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36화
872화
스스슥.
만류일품으로 전장을 가로지르는 이드의 존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이드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엔 경쟁심을 불태우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이번 전투의 공을 양보하듯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이는 이드에 일찍 신경을 끊은 것.
그렇게 기감을 죽이고 암살자처럼 움직이는 이드의 목표는 적의 암수(暗獸).
아무리 마녀의 고양이처럼 은밀한 놈들이라고 해도 이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걱.
서거걱.
그리고 아쉽게도 단순한 짐승인 놈들에겐 이드의 만류일품을 꿰뚫어 볼 깊이도 없었다.
이드는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한 놈들을 쫓아 빠르게 목을 베었다. 이드가 놈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한 그 짧은 시간에 벌써 놈들의 손에 당한 기사가 다섯.
토벌대 수천의 기사들 중 다섯이라면 작디작은 수이지만.
그 다섯의 기사가 수십, 수백의 기사 중 눈에 뜨일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라면? 다섯이라는 수는 결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은색 기사단은 현 위치를 지키고, 상급 기사는 나와 함께 대형 마수의 목을 벤다!”
“은색 기사단의 이름으로 마수의 목에 기요틴을 떨구자!”
중앙의 대형 마수를 중심으로 풀려나가는 암수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날카롭지만 설산 같은 서늘한 기백이 느껴지는 쉴라의 목소리가 짜랑하게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대형 마수를 향해 달려드는 쉴라와 은색 기사단의 상급 기사들이 보였다.
평기사들로는 대형 마수에게 타격을 주기 힘들다 판단한 것.
이드는 내심 그녀의 정확한 판단에 박수를 보냈다.
‘확실히 저 정도 되는 마수는 평기사의 검기로 내부를 타격하기 어렵지.’
저만한 체격이면 단순히 피륙을 베어서는 답이 없다. 그뿐인가. 형태를 보면 이드가 죽였던 마수들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혹시 몸에서 창과 같은 가시라도 뿜으면 고작 피부를 자르다 아까운 기사들만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같이하여 전장의 서쪽에서도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색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청색 기사단의 모이엔이었다.
쉴라의 활약에 경쟁심을 느낀 것일까. 하지만 쉴라의 활약에 자극받은 것은 비단 그만은 아니었다.
“그린든 기사단의 용맹은 오색 기사단에 지지 않는다. 전원 나를 따르라!”
오색 기사단을 제외한 토벌대 기사단 서열 2위의 그린든 기사단장 포웰 레바의 외침이다.
세 기사단을 중심으로 어느새 움츠러들어 있던 기사들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이드는 순수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맹목적인 그들의 단순함에 눈물을 찔끔하고는 즉시 라미아를 찾았다. 쉴라는 몰라도 모이엔의 활약에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요. 쉴라 경이 더 빨리 마수를 쓰러트릴 수 있도록 해서 모이엔보다 뛰어나 보이게 하자는 거잖아요.’
검후가 잘못되었을 만약을 대비해 쉴라에게 난화십이식을 전수하고 있는 작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내 맘을 가장 잘 안다니까.’
긴말이 필요 없다. 마음이 이어져 있으면 이럴 때 정말 편하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로에게 숨길 것도 없고, 오해도 없을 테니까.
마음을 나누는 것이 세계 평화의 가장 확실한 해결 방법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들이 있다는 것일까. 프라이버시라는 말로 숨기고 있는 것들. 남에게 밝혀져서 좋을 것 없는 흉한 생각과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지난날의 행동은 어느 누구도 쉽게 마음을 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자신의 속내를 온전히 내보이는 일을 누군들 쉽게 할 수 있을까.
아마 오랜 시간 불도를 수련한 스님도 쉽지 않을 것이다. 꼭 비밀 때문이 아니라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 또한 그 자체로 쉬운 것은 아니니까. 이드와 라미아 역시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영혼을 나누고서야 가능했던 일을 세상 모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부끄러운 것이 없어도 싫은 사람은 있지 않은가. 이유 없이 싫은 사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도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고.
