각 난 프리실라의 한쪽 다리는 조원들이 만든 부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다리까지는 아직 곤란해.”

손이야 이미 잘려서 재생할 수 있는 수단을 찾기 전에는 어쩔 수 없다지만, 부서진 다리가 멀쩡해진다면 바로 도망갈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많지 않은 조원들이 돌아가며 감시하고 있는데, 괜히 피곤해질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단숨에 거절하고 돌아서는 이드에 프리실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망갈 생각도 없는데 좀 고쳐 주지…”

처량하게 중얼거린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가 무슨 수로 훈련된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겠는가. 프리실라는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타입으로, 리스크가 크다면 확실한 가능성이 있지 않은 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드나 조원들이 그녀의 성격을 알 수는 없는 일.

‘좀 고쳐 주지. 도망가지 않는데. 볼일만 좀 편하게 보려고 그런 건데・・・・・・’

문득 손 대신 눈에 들어온 엄지장갑에 갑자기 서러워진 프리실라가 눈물을 찔끔거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라미아, 일리나와 함께 머리를 모으고 있었다.

“이동하는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마커를 둔 곳 가까이 도착했겠지?”

“어떻게 할 생각이죠? 모두 포로로 잡아 두면 지금 인원으로는 관리할 수 없을 거예요.”

아무리 잘 묶어 둔다고 해도 여덟이서 서른이 넘는 인원을 감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프리실라처럼 사지를 분질러 놓을 수도 없다. 그 순간 포로가 아니라 환자 서른 명이 생기게 될 테니까.

포로보다 더 신경 쓰이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이 환자다. 당연히 이드도 그런 고생을 사서 할 생각은 없다.

“당연하죠. 무엇보다 이미 저렇게 협조적인 포로가 있는데, 일부러 살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항복한다면 몰라도 죽겠다고 달려드는 놈은 원하는 대로 해 줘야죠.”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일록은 생포하는 게 좋지 않아요?”

“그럼 좋기는 하지. 아무래도 장로니까 제자들보다는 아는 것도 많을 테고.”

보통은 생포한 후에 두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교차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날 때부터 거짓말 탐지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엘프인 일리나가 있으니, 교차 검증의 필요성은 없었다.

“그래도 도착할 토벌대를 생각하면 교차 검증이 필요하긴 하겠어. 확인 작업 없이 프리실라의 정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바로 갈까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일리나는 프리실라와 조원들을 지켜 줘요.”

“맡겨 줘요.”

일리나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이드는 어쩐지 매번 일리나만 남겨 두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믿음직한걸.

이드는 마주 손을 흔들어 준 후 라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자.”

이드의 신호가 떨어지자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커를 찾고 그 기능을 확인한 이드들이 마커를 옮겨 놓은 곳은 협곡에서 수 킬로 떨어진 산속이었다.

나무가 많지 않은 바위산이었는데, 협곡과 마찬가지로 숲의 끝에 솟아 있었다. 숲을 등지고 팔을 펼친 것처럼 능선이 깊어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형태였는데, 마커는 정확하게 그 안에 있었다.

마커를 확인하고, 혹시나 마커를 따라올 수 있는 적을 유인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느라 제법 시간이 지났기에 적이 속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베일록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마커를 향해 달려와 주었다.

“같이 있는 마법사는 물론이고, 프리실라 본인마저 모르게 달아 놓은 마커니까 들켰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겠죠.’

“그리고 실제 라미아 대마법사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들키지 않았을 테고.”

“에헴. 알았으면 감사하세요.”

라미아와 함께 능선 위 바위에 걸터앉아 노닥거리던 이드가 숲 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빼곡한 숲은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완전히 숨겨 주고 있었지만, 이드의 눈에는 숲을 관통하고 있는 커다란 기의 뭉치가 빤히 보였다.

“한둘이면 몰라도, 저 많은 인원이 모두 마나를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는 일이지.”

거기다 모두가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마나의 흐름은 전함이 바다를 가르듯 고요한 숲의 기운을 가르고 있어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움직이던 기운이 멈추고, 그중 작은 기운 하나가 떨어져 나오더니 빠르게 흔적이 지워졌다.

아무래도 적진으로 예상되는 만큼 정찰병을 먼저 보낸 것이다.

이드는 그 모습을 훤히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개미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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