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38화
874화
무능력을 의심받으며 노마법사가 진땀을 빼는 사이.
절반 이상 사라지고 있는 몬스터를 보던 이드가 슬그머니 발을 뻗어 질척해진 땅을 쿡쿡 찔렀다.
물기는 없었으나 우림 속 늪지처럼, 바닷가 갯벌처럼 질척거렸다.
“이게 초인 마법이려나?”
하지만 핵심은 흙의 상태가 아니라, 흙을 지금과 같은 상태로 만든 방법. 그리고 그 방법을 가능하게 한 힘이다. 이드는 발끝으로 정령의 그것을 잘 닮은 특징을 가진 초인기 특유의 힘을 선명하게 감지했다.
“그렇지 않겠어요? 초인 마법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놓고 평범한 마법을 쓰면 꼴이 우습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탑주가 토벌대 앞에 나타나 공언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마법을 만들었다고. 대놓고 힘자랑을 하겠다고.
그래 놓고 일반 마법을 사용한다? 불법적인 납치와 인체실험을 하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체면과 명예를 알고 자기 얼굴에 똥칠할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들은 게 있으니까.”
프리실라와 베일록은 초인 마법이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마법이라 말할 수 있는 초인 마법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탑주뿐. 일반 마법사들과 장로들이 사용하는 것은 마법이라기보다는 초인으로부터 추출한, 초인기에 가까운 형태라고 했다.
당장 프리실라는 초인의 머리를 담은 상자를. 베일록은 임플란트를 사용한 것만 봐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이드는 아직 초인 마법이라는 것을 확실히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봐도 구분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초인기와 초인 마법의 구분은 불가능하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초인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쉴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늪으로 변한 땅을 기묘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움직여 공격이 아니라 전장 정리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힘으로 일어서겠다는 말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군요.”
“모르죠. 그냥 집 앞이 지저분한 것이 싫었는지도?”
“풋, 정말 그럴지도요.”
농담 같은 라미아의 말에 쉴라가 실없이 웃다 이드를 본다.
“그게 아니면, 명예 후작님 같은 분이 있어 기습이 불가능할 걸 알았는지도 모르고요.”
“그보단 그냥 큰 성과가 없을 것 같아서 포기한 걸 겁니다. 그나저나 명령권도 없이 토벌대를 움직였으니. 징계나 먹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런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하는 자라면 토벌대에 있을 필요가 없겠죠.”
“황녀 전하.”
어째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보다 더 살벌하게 들리는 말과 함께 황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곁에는 일리나가 호위처럼 함께하고 있었다. 이드가 그녀를 바라보자 황녀가 눈을 반달로 만들었다.
“호호호. 역시 명예 후작님껜 두 후작 부인이 최우선이신 것 같아 참 부러워요. 아, 그보다 방금 명령을 내리시는 모습은 정말 멋졌답니다.”
부러인 듯 황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높고 또랑또랑했다. 황녀가 이렇게 말해 둔 이상 행여라도 누가 헛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황녀 전하야말로 오늘 활약이 크셨습니다.”
“후훗. 명예 후작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지요?”
황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랑스러운 듯 약간 우쭐해 했다. 사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아이넬 기사단이 차례차례 몰아주긴 했지만, 황녀가 베어 낸 몬스터가 무려 20마리다.
개인당 10마리를 베지 못하면 밥이 없다고 소리치던 기사단에 할당된 양의 두 배다.
실력보다는 기회가 없어서긴 했지만 20마리는커녕 3마리도 베지 못한 기사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황녀의 스코어는 토벌대 안에서도 제법 높다.
“하지만 오늘 실전을 겪고 싸움이, 전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수천의 생명이 부딪히는 전장과 일대일 결투는 또 다르다. 결투에 대한 경험이 있어도 전장에서 어이없이 죽거나, 트라우마를 가지고 검을 놓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
황녀는 새삼 전장의 처절함을 느낀 듯했다.
그녀도 이런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진 건 아닐까? 이드가 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싸우지 않으실 겁니까?”
“아뇨, 오히려 그 반대랍니다. 더욱 열심히 싸워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지금처럼 지켜지며 싸우지 않고 혼자 당당할 수 있도록. 실력은 아직 약해도 제 마음은 약하지 않답니다.”
짝짝짝.
정광 가득한 황녀의 눈에 이드가 웃고 있으려니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그린든 기사단의 포웰 단장이 있었다.
“실로 감동적인 말씀이셨습니다. 황녀 전하.”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발언을 들은 기사들이 자랑스러운 듯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만 풀렸다면 당장 손이 터질 듯 박수를 쳤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오색 기사단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특히 은색 기사단의 실력에 감탄했습니다. 쉴라 단장님.”
“별말씀을. 토벌대의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같은 도움을 받고도 가장 먼저 마수의 목을 자르셨지 않습니까. 오늘 최고의 전공은 은색 기사단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쿵!
포웰의 말에 토벌대의 기사들이 발을 굴러 답했다.
‘저 포웰이란 사람 덕분에 생각보다 잘된 것 같지?’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그러게 네 말이 항상 옳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네.’
그런 모습에 이드는 슬쩍 라미아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몬스터를 비롯해 핏자국까지 빨아들인 땅이 원래의 단단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에 록마틴 후작은 토벌대와 함께 후방으로 자리를 옮겨 진지를 구축했다. 멀쩡한 땅이 늪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법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한 것은 당연했다.