‘그럼 쉴라 경과 기사들이 상대하는 마수를 집중 공략해 둘게요.’
‘과연 라미아. 빼지 않고 더하는 것도 알고. 참. 그리고 그린든 기사단이 공격하는 마수는 큰 피해 없게 손봐 주는 것 잊지 말아.’
쉴라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 귀한 기사단이 큰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물론 청색 기사단은 예외!
‘에잇, 이드는 내가 바본 줄 알아요?”
그런데 쓸데없는 잔소리였나 보다. 라미아가 콧방귀를 뀌며 톡 쏜다.
이드는 그녀의 반응에 낄낄 웃고는 다른 암수의 뒤를 쫓아 목을 베기 시작했다.
쩌억!
다행이라면 놈들이 이드가 상대하던 마수들처럼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 반불사성은 없다는 점이었다.
목을 베면 목을 베는 대로 몸을 가르면 몸을 가르는 대로.
푸스스스—
검은 잿더미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문제라면 한 가지.
“그런데 숫자가 영 줄지를 않네?”
동분서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벌써 수십 마리를 죽였는데, 숫자가 크게 줄지를 않는다. 한번 청소한 지역도 다른 곳의 암수를 정리하다 보면 규모가 좀 줄긴 해도 어느새 채워져 있었던 것.
“대형 마수가 계속 분열해서 충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반응하려면 직접 보고 있지 않는 이상 힘들지.”
티브이로 명산의 절경을 볼 때처럼 마법으로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암수 한 마리 한 마리의 시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마법으로 전장을 살펴서는 암수의 빈자리를 신속히 채우긴 힘들다.
그 말은 곧.
“전장을 직접 보는 마법사들이 암수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 전장에 나와 있는 마법사들이라면.”
저기 몬스터들의 뒤에 있는 일단의 마법사들뿐이다. 처음부터 몬스터를 조종하기 위해 있던 자들.
어느 순간부터 조용하던 자들이었다.
몬스터들이 초인기를 쓰고, 대형 마수들이 나타난 것은 발밑에서 끓어오른 마나에 의한 것.
즉, 그 시점에서 몬스터와 대형 마수의 통제 권한은 땅속 마탑으로 넘어갔고, 남아 있던 마법사들은 암수를 통제하고 있었으리라.
“역시 최고의 병법은 적의 머리를 치는 것이지.”
잠깐 이대로 암수에 대해서 록마틴 후작에 경고한 후 빠질까를 고민한 이드는 한번 시작한 일. 마무리까지 깔끔히 하기로 정했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암수를 그냥 두면 그사이 죽어 나갈 기사들이 적지 않다.
‘라미아, 화려한 거 한 방 부탁해~’
역시 아쉬울 때 찾게 되는 것은 라미아뿐이다.
그리고 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쩍!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번개와 함께 마른 나무 수백 그루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마수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에 기겁한 기사들이 대형 마수에서 급히 멀어졌고,
퍼퍼퍼퍽!
그러기 무섭게 번개의 그물을 뒤집어쓴 대형 마수의 전신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것이 마법인가!
그 압도적인 마법의 위용에 모두가 아연해하는 사이.
이드의 신형이 번개가 만든 어둠에 숨어 허공에 떠 올랐다.
‘좀 적당히 하지. 이건 너무 화려하잖아.’
이래서야 쉴라가 가장 먼저 대형 마수를 잡아도 그 공이 이 번개에 가려질 것 같다.
하지만 먼저 해 달라고 한 사람이 불만을 말할 수도 없는 일.
이드는 번쩍이는 번개에 기대어 뇌정화를 피워 냈다. 난화십이식 중 가장 빠른 검식.
짜자자작!
굵은 번개에 숨은 아흔아홉 개의 뇌정화는 본류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치는 작은 번개의 흐름처럼 뻗어 나가 토벌대 사이사이로 숨어드는 암수들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 놓았다.
