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44화
880화
인과응보.
그 네 글자가 제대로 힘을 발휘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긴 시간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힘없는 사람이나 하늘이 움직이길 빌며 기다리지.
그 통쾌한 걸 왜 하늘에 양보하나? 복수할 힘이 있다면 자기 손으로 해야지. 자고로 복수는 셀프가 가장 확실하고 좋은 법이다.
거기다 하늘이 나서면 오래 걸린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얼마나 오래 걸리냐면 해외직구 물건 기다릴 때보다 더 오래 걸린다.
운이 나쁘면 저승 염라대왕 앞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 당사자는 복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충분히 당사자를 대신할 수 있는 관계자지. 먼 하늘보다도 가깝고.’
관계도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무려 무공을 가르친 사승 관계다. 자고로 스승의 복수는 제자, 제자의 복수는 스승이 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저기 화염 거미를 상대로 날뛰는 모이엔의 무공 역시 이드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만한 관계면 실수로 이드가 모이엔을 죽여 버리더라도 후에 검후가 돌아와 왜 자신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냐고 따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싫으면 당장이라도 날아와서 저놈의 목을 잘라 버리면 되겠지.”
검후가 알았으면 답답한 소리 한다고 가슴을 칠 말이다.
그나저나 검후와 무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가. 이드는 새삼 검후, 시르피의 재능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재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무공을 만들고 고치는 쪽으로도 재능이 뛰어날 줄은 몰랐네.”
말이 쉽지, 정교하게 완성된 무공에 새로운 오의를 더해 또 다른 무공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백지에서 만들어 내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모이엔 창술의 기반이 된 풍운십팔봉이 어디 보통 무공인가. 어디 굴러다니는 삼류 봉법이 아닌 무려 개방의 것이다. 그 하나로 완벽하다 할 수 있는 무공에 다른 요소를 더해 새롭게 뜯어고친 것이다.
물론 그런 작업을 온전히 검후 홀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주체는 검후일 테니. 그 대단함이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감탄하는 이드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모이엔의 창술을 비롯한 몇몇 무공이 검후가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무공에 몰두하던 시기에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때때로 슬픔을 잊기 위해 작업에 몰두한 예술가들에게서 나온 명작들처럼.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더 볼 것 없이 모이엔을 절단 내 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검후의 재능에 감탄하고 있던 이드는 뒤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에 입을 열었다.
“끝나면 금방 갈 텐데. 왜 왔어요?”
“황녀 전하께서 궁금해 하셔서요.”
“황녀 전하만요?”
“당연히 저와 라미아도 궁금했죠.”
이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일리나가 답했다. 이드와 마찬가지로 골렘의 머리 위를 날아온 듯 그녀에게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고 뭐고, 보는 그대로, 청색 기사단에서 굳이 자신들이 싼 똥을 치우고 간다기에 그러라고 했죠. 그래서 기쁘게 싸우는 중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미 골렘의 다리에 맞은 기사가 비명과 함께 부러진 팔을 잡고 뒹굴고, 남은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그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얼굴들이 굉장히 치열해 보였다.
저 표정을 보고도 기쁘게 싸우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면 바보다. 일리나의 눈이 대번에 쌘쭉해졌다.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걸요? 솔직히 말해요.”
그녀의 재촉에 이드는 키득거리며 웃고는 모이엔의 수작을 역이용한 자신의 활약을 자랑했다.
그에 모이엔을 바라보는 일리나의 눈이 단숨에 서늘해졌다. 이전까지는 그를 관계없는 타인으로 보았다면, 지금은 명백히 적으로 인식한 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드에 대한 적대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작 화염 거미에 해를 당할 이드는 아니지만 공격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모이엔이 이드와 함께 일리나에게도 확실히 찍히는 순간이었다.
“옆으로 좀 비켜 줄래요?”
“음?”
“같이 보게요.”
도울 생각은 1도 없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키득거리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청색 기사단과는 완전히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싸우는 와중에 그 모습을 본 청색 기사단은 기가 찼다.
‘전장이 장난으로 보이냐!’
‘차라리 좀 거들어 주기라도 하던가!’
‘전장에서 사랑놀음이 웬 말이냐!”
하지만 앞서 이드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모이엔이었다. 단장이 해 놓은 말이 있으니 기사들로서는 이제 와 뭐라 말하기도 어렵다.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해서 앉아 있는 사람에게 왜 돕지 않느냐고 따지는 건 모이엔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니까.
무엇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거미 골렘이 충분히 상대할 만해서다. 튼튼하고 숫자가 많아 부상을 입는 자들은 있지만 결국 그 정도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체면을 챙길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차라리 기사들은 나았다.
화염 거미를 상대하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구경하는 것을 본 모이엔은 속에서 불이 났다. 당장 이드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화염 거미를 도발해 낸 당사자인 그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과 그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이드에 분통이 터진 것.
“이런 젠장! 눈도 여덟 개나 달렸으면서 누구에게 싸움을 걸어야 되는지도 모르는 놈!”
“끼이이익?”
모이엔은 그 화를 화염 거미를 향해 퍼부었다.
가만히 있다가 한 대 맞고 튀어나온 화염 거미로서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뿐이다.
왜 먼저 시비를 걸고는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일까. 화염 거미가 감정이 있고 말만 할 수 있었어도 수백 명을 잡고 하소연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화염 거미는.
