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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37화


873화

팟! 팟! 팟!

벽에 전장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여러 영상. 그중 급하게 흔들리던 영상들이 단숨에 꺼졌다.

그에 그 앞에 모여 영상을 바라보던 마법사들의 고개가 상석을 향했다.

가장 위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그 바로 아래 위치한 두 사람. 그중 이 자리를 주관하는 것은 정신의 관의 부관주 해더웨이였다. 어지간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지만, 부하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해서인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그는 그 상태로 몬스터들의 초인기를 깨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는 키릴에게 보고했다.

“스승님. 외부 단말을 조종하던 마법사들이 적 기사에게 전멸당했습니다.”

[음? 복귀하지 못했단 말이냐?]

키릴이 의아한 듯 물었다. 복귀는 리턴이라는 한 마디면 되니까. 미리 메모라이즈해 둔 블링크를 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시동어를 외우지도 못하고 단숨에 당했습니다.”

[오색 기사단의 단장이 나선 것이냐?]

“아닙니다. 그보다는 최근 저희를 괴롭혔던, 감시조를 이끌던 자인 듯합니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가. 그라면 그럴 수 있겠지.]

그의 말에 해더웨이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몇 차례의 접촉을 통해 이드의 얼굴은 확인했지만, 아직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입니까?”

[그렇다.]

“……”

짧은 답변에 많은 마법사들이 몰래 가슴을 쳤다.

빨리 좀 알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은가. 알았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건 없지만 심력의 낭비는 없었을 텐데.

이래서 정보의 독점은 좋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일인 독재 체제 아래에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때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키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음. 첫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하지만…….”

“알겠습니다. 현 전력만 모두 소모시킨 후 전장을 정리하겠습니다.”

키릴의 말에 반발하려는 마법사를 강렬한 눈빛으로 제압한 해더웨이가 평소의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이 전장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그의 스승 키릴이다.

키릴이 의견을 물었다면 몰라도, 이미 결정한 일에 그나 마법사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키릴의 결정은 마법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이미 끝나 결과가 나온 싸움만큼 재미없는 것이 어디 있는가. 당장 몬스터와 대형 마수를 조종하던 마법사들의 손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이드가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돌아왔다. 오며 확인해 보니 수십이 되던 암수들은 자취를 감춘 채였다.

암수를 조종하는 마법사들의 처리가 먼저라는 판단이 옳았던 것.

“고생했어요.”

“뭐, 가뿐하지. 그런데 아까 그 벼락. 화려해도 너무 화려한 거 아냐? 이러다간 오늘 최고 전공은 쉴라 경이 아니라 네가 될 것 같은데.”

“흐흥. 그것도 괜찮네요. 부부가 나란히 토벌대 최고 전공을 세우면. 후후후.”

“그럼 곤란하지!”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럼 다행이지만…….”

하지만 말과 달리 번뜩이는 눈빛에 불안한 이드다.

“어차피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에요. 결정타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 정도는 다 알 거예요.”

그렇기는 하다. 대형 마수의 몸체 여기저기 폭발은 있었지만 기사들이 다시 달려들 때까지 움직임에 큰 이상은 생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대형 마수에 타격을 주는 건 어떻게 됐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끝났어요.”

“그어어어억!”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익룡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이 터졌다. 그와 함께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마수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휘두르는 검에 힘을 더해라!”

마수의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린 쉴라의 목소리였다. 그에 기사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대형 마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확실히 대형 마수에 검이 쉽게 박히는 것을 느끼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뿐 아니었다. 대형 마수를 제외한 다른 몬스터의 움직임에도 변화가 생겼다. 조금 둔해지고, 제국 병사같이 움직이던 질서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이드가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저것도 라미아 작품이야?”

“아뇨. 저보단 이드가 마법사들을 처리해서 그렇겠죠. 그 마법사들 역할이 의외로 컸나 봐요.”

“그런가?”

설마하니 키릴의 이른 단념에 몬스터들을 조종하던 마법사들의 의욕이 꺾인 탓이라고는 아무리 이드와 라미아라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이 빠르게 정리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가 열세인 전투는 이길 수 있어도, 기세가 꺾인 전투는 이길 수 없다는 말대로랄까. 기세가 꺾인 병력은 점점 위축되어 수가 줄지만, 기세가 살아난 병력은 점점 줄어 가는 적군을 상대로 더욱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인데.

지금 전장이 딱 그랬다.

“으하하! 몬스터 따위가 기사의 검을 막을 소냐!”

“죽어! 죽어!”

“이 격의 차이를 보고도 몬스터 따위가 초인기를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 놈 있으면 나와!”

특히 그중 초인들의 활약이 남달랐다.

그런 모습에 록마틴 후작이 결정을 내리자 기사단장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전군 돌격!”

“제국의 이름으로 사악한 몬스터를 토벌하자!”

“오늘 벤 몬스터의 머리가 곧 토벌대의 서열이다. 죽도록 죽여!”

“몬스터 머리 열 개 이상을 베지 못한 놈은 밥 먹을 자격도 없으니, 그렇게 알아!”

