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31화
867화
탑주라는 자. 역시 보통 뻔뻔한 인간이 아니었다.
록마틴 후작이 뭐라 말을 했지만, 듣지도 않고 영상을 지우고 사라져 버렸다. 그에 철저히 무시당했다 생각한 록마틴 후작이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때,
“워어어어!”
장식장에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몬스터들이 소리를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시체가 일어나듯 쉭쉭 거친 숨소리를 내며, 눈에서는 흉흉한 붉은 안광이 번들거리는 것이 미친 소를 보는 듯하다.
“컹! 커커컹!”
오천 마리의 몬스터가 한 번에 울부짖는 소리는 끔찍했다. 지금이 지나면 평생에 다시는 듣고, 보지 못할 모습이긴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뒤에 선 마법사들이 몬스터들을 조종하기 시작하자, 몬스터들이 토벌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오천 병력의 진군이 주는 박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준비할 여유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전투로군.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이드가 혼잣말을 하자, 쉴라가 그 말을 받았다.
“예상하고 있던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과연 그녀가 대답하기 무섭게 토벌대의 전방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긴 창을 들고 말을 탄 창기병들이 나선 것.
“기병으로 우선 적의 대열을 찢겠다는 거로군요.”
갈가리 찢어 놓으면 뒤따를 기사단이 씹어 삼키기에 딱 좋은 크기가 될 테니까. 하지만 창기병만으로는 좀 약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지휘부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록마틴 대장군님의 명령입니다. 창기병과 프랑 기사단이 적의 대력을 가르고 나면 토벌대는 삼군으로 나누어 몬스터를 토벌하라 하셨습니다.”
“확실히 프랑 기사단이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한쪽 하늘을 바라보자 벌써부터 하늘을 날고 있던 프랑 기사단이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공격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빠르게 싸우게 될 것 같습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황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용기 있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단에 황녀를 중심으로 한 호위 진형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라미아와 일리나를 황녀 곁에 배치한 후 스폴과 함께 기사단의 전면에 섰다.
“우리가 중앙 1군 소속이지?”
“네. 황녀 전하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중앙에 배치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삼면에서 적을 공격하면 중앙에 강한 압력이 걸리긴 하지만, 대신 기습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황녀가 속한 1군을 중앙에 배치한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은색 기사단의 협력은 필요 없겠지요?”
쉴라가 물었다.
아이넬 기사단과 함께 황녀의 호위 임무를 받은 은색 기사단이지만, 은색 기사단의 호위는 어디까지나 보조의 형태.
상황만 허락한다면 언제든 타 기사단처럼 앞에 나서 적과 싸울 수 있었다.
이드는 쉴라와 은색 기사단이 뿜어내는 투기를 감지하고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황녀 전하의 곁에는 라미아와 일리나가 함께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부디 즐기도록 하시죠.”
“감사합니다.”
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쉴라에게 이만큼 안심되는 답이 없을 것이다. 무려 마인드 마스터의 호위다. 황녀의 안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감사를 표한 쉴라가 은색 기사단을 이끌고 1군 대열의 1열로 나서자 그와 동시에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창기병이 튀어 나갔다.
“히랴! 히랴!”
“크워워워워!”
그러자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몬스터 대군 속에서 듣고 있으면 피가 끓어오르는 힘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크의 배틀크라이였다. 오크 대전사나, 족장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는 기술로, 부족 전사들의 전투 의지를 높이고 힘을 북돋게 하는 동시에 적의 기세를 꺾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벌대 기사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고함 소리에 꺾일 만한 말랑말랑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벌대와 반대로 오크가 속한 몬스터 대군에는 효과가 있었다.
“우워워워워!”
이드는 오크의 배틀 크라이에 화답하듯 크게 소리치는 몬스터들을 보며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왜 다른 몬스터가 배틀 크라이에 화답하는 거지? 혹시 저놈들이 전부 오크의 혼혈이라는 그런 끔찍한 건 아닐 테고.”
“아무리 오크의 번식력이 좋아도 그렇지. 끔찍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황당해서 그랬지.”
“그런데 정말 어떻게 오크의 배틀 크라이에 다른 몬스터가 반응하는 걸까요. 당장 저렇게 기세가 오르면 창기병과 프랑 기사단에서 애를 먹을 텐데.”
정확히는 전 애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드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상황에 그런 농담은 아니다 싶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어. 지금 소리 지른 오크가 초인기를 이식받았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
이미 마수에 초인의 머리를 심어 놓은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 이드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처음의 배틀 크라이를 시작으로 남은 오크 유니온의 대전사들이 연이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배틀 크라이가 마치 끝나지 않을 돌림 노래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드디어 속도를 높인 양 진영의 선두가 부딪혔다.
꽈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선두에 선 기사와 몬스터가 휘청거리며 튕겨 나갔다. 양 진영의 투기를 타고 전방으로 모여든 마나가 강력한 충돌의 충격에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틈이 벌어졌다.
“돌격하라!”
수없이 많은 훈련을 통해 단련한 창기병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숲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살쾡이처럼 창을 든 기병들이 몬스터 사이로 뛰어들었다.
“끄아아악!”
“죽어라!”
“절대 멈추지 마라! 달려드는 몬스터에 신경 쓰지 마라!”
“크어엉!”
“끄악!”
서로를 독려하던 중에 낙오자도 생겨났다.
“낙오자는 버린다! 멈추지 마라!”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낙오자를 챙기려고 시간을 끄는 순간 적진에 갇혀서 전멸당하고 만다. 창기병이 적 대열의 반을 지날 때였다. 끄아아악!
와이번의 울음소리와 함께 프랑 기사단이 창기병이 지나간 길을 따라 저공비행을 시도했다.