단 하나의 암수도 놓치지 않고서.
“헉!”
“흐윽!”
몬스터 뒤에 숨어 눈을 감고 있던 마법사들이 악몽을 꾼 듯 일제히 거친 숨을 토하며 눈을 떴다.
“그게 뭐지?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고서는…………”
“헉헉…… 자네도?”
서로를 돌아보며 상황을 묻던 그들은 얼떨떨함과 오싹함을 동시에 맛보았다.
꽈르르릉-
그사이에도 번개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인피니티 라이트닝으로 암수까지…….”
“말 그대로 설마일세. 토벌대는 아직 암수를 눈치채지 못했어. 거기에 인피니티 라이트닝으로 그런 세밀한 조종은 불가능해.”
“아무렴! 그건 드래곤도 못할 일이야.”
마법사들이 말을 꺼낸 마법사를 향해 한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거대한 번개 줄기를 조종해서 암수만을 저격한다는 건.
바다만큼 넓은 호수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로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에 담긴 흙이 촉촉이 젖을 정도만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아니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모든 마수가 동시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 전장에 넓게 퍼져 있는 암수들이.
“도대체 누가, 무슨 수로?”
부르르.
얄팍한 입술을 가진 마법사가 불길한 예감에 부르르 떠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내려 박히는 번개에 세상이 백색으로 물드는 순간. 그들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마치 거인의 그것처럼 마법사들을 삼킨 그림자.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악마처럼 등장한 이드의 그림자였다.
“누구냐?”
“배리어!”
“쉴드!”
“거스트 오브 윈드!”
마법사들의 대처는 빠르고 현명했다. 각자의 역할도 나뉘어 있었다. 이드를 탐색하는 일부를 제외한 몇 명은 방어를, 또 몇 명은 공격을 그리고 공격조차 적을 밀어내 거리를 두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거리가 생길수록 유리한 마법사들다운 선택이다.
물론 그런다고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드는 마치 1급 태풍처럼 몰아치는 거스트 오브 윈드를 산들바람처럼 넘겨 버린 후 마법사의 질문에 답했다.
“방금 당신들이 찾던 사람.”
“설마…… 암수를, 당신이?”
짧은 말이었지만 머리 좋은 마법사들이라서 그런지 과연 이해도 빨랐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췄으면 됐을 것을. 좋은 머리는 쓸데없는 계산까지 더하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다.
‘암수들을 단번에 제거하고, 그 짧은 시간에 몬스터들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고? 그런 실력자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적 불가 판정이 떴다.
기사처럼 싸우겠다며 헛된 고집을 부리는 마법사는 없었다. 싸우지도 않고 물러날 수 없다며 기개를 보이는 마법사도 없었다.
“리, 리터…….”
마법사들은 망설임 없이 정해진 방침대로 복귀의 주문을 준비했다. 몬스터를 앞세우고 있는 것과 별개로 마법사들이 수천의 기사 앞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해 준 든든한 주문.
“이렇게 대접받았는데, 그냥 보내 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그 마법도 시동어를 모두 외워야 발동이 된다.
발동되지 않은 마법은 뽑히지 않은 검과 같은 것.
그리고 이드에게는 상대가 검을 뽑기도 전에 공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수두룩했다.
짜자작.
하늘 위를 가득 채우던 번개가 사라진 것을 대신하듯, 이드의 손에서 작은 번개가 튀었다. 아무리 빨라도 음속이 광속을 넘을 수는 없는 것.
뇌정화가 마법사들의 머리와 심장에 틀어박혔다. 그사이 누구도 리턴을 외치지 못했다.
“암수의 주인이니 섭섭하지 않게 같은 걸 드렸는데. 어째 만족했다는 말이 없구만.”
이드는 말없이 쓰러지는 마법사들을 뒤로하고는 토벌대에게로 향했다.
만류일품의 은신 비결에 숨은 이드의 존재는 어느 몬스터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