꽈르르릉!
“크윽! 자폭? 잘도 이런 치졸한 수작을 해 놓다니!”
마지막 순간 유독 크고 화려한 불길로 그 불만을 대신했다. 당연히 모이엔에게 한 방 먹이는 것도 성공했다.
“……·재미있는 머리 스타일입니다. 잘 어울려요.”
이드는 반달로 휘어지는 눈가를 애써 펼치며 말했다.
화염 거미의 마지막 폭발은 모이엔에게 큰 상처를 주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잘 구워 주었다.
꼬불꼬불 풍성하게.
“라미아가 저런 머리를 아프로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정확해요. 아마 그레센에선 최초지 않을까요?”
속닥거리는 두 사람에 모이엔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갑자기 피곤하군요. 대장군의 명대로 이 조는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 전에 황녀 전하께 인사를 드리고 가도록 하지요. 아마 황녀 전하께서도 단장의 머리 스타일을 보면 좋아하실 겁니다.”
“까드득. 그러도록 하지요.”
마음 같아서야 보고 웃는 놈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아무리 청색 기사단장이라도 제국의 황녀를 무시할 수는 없다.
2층 입구의 전투는 어느새 정리되어 있었다.
삼조의 도움도 도움이지만, 황녀의 명령으로 토벌대가 물러서자 골렘들이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들은 자신들의 임무는 여기까지라는 듯
2층 구역을 벗어나자 토벌대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렸다.
피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이렇게 쉬웠을 것을, 전진밖에 모르는 모이엔의 명령 때문에 그렇게 희생을 낸 것이다.
이 조에 속해 있던 타 기사단의 기사들은 분통을 터트리는 한편, 청색 기사단과 자신들의 실력 차에 한숨을 쉬었다.
“괜히 오색 기사단. 오색 기사단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도 주변 영지에서는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었는데.”
그러는 중에 이드와 청색 기사단이 복귀했다.
그들은 이 조에서 희생자를 낸 골렘 무리를 너무도 쉽게 헤치고 나왔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다시금 자괴감을 느끼려는 찰나!
“잠깐만 모이엔 단장의 머, 머리가・・・・・・ 풉!”
“저게 무슨 꼴이야?”
파격적인 헤어 스타일을 한 모이엔의 등장에 가라앉던 분위가 단숨에 뒤집어졌다. 아마 모이엔이 이 조를 위해 가장 잘한 일은 지금 이것이 아닐까 싶다.
조용히 키득거리는 소리에 모이엔이 두 눈을 부릅떴지만, 천이 넘는 기사가 키득거리는 데는 청색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위엄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모이엔 단장이 복귀하니 다들 기뻐하는군요. 하하하. 아, 저기 황녀 전하께서 마중 나오셨네요.”
이드는 진심을 다해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과연 거기에는 일리나 대신 라미아와 나란히 선 황녀가 있었다.
“이런, 황녀 전하의 얼굴이 붉은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웃음을 참으며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도 능청스럽게 이유를 찾는 이드다.
모이엔은 황녀의 반응보다 옆에서 한마디씩 던지는 이드의 말이 더욱 짜증 났다.
아까와 달리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청색 기사단 단장 모이엔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친히 전장에 서신 황녀 전하의 용기는 제국 모든 기사들이 칭송할 것입니다.”
“큼. 모이엔 단장님의 말씀에 감사드려요.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생하셨습니다. 이후는 저희 삼 조에게 맡기고, 쉬도록 하세요.”
“황녀 전하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음. 그리고 일단 돌아가시면 머리부터 감도록 하세요.”
황녀의 마지막 당부의 말에 주변을 서성이던 타국의 외교관들도 키득거리며 웃음을 감추기 힘들어했다.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모이엔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하겠습니다.”
답을 마친 모이엔은 마치 도망치듯 황급히 던전의 입구를 향해 사라졌다.
‘저럴 걸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는 말이야.’
자고로 똥고집이 좋은 결과를 낳기는 힘든 법. 멀어지는 이 조의 뒤통수를 혀를 차며 바라보던 이드는 곧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 일도 시작해 보도록 하지요.”
그 말에 삼조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일단 먼저 밝히자면, 우리 조의 목표는 2층을 클리어하고, 3층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그에 황녀가 살짝 손을 들고 나섰다.
이 자리에서 이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닐까요? 이 조도 그러다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황녀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조가 아무 대책 없이 전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럼 단장님은 대책이 있으신가요?”
“특별할 것은 없지만 골렘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기본적인 방안은 찾았습니다. 동시에 2층의 구조에 대한 파악도 끝났지요. 제 예상대로 된다면
2층을 클리어하는 데는 크게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청색 기사단에게로 접근하는 동안 2층의 구조와 골렘의 배치에 대한 파악을 끝낸 이드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신안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2층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인 거미 골렘과 화염 거미도 청색 기사단에서 처리해 주었으니까요. 고맙게도.”
정말 고맙게도 말이다.
굳이 나서서 궂은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저희는 그저 기본만 하면 됩니다. 기본만.”
그 기본이 한 층의 클리어라는 것이 놀랄 일이지만 말이다.
“과연 어떤 기책을 보이실지 기대가 됩니다!”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외교관 중 하나가 감탄한 듯 말했다.
그에 이드가 마침 말 잘했다는 듯 그와 다른 외교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같이하는 토벌이 아닙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