지금껏 마법사들이 사역한 몬스터와 싸우긴 했지만, 늪으로 변해 버린 땅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마법사와 싸우고 있다는 현실을 강하게 느꼈달까? 덕분에 마법사들만 두 배 이상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안전해진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그 때문이 아니라도 앞서 적의 마법을 감지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으니, 힘들다 말하기도 어려웠다.
아예 모두가 몰랐으면 몰라도 이드가 감지한 것을 자신들이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이 이드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오히려 이드와이드의 아내로 알려진 라미아에게 은근히 접근하려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후작 부인의 인피니티 라이트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머. 그 정도는 아닌걸요.”
“무슨 말씀을요. 무려 7클래스 마법을 그렇게 광역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분은 흔치 않습니다.”
바로 라미아가 시선 끌기용으로 사용한 인피니티 라이트닝 때문이었다. 적 마법사를 처단한 기사를 찾기는 힘들어도 마법의 주인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적 마법사를 자신이 죽였노라 말하며 나서는 기사나 기사단도 없어 지휘부는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중이다.
보통 때라면 없는 공이라도 만들어 자신의 것이라 해야겠지만, 이 토벌대에서는 그렇게 허튼 주장을 하기엔 날카로운 눈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진군하면서 얼굴을 익힌 기사들이 옆에 있었는데, 어떻게 헛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진지 구축이 끝난 후 토벌대는 조용하지만 거창한 저녁을 먹었다. 물론 술은 금지하고 경계를 철저히 한 것은 당연했다.
10마리를 잡지 못하면 굶긴다고 한 기사단의 기사들도 다행히 굶지 않아도 되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로 무려 록마틴 후작과 황녀가 내린 저녁을 거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의 이름은 기사단장의 꼬장보다 위에 있었다.
기사들이 술을 대신해 과실음료를 마시며 자신들의 무용담을 떠드는 사이.
록마틴 후작의 막사에는 토벌대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기사들과 달리 이들이 모인 자리에는 가벼운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과연 높은 자리에 오르고 볼 일이랄까.
“오늘 전투는 열심히 싸워 준 토벌대 덕분에 대승이었소. 그러나 동시에 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 또한 알았으리라 보오.”
승리를 축하하는 건배 후 자리에 앉은 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단순히 몬스터를 부리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의 마법이 와이번의 고삐처럼 단단하다는 것은 모두 잘 알 것이오.”
말은 타다 떨어져도 높아야 이 미터지만.
와이번에서 떨어지면 그 높이가 최소 수백 미터다. 그래서 와이번에 올린 안장과 고삐는 재질은 물론이고 마법 처리까지 해서 절대 끊어지지 않게 만든다.
“그렇습니다. 몬스터에 초인기를 사용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크흠. 말에 조심을 해 주십시오. 초인기라니요. 몬스터 따위가 어떻게 초인기를 사용합니까!”
염소수염을 한 남자의 말에 초인으로 짐작되는, 송충이처럼 진한 눈썹의 남자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허허. 눈으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그게 초인기가 아니면 무엇이오?”
“그저 흉내일 뿐입니다. 초인기를 모방한 조잡한 흉내!”
“자자.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뜨거워지는 분위기에 록마틴 후작이 서둘러 나서서 진화했다. 적이 사용하는 힘을 규정하는 게 왜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적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논쟁을 할 때는 아니니까.
“저들이 몬스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소. 정체가 무엇이건 그 칼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면 깨부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오늘 겪어 알겠지만 저들의 힘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음을 모두 알았을 것이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어붙은 숲. 거대한 폭발의 흔적. 거기에 몬스터의 대군까지 웃으며 상대할 수 있는 힘은 아니다. 삼천의 토벌대라 든든한 것이지, 분명히 말해 일개 기사단으로 상대할 수 있는 힘의 규모를 넘어서고 있다.
“토벌의 본격적인 시작은 적의 마탑에 진입하는 내일 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오.”
“그에 관해 명예 후작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연 마탑 안에 지금까지 저들이 쏟아 낸 것 이상의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
황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이드는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질문에 잠시 턱을 쓸었다.
“일단 저라고 자세히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수일 먼저 와서 만난 적과 몇 번 투닥거렸을 뿐이니까요.”
그에 몇몇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거리며 웃었다. 선명히 남은 전투의 흔적을 두 눈으로 봤는데, 그게 어디 투닥거렸다 라는 말로 넘길 수 있는 것들인가 말이다.
속 좁은 몇은 오히려 그것이 자기 자랑이라 여긴 듯 인상을 썼다.
이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우다 보면 느낌이라는 것이 있지요. 예, 제 느낌으로는 저 탑 안에 그들이 지금 보여 준 것 이상의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느낌을 말하는 이드였지만 누구도 그 말을 우습게 여기지는 않았다. 특히 검을 든 기사의 경우 싸움을 통해 적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개인을 넘어 집단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에 이드는 짧은 말을 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거 없는 제 느낌 말고도 사로잡은 포로에게 확인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보아도 적이 가진 힘은 실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을 가벼이 여겼다가는 토벌대의 피해가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포로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준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준비한 만큼 사상자는 줄 것이니 손해 볼 것 있겠습니까?”
끄덕끄덕.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록마틴 후작은 그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드가 하는 말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