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41화
877화
이드의 말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보신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은 말로는 신중하다 해도 대개는 겁쟁이다. 여기 뭉쳐 있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안 된다. 안 된다. 하시더니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사람 곤란하게 말이다.
“그냥요.”
눈이 반달이다. 저게 어딜 봐서 그냥인가. 울컥하지만 실력으로나 작위로나 비벼 볼 상대가 아니다.
“큼큼. 아쉽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갑자기 사상자가 많이 생겼으니, 관리하려면 꼼짝할 여유도 없을 듯하군요.”
“암요. 눈코 뜰 새가 없지요.”
절묘하게 맞장구가 나온다. 이들이 한데 뭉쳐 다니는 이유다. 그런데 말을 하면서 시선은 허공을 헤맨다. 눈을 마주칠 생각을 못 하는 것이, 부끄러워할 줄은 아나 보다.
지금은 구태가 되었지만 이들도 젊은 시절 검왕을 꿈꾸던 기사였으니까. 그 입으로는 죽어도 무서워 못 들어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목에 칼이 들어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일을 시작합시다. 그럼 황녀 전하, 저희들은 일이 있어 이만.”
이번엔 록마틴 후작이 시키기도 전에 움직인다. 던전 진입을 허락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자들이 꼬리 만 개처럼 후다닥 사라졌다.
“휴~ 명예 후작님께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네요.”
그에 황녀가 잘래잘래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손님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인 집주인의 심정이었다.
“저도 토벌대에 저런 자들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행군 중 회의에서 보고 방정맞다 여기긴 했지만, 저 정도로 생각이 짧고 엉덩이가 가벼울 줄이야.
차라리 군대라면 이해할 수 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조리가 뻔뻔하게 박혀 있는 곳이니까. 능력 없이 권력으로 지휘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는 가을 낙엽처럼 널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제국 전역에서 이름난 기사단이 모여 구성된 이 토벌대는 다르다. 저들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뛰어난 기사단의 주인이 꼭 똑같이 뛰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런 곳에 꼭 기사단의 주인이 오는 것도 아니죠.”
“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오히려 모인 기사단에 비해 수가 적은 거로군요.”
이드가 오히려 너무 쉽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울컥하는 느낌을 받는 황녀다.
“웃・・・・・・ 제국의 귀족들을 너무 무시하시네요.”
“하하하. 긍정적인 평가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사상자가 많아도 너무 많은데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이드였지만, 황녀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고 있는 중에도 던전에서 나오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층과 2층의 차이가 큰 탓일까요?”
황녀의 목소리가 우울하다. 록마틴 후작의 말처럼 제국의 젊은 검들을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함께 전장에서 싸운 전우에 대한 걱정에 가깝다.
무엇보다, 서둘렀다고 해도 일 조에 비해 사상자가 너무 많다. 심지어 아직 다음 조가 진입하기로 한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다.
“그보다는 속도에 치중하느라 아군의 피해를 크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손발을 맞추기보다 따로 싸우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만약 황녀 말처럼 급격한 사상자의 증가가 2층이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이라면, 저렇게 사상자를 내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기사들이 사상자를 옮기면 병력이 두 배로 빠지는데, 세상 어느 지휘관이 그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정신 나간 명령을 내려?”
혹시라도 자신의 지휘관이 그런 자라면 당장 오거 힘줄로 꽁꽁 묶어 상자에 넣어 두는 것이 자신의 안전과 나라의 안녕을 위하는 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진짜 그런 상황이면 사상자가 아니라 연락병이 가장 먼저 달려 나왔을 것이다. 전투 중지 명령이나, 지원 병력의 요청을 위해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잡아 세운 기사가 이드의 짐작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는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록마틴 후작과 황녀가 나란히 목덜미를 잡았다.
“무려 청색 기사단장이나 되는 자가・・・・・・ 서두를 일이 따로 있지!”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실 건가요?”
“끙.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
끙끙거리던 록마틴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전투 스타일이나,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최전선에서 싸우는 지휘관을 휙휙 바꾸거나 불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당장 크게 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보기에 따라 전투가 격렬했고, 그로 인해 부상자가 많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없다면,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믿고 맡기는 것이 록마틴 후작의 방식이기도 했다.
다만 그냥 묵인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누가 뭐래도 토벌대의 대장군은 그였다. 아무리 청색 기사단이라고 해도 토벌대에 속해 있는 동안은 그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한다.
‘그게 싫으면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야지.’
그런 의미에서 쉴라와 항상 조용한 라발은 딱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기사들이었다.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명예 후작.”
“말씀하십시오.”
“삼 조를 예정보다 빨리 진입시켜야 할 것 같소.”
조치하기 어렵다더니. 이드는 내심 웃음이 났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굳이 이 조를 불러낼 필요 없이, 삼 조의 진입을 빨리하면 이 조는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잡음이 생길 것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소.”
대답과 함께 일어나는 이드에 감사의 눈빛을 보내는 록마틴 후작이다.
따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삼조의 진입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던 상황.
모든 기사들이 싸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병사들로부터 이드의 명령을 전달받은 기사들이 순식간에 던전 앞에 모였다.
“왜 갑자기 시간이 바뀐건지 아십니까?”