기세가 오른 토벌대에 채찍질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명예욕을 자극하기도 하고, 호승심을 자극하기도 하는 등. 저 단순한 말에서도 기사단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듯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밥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하지만 그중 유독 귀에 쨍하게 울리는 누군가의 말에 이드가 혀를 찼다.

이렇게 싸우고 밥도 못 먹는다니. 거기다 열 마리란다. 기사 하나당 세 마리도 돌아가기 힘든 상황에 열 마리라니.

이드는 내심 악바리처럼 한데 뭉쳐 몬스터들을 향해 뛰어다니는 기사단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는 해가 지기 전에 모두 끝이 났다.

“후우~”

뜨거운 숨과 함께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기사가 벤 놈을 마지막으로 몬스터 군단에서 살아난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아군에도 사상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삼천의 병력을 생각하면 극히 적은 수일 뿐.

“토벌대가 승리했다!”

“오~!”

“제국 만세!”

“토벌대 만세!”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키릴의 말처럼 가벼운 인사를 겸한 전초전이지만.

그렇다고 승리의 기쁨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며, 승리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전군은 대열을 정비하라!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토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기사들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록마틴 후작의 외침에 빠르게 승리의 기쁨을 수습한 기사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개인 정비에 들어갔다.

록마틴 후작은 그 모습에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뛰어난 기사들이오.”

“당연합니다. 제국에서 이름 있는 기사단이 모두 모인 토벌대가 아니겠습니까. 아마 대륙 역사상 가장 강한 토벌대일 것입니다.”

“하하하.”

승리가 기쁘긴 지휘부도 마찬가지. 그들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전장을 살피며 말했다.

“오늘 전투는 이것으로 끝인 것 같습니다. 적들도 더 이상 움직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보고받기로 적 마법사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건 어느 기사단의 공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저 안에 있는 마법사가 한둘이 아닌데. 그런 작은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보다 대장군. 전장을 정리해야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최소 수일은 주둔해야 할 곳 앞에 몬스터 시체를 쌓아 둘 수는 없지요.”

진득한 피 냄새 속에서 빨래터에 모인 새댁들처럼 수다를 떨어 대는 지휘부였지만, 그 속에는 흘려들을 수 없는 의견들이 많았다.

몬스터 사체 이야기는 특히 그랬다.

오천이나 되는 시체를 그냥 둔다면 정신의 관이 조종하는 몬스터가 아니라도, 그 냄새를 맡은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천의 피 냄새는 너무 강해 바람을 타고 레이논 산맥까지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허허. 전투보다 후처리가 더 힘든 일이 될 듯하구려.”

정말이다. 당장 태우거나 땅에 묻으려고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 토리빈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그중 일부는 마법사들이 정리하도록 하지요. 부산물도 부산물이고, 연구용으로도 제법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립니다.”

마법사들이 나서면 마법 가방에 쑥쑥 집어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마법사들이 챙겨 가도 최대 천 마리 정도다.

나머지 사천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다.

“음. 하면 남은 몬스터의 처리도 마법사들에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기사들이 처리하려니, 적을 앞에 두고 너무 큰일입니다.” 솔직히 번거롭고, 체면을 구긴다 생각해서 그렇지. 마법사들이 나서면 금방 끝날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전장에서 괜히 체면만 챙기면 마법사라도 미움만 받을 뿐.

연륜이 있는 토리빈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모여 있던 토벌대 앞쪽에서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이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군 후방 십 미터 이동 후 경계 태세!”

비록 이드가 명예 후작으로서, 그리고 아이넬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지휘부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사실 토벌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현재 토벌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록마틴 후작과 밀리아리아 황녀뿐.

즉, 토벌대가 이드의 명령에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드의 사자후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황제의 명령 같은 기묘한 압박감.

그게 아니라도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전투 경험 있는 기사들이다.

조용한 상황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이드의 명령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눈치는 있다는 말이다.

“이동 후 경계!”

복창과 함께. 토벌대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아니, 갑자기 무슨・・・・・・”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가 어리둥절해 할 때,

가장 먼저 이상을 감지한 것은 토리빈 마법사였다.

“대장군, 대지의 마나가 유동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록마틴 후작이 뭐라 하기도 전이다.

꾸르륵-

피웅덩이가 된 땅이 울렁이더니 마치 늪과 같이 변해서는 몬스터의 사체를 포함한 전투의 흔적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거대한 식인 식물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처럼 느리지만 역겨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놈들도 앞마당에 벌레가 끓게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토리빈 대마법사가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토리빈 마법사의 생각을 묻고 있었지만, 록마틴 후작의 말은 어째서 저런 마법을 알아차리지 못했느냐는 질책을 포함한 것이기도 했다.

“대장군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마법은 미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거리도 있을뿐더러, 지금 보시다시피 워낙 느리고, 해가 없는 마법이라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렇군요. 명예 후작이 먼저 알아차려 다행입니다만, 좀 더 신경을 써 주십시오. 제국의 검들이 아닙니까.”

“허허허.”

토리빈 마법사는 인상 좋게 웃었지만, 내심 진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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