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32화
868화
대륙에 무공이 뿌리내린 후,
기사로 대표되는 무인들의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단순히 고수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이 아니었다.
평균적인 수준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로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뼈 빠지게 고생해도 검기를 뿜지 못하던 용병들도, 이제는 수년 간 고려하면 검기를 뿜을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덕분에 파워 소드, 소드 마스터 등으로 무인의 경지를 나누던 등급의 폭도 좀 더 넓어졌다.
용병들이 이 정도인데, 무공의 혜택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기사들은 또 어떨까?
그것도 타국도 아니고 무공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익히고, 가르치는 소드 팰러스를 품에 안고 있는 아나크렌 제국의 기사들이라면? 서거걱!
“이봐! 그놈은 내 몫이었다고!”
“하하하. 먼저 자른 사람이 임자지.”
“그럼 그런 의미에서 이놈은 내가 가져가지.”
퍼펑!
“으앗! 내 오크!”
그렇다. 아주 그냥 전장을 제 집처럼 누비고 있다.
힘들게 싸우는 것을 넘어 자기 사냥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눈치 싸움이 몬스터와의 싸움보다 치열할 정도다.
보통 오크보다 수 배 강한 데다, 갑옷까지 입혀 둔 그레이트 오크가 경쟁하듯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에 수련용으로 만든 짚단 인형처럼 잘려 나가고, 재생력 높은 트롤이 갈기갈기 찢겨 쓰러진다.
몬스터 중에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놈이 있었다면 ‘몬스터의 지옥이 이곳이다!’라고 소리쳤을 광경이었다.
흔한 말로 압도적이었다. 이천의 병력 차이 같은 건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토벌대의 기사들은 느긋한 불도저처럼 몬스터를 깔아뭉개며 전진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황녀도 끼어 한자리하고 있었다. 전투가 손에 익었다 판단한 이드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허락해 준 때문이다. 뭐, 그래봤자 여전히 1열이 아니라 2열에 서는 정도였고, 그녀의 주변에는 아이넬 기사단의 기사들이 변함없이 바글거렸지만 말이다.
그런 가운데 이드는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넬 기사단의 뒤에서 어울리지 않게 뒷짐을 진 이드는 넓은 전장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보통은 눈에 담은 면적이 커짐에 따라 놓치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신안을 뜬 이드에게는 그런 염려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이상한데, 이렇게 허술하게 끝나지는 않을 텐데 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이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무려 탑주가 직접 얼굴을 보이며 자랑한 몬스터 대군이다. 아무리 메인 요리가 아니라 맛보기라고 말했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당하게 두는 것은 이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이드의 의심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오천이던 몬스터가 토벌대의 병력과 같은 삼천으로 줄어드는 순간. 그 현상이 일어났다.
후웅~
그것은 갑자기 온천수처럼 발밑에서 치솟아 올랐다.
이질적이지만, 거대하지는 않다. 하지만 전장의 모든 몬스터를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퍼진 기운이 몬스터에게 닿는 순간,
“크허어어엉!”
“크악! 이놈, 힘이 갑자기 강해졌어!”
트롤의 몽둥이를 방패로 막아 내다 수 배 강해진 힘에 무릎을 꿇은 기사를 시작으로, 그 변화가 일어났다.
몬스터들이 갑자기 강해졌다. 무엇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샤아아아~”
멀쩡하던 오크의 목소리가 변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독을 뿜는가 하면,
“꾸룩꾸룩.”
몇 마리 없던 그리핀은 깃털을 화살처럼 쏘아 냈다. 그런 예측 불허의 변화를 보이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싸우던 상대가 바뀐 것 이상의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적지 않은 기사가 바뀐 양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상을 당했다. 거침없이 몬스터를 밀어붙이며 전진하던 걸음도 멈춘 것은 물론이고, 어떤 기사들은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장의 주도권이 토벌대에서 정신의 관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꾸워어어억!
그 순간. 전장의 최전선 위로 와이번들이 들이닥쳐 몬스터들을 깔아뭉갰다.
동시에 음성을 증폭시킨 록마틴 후작의 목소리가 전장을 누볐다.
“10보 후퇴 후 전열 재정비! 너희는 뛰어난 기사들이다. 당황하지 마라. 그래봤자 몬스터일 뿐이다.”
“충!”
당황하던 기사들이 급히 신색을 회복하고는 큰 목소리로 답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잘 끊었네.”
이드는 전장의 흐름과 기사들의 혼란까지 한순간에 휘어잡는 록마틴 후작의 능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토벌대의 장이 그냥 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생명의 관에 대한 보고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의 경험과 능력은 진짜였다. 록마틴 후작 덕분에 토벌대가 금방 안정을 찾는 듯하자 이번엔 몬스터들 사이에서 검은 마수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프리실라가 직접 부리던 놈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흩어져 향기로 감시조를 유인해 몰살시킨 바로 그것이었다.
“역시 프리실라가 없어도 쓸 수 있는 놈들이었군.”
정신의 관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마법일 테니. 그 연구 내용이 정신의 관에 보고되는 것은 당연했다.