“자네도 모르나 보군?”
“쯧쯧. 눈치도 없으십니다. 아까 부상자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이지요.”
허둥대며 떠드는 것은 토벌대에 붙어 온 타국의 인사들뿐이었다.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진 그들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정보라도 주면 좋겠지만, 제국의 입장에선 그럴 의무가 없었다. 그들이 토벌대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것만 해도 제국의 배려였으니까. 괜히 헛소리를 했다가 쫓겨나면 그들만 손해였다.
‘제국의 전력도 전력이지만, 저 던전 안에 어떤 것들이 들었는지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이 미완의 마탑이라는 던전을 토벌하고 제국이 어떤 것을 손에 넣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걸 놓쳤다가는 본국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자가 많던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래서요? 위험하니 들어가지 않으시게요?”
“그건…… 아니지요.”
그들이 공관의 외교관으로 나와 있는 이유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뒤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소곤거림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드가 그들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타국의 외교관들을 조용히 만든 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당연하게도 삼조의 선두는 아이넬 기사단이다. 황녀는 기사단의 중앙에 섰고, 라미아와 일리나가 그녀의 양옆을 지켰다.
아이넬 기사단은 그저 거들 뿐. 두 사람이야말로 황녀 호위의 시작과 끝이라고 하겠다.
그때 이드 곁으로 다가온 록마틴 후작이 삼조의 기사들을 보며 외쳤다.
“삼 조는 준비를 마쳤는가!”
“예! 대장군.”
앞선 두 조가 출발할 때도 나서지 않은 그였지만, 갑작스러운 시간 변경에 혹시라도 불안해할 기사들이 있을까 싶어 직접 나선 것이다.
황녀가 속한 조였기에 해 주는 특별 대우였다.
록마틴 후작은 갑작스러운 변경 이유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이미 우르르 쏟아져 나온 부상자를 모두 보았기에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다만 누구의 탓이라 원인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차후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록마틴 후작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소곤거리던 외교관들과 몰래 떨리는 가슴을 숨기고 있던 기사들이 가슴을 폈다.
“던전에 들어간 후부터 나와 황녀 전하의 명령이 최우선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일 조처럼 큰 피해 없이 복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나크렌 제국에 영광을!”
던전에 들어가던 쉴라의 모습을 떠올린 이드가 그녀처럼 외쳤다.
“제국에 영광을!”
“진입!”
밖에서 볼 때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토벌대가 사라지는 것 같았는데, 직접 발을 들인 던전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해가 반쯤 기운 저녁과 같은 밝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거기에 토벌대가 중간중간 추가적으로 설치한 마법등 덕분에 앞을 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밝아진 때문인가.
군데군데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기묘하군. 핏자국은 있는데, 적이나 몬스터의 시체는 많지가 않아.”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쉴라의 말로는 던전 안에서 마주친 적은 대부분 마법적인 함정과 소환물, 그리고 마수들이라고 했다. 모두 부서지거나 죽고 나면 사라지는 것들이니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덕분에 아군의 핏자국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도 사실. 정신의 관에서 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특히 아직 실전을 겪지 못한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들과 경험이 적은 젊은 기사들이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선 토벌대는 이곳에서 주로 함정을 부수고, 적의 소환수와 마수들을 상대해 싸웠습니다. 그래서 흔적이 남지 않았는데, 참 고마운 일이지요. 고약한 악취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크하하하. 맞습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본래 고약하지요.”
“벌레나 파리도 생기고 말입니다.”
가벼운 농담을 섞은 이드의 말을 경험 많은 기사들이 받아 주면서 토벌대의 분위기가 단숨에 변했다.
대수롭지 않은 농담보다도, 목소리에 담긴 천령활심공의 내공이 토벌대의 호연지기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띄워 놓은 분위기를 발라드 한 곡이 부수는 것처럼,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이처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된다.
“어떤 적이 나오건 제 검으로 모두 베어 버릴 것입니다!”
“황녀 전하 앞에서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겁니다!”
불쑥 치솟은 용기에 애송이들이 열심히 소리쳤다. 전투을 앞둔 그들의 외침은 시끄럽기보다는 흐뭇하게 들렸다.
중년의 기사들은 그 모습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던전 1층의 끝, 그리고 2층의 입구에 가까이 온 듯.
꾸구구궁!
아아악!
그쪽으로 갔다!
폭음과 진동. 그 사이사이에 비명과 고함 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드가 스폴을 불러 말했다.
“스폴 경. 토벌대 경계.”
“옛 경계 대형.”
이드의 말을 복창한 스폴이 토벌대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자 각자 토벌대의 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는 사방을 경계했다.
“공격에 대한 방어 준비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스폴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드가 모를까 싶은 노파심에서 나온 말이다.
그녀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드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주변에 개미새끼 한 마리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 상황에 방어 대형을 짜 봤자 이동만 느려지고, 싸우기도 전에 피로만 쌓일 뿐이야.”
이미 일 층 전체에 기감을 퍼트려 감지 범위 안에 넣고 있는 이드의 말이었다.
이제 일 층에서는 어떤 함정이건, 생명체건 움직이는 순간 이드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드의 말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스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이드의 실력의 일단을 본 적이 있으니, 딱히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