흐트러진 대열을 완전히 갈라 버리기 위해서다.
“커헝! 날짐승 따위가 어딜 오느냐!”
와이번이 하늘의 왕이라면, 오우거는 숲의 왕자다.
갑자기 튀어나온 오우거 한 마리에 저공비행을 시도하던 용기사는 황급히 방향을 바꿔야 했다.
놀랍게도 제법 좋은 발음으로 인간의 말을 하던 놈이 입에서 브레스를 닮은 화염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화르르르륵.
마치 화염 방사기에서 뿜어지는 것처럼 화끈하고 지독한 불길에 용기사들은 황급히 와이번의 목줄을 당겨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빌어먹을. 화염을 뿜는 오우거라니. 지가 가고일이나 드래곤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뭐야? 어떻게 저런 돌연변이가 있을 수 있지?”
급히 와이번의 상태를 살핀 기사가 아래를 보자 자신처럼 공격을 포기하고 날아오르는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기사는 자신처럼 불에 쫓기기도 했지만, 또 다른 동료들은 번쩍이는 번개, 또는 장막처럼 커다란 그림자를 피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하나도 추락하지 않은 게 다행인 상황.
“이대로는 내려가기 힘들다.”
“프랑 기사단이 힘을 쓰긴 힘들겠습니다.”
지휘부의 판단 역시 기사와 같았다. 억지로 하려면 할 수 있지만, 추락하는 용기사가 생길 수 있다. 토벌대의 전력이 약하다면 희생을 감수하고 억지로 밀어붙일 테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록마틴 후작은 즉시 토벌대의 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프랑 기사단이 뒤를 받쳐 주지 못하는 이상. 이대로라면 창기병들이 위험해진다.
그들이 적에 둘러싸이기 전에, 그리고 그들이 만든 길이 사라지기 전에 기사들이 나서야 했다.
“돌격하라!”
둥! 둥! 둥!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우와와와와!”
“가자!”
총소리를 들은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나간 기사들이 몬스터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내가 바로 임팔라 기사단의 토기스다!”
“창기병을 따라라!”
전투는 한순간에 혼전으로 변했다.
“취익! 취익!”
“어디 감히 오크 따위가 이 몸을 막아서느냐!”
까앙!
“내, 내 검을 오크가 막았다고?”
“취이익!”
혼전이 된 이유에는 몬스터들을 온전히 갈라 놓지 못했기 때문도 있지만. 몬스터 대군 속 군데군데 숨어 있는 강력한 몬스터들 때문이었다. 최소 소드 마스터에 비견되는 힘과 초인기를 이식받은 놈들이 길목을 막자 기사단의 전진이 막혀 버린 것.
“취익. 쿠쿠쿠쿠!”
부웅!
놀란 기사를 비웃은 오크가 이번엔 도끼를 휘둘러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기사를 공격했다.
쩌러엉!
기사가 황급히 공격을 막았지만, 급하게 들어 올린 검에는 온전히 힘이 실리지 못했고, 반대로 오크의 도끼에는 예상 이상의 거력이 실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도끼에 밀린 자신의 검에 상반신이 절단 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었다. 그러던 찰나.
은빛 빛무리가 번뜩이더니.
서걱!
취익거리며 웃던 오크의 대가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런 오크와 자리를 바꾸듯 은색의 갑옷을 번쩍이는 여기사들이 나타났다.
“아, 은색 기사단・・・・・・ 가, 감사합니다.”
“임팔라 기사단의 기사인가. 방심하지 마라! 오크에게 죽으면 그게 무슨 개망신인가. 황녀 전하께서 보고 계신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이넬 기사단과 황녀가 은색 기사단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기사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동경하는 여기사와 황녀 앞에서 당한 망신을 만회할 생각에 이를 악물고 무서운 표정으로 몬스터 사이에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그사이 앞으로 나선 이드가 목이 잘린 오크를 살피고 있었다.
“음. 또 새로운 형태로 초인기를 이식한 몬스터로군요.”
오크의 몸에는 상자나, 구슬 같은 특별한 장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베일록의 경우처럼 몸속에 무언가를 넣어 두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은 확인해 볼 시간이 없었다.
“이 오크는 제가 챙겼다가 지휘부에 내놓도록 하지요.”
물론 그 전에 라미아의 손을 한번 거치겠지만.
“알겠습니다. 은색 기사단은 다시 전진한다!”
“충!”
이드는 다시 충천하는 검광 사이를 지나 아이넬 기사단에 합류했다. 기사단의 기사는 세 개의 벽을 만들어 중앙의 황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드가 도착하자 숨을 가라앉힌 황녀가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해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기사단은 쐐기 형태로!”
“쐐기 형태로!”
이드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황녀의 후방과 좌우를 단단히 굳히고 앞을 열어 몬스터의 수와 공격을 조절한다.
그후 안으로 들어온 몬스터와 황녀가 싸운다.
황녀는 자신이 생각하던 형태의 전투가 아니라 불만스러워했지만 어쩔 수 없다.
대규모 전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황녀를 무턱대고 전장에 내놓았다가 무슨 사고가 날 줄 알고.
이드가 옆에 있다고 해도 실수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전장에서의 실수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법. 물가에 애를 두는 것보다 더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이런 형태를 이어갈 생각은 없다.
이드는 배움을 청한 황녀를 온실 속 화초로 키울 의도가 전혀 없었다. 가르치겠다고 허락한 이상 제대로 된 한 사람의 무인이 될 수 있도록 끌어 주어야 했다.
“좋습니다. 앞으로 두 번만 더 해 본 후 기사들과 함께 토벌에 나서도록 하지요.”
“네! 단장님.”
이드의 말에 황녀가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