마수와 놈들의 향기에 대해 알리긴 했었지만, 어떻게 대비를 잘했나 싶은 순간 후방에 있던 마법사들이 나서 강력한 윈드 마법을 사용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땅에 먼지가 일어나고, 옷과 머리가 펄럭일 정도의 바람이었다.
“아하하하! 좋은 방법이네.”
이드는 핵심을 찌르는 파훼법에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확실히 향을 흡입해야 효과가 있다면, 향이 퍼지는 것을 원천 차단해 버리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처럼 밖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마탑 안으로 돌입한 후에는 어쩌려는 것일까?
닫혀 있는 공간에서는 정령이나 초인기로 바람을 부리지 않는 이상, 향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뭐・・・・・・ 따로 수단을 만들어 뒀겠지.”
이드는 고개를 흔들어 걱정을 털어 버렸다. 어차피 지휘부도 그런 대비 없이 마탑 안으로 돌입할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보다는 자신의 기사단을 챙기는 것이 먼저다.
다행이 아이넬 기사단은 아무런 피해 없이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피해가 없을 뿐 아니라 2열에서 1열로 올라서 가장 전방에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1열을 책임지던 기사단이 부상이 누적되어 후위로 물러선 때문이다.
그 속에서 황녀도 제대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뒤에는 일리나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도 황녀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 덜고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넬 기사들 중 특히 기사와 초인들의 합공은 제법 효과가 좋았다.
“저렇게 잘할 거면서 왜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에 고개를 저은 이드의 시선이 이번엔 은색 기사단을 찾아 나섰다.
은색 기사단은 실력이 뛰어난 몇몇 기사단과 함께 본진보다 한 발 앞서 적진에 파고들고 있었다.
자칫하면 적진 한가운데 갇힐 수도 있지만, 이들은 전혀 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언제든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오색 기사단. 이름값은 확실하네.”
이드는 여러 기사단 중 단연 압도적인 모습으로 몬스터를 썰어 대는 세 개 기사단의 정체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강력해진 몬스터도, 마수도 오색 기사단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금방 대응 방법을 찾아 순식간에 목을 쳐 내는 그들의 검로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쪽은 전혀 걱정할 것 없겠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려던 차였다.
“정신 차려요. 케마란!”
네리베르의 목소리가 고막을 찔러 왔다. 항상 예의 바르고 차분해 일정 정도 이상 높이는 경우가 잘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찢어질듯 높아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본 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드의 시선이 향하던 곳.
그곳에는 은색 기사단의 대열에서 빠진 케마란이 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무방비 상태인 그녀의 머리 위로 그레이트 오크의 도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네리베르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는 공격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대열에서 이탈하면, 자신까지 위험해 진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미운 정이 깊어져 우정으로 변해 버린 친구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기는 정말 싫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그 멍청한 표정을 하지 않는 거냐고요! 빌어먹을!”
하지만 아무리 간절해도 불가능은 불가능.
네리베르는 도끼가 케마란의 머리 위 한 뼘 정도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대련할 땐 검이 앞머리를 스쳐도 감지 않던 눈이지만.
친구의 머리에 도끼가 박히는 모습은 도저히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검으로 케마란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의 피와 땀. 그리고 분노를 담아. 케마란을 죽인 오크의 목을 잘라 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결심은 구름 위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감각에 놀라 흐지부지 스러져 버렸다.
“이제 눈 떠도 된다.”
“다, 단장님!”
이드가 아이넬 기사단의 단장이 되면서 케마란과 네리베르 두 사람도 이드를 단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챈 네리베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오크의 도끼를 잡고 있는 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네리베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케마란의 위기에 상당히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이다. 이드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했다.
“성급하고, 위험한 행동이야. 자칫 했으면, 케마란뿐 아니라 너도 죽을 뻔 했다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어요. 바보와 함께 다니다 보니 제게도 바보가 옮았나 봐요.”
“솔직하지 못하기는. 그리고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차라리 몸을 날리기 전에 검을 던져. 그게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보다 케마란은 갑자기 왜 이래? 마침 내가 못 봤으면 죽을 뻔했잖아.”
이드가 케마란을 보며 혀를 찰 때였다.
“취익! 그어어억! 인간. 놔라.”
이드에게 도끼를 잡힌 오크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에 분노의 콧김을 뿜으며 고함을 질렀다.
아까부터 혼자서 도끼를 움직이기 위해 끙끙거리며 힘을 쓰지만 마치 허공에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눈치가 있으면 이런 현상에 감당 불가한 상대라는 걸 알고 도망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그레이트 오크에게는 그런 눈치가 없었다.
아니, 눈치가 있어도 마법사에 조종당하고 있으니 도망은 애초에 불가능하려나.
“놔 달라고?”
“취익! 그래. 놔라! 취익! 이년의 머리를 깨야 한다!”
“알았어. 놔 주지.”
이드는 우직한 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화접목에 나자 요결로 오크의 중심을 무너트리고 허공에 띄운 후.
추자 요결로 도끼째 오크를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꾸, 꾸워어억!”
“놔 줬으니까. 다시는 오지 마라.”
짧은 작별의 말. 그 말은 분명 지켜질 것 같았다.
하늘을 날던 오크가 떨어질 장소 부근에 바짝 날이 선 글레이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