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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56화


892화

“흑표범?”

“……•을 닮은 마수겠죠. 당신, 그런 눈썰미로 용병 일은 어떻게 한 거죠?”

갸웃하는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충 설명을 넣었다.

미끈한 몸체에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날렵한 캣워킹.

그런데 덩치가 소의 두 배다. 벨벳 느낌이 나야 할 가죽에는 차가운 금속광이 번들거린다.

딱 봐도 마수다. 그것도 메이드 인 정신의 관.


이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라이져를 허리에 연결한 체인이 차르륵거리며 늘어졌다.

“어떻게, 안부라도 전해 줄까?”

슬쩍 돌아본 이드의 말에 비올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긴장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탑주를 존경한다. 언젠가 동등한 높이에 오르리라. 그리고 그를 능가해 그의 비원을 대신 이루겠다. 그렇게 큰소리 떵떵 치더니, 막상 탑주를 앞에 두자 떨리는 모양이다.

이드는 그의 거부에 더 묻지 않고는 막사를 나서며 말했다.

“자, 그럼 가 볼까요?”

그 말에 라미아와 쉴라, 그리고 라발이 뒤를 따랐다.

마수가 토벌대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막기 위해서다.

전날 회의에서 록마틴 후작은 탑주가 진체로 방문하면 토벌대 안으로 들이고, 가짜 몸을 뒤집어쓰고 방문한다면 토벌대 안으로 들이지 않고 일정한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만나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본래 전쟁은 남의 땅에서 하라는 말이 있다.

남의 땅에서 전쟁을 해야 내 땅이 황폐화되지 않으니까. 자국의 백성이 피해를 보는 일이 줄어드니까. 최대한 남에게 떠넘겨 내가 피해 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님비 현상과 같은 이기주의적 생각일 수 있지만, 전쟁에서 집단이기주의야말로 진리요 정답이다.

애초에 이기적이지 않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 하는 것이 전쟁이니까.

탑주의 방문에 대한 기준도 이와 같다.

진짜 몸을 가지고 찾아온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탑주를 토벌대 안으로 들여 생포 또는 사살하겠지만.

목적도 정확하지 않은 시점에 가짜 몸을 뒤집어쓰고 찾아온다면 토벌대에 들일 이유가 없다. 토벌대 안에서 자폭을 할지, 독을 뿌릴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차라리 독을 뿌린다면 네놈들의 대지에 뿌려라. 하는 것이었다.

뭐, 넓게 따지고 보면 그 땅도 제국의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결정에 따라 탑주의 출입을 제안하기 위해 이드들이 나서기로 했다. 병사들이 막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니까.

그렇다고 모든 실력자가 나선 것은 또 아니었다. 일리나가 황녀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것처럼 긴급 상황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절반 이상이 남기로 되어 있었다.


막사를 나섰을 때였다.

둥, 둥, 둥,

“적이다! 적이 부리는 마수가 나타났다!”

한발 늦게 북소리와 함께 경계병의 고함 소리가 증폭 마법을 타고 멀리 퍼졌다.

지휘부 막사에서도 이미 사람들이 나와 있다.

“…….”

그중 이드와 눈이 마주친 록마틴 후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정해진 신호에 이드가 라미아를 돌아본다. 

“갈까?”

이드의 말에 기다리고 있던 라미아가 블링크 마법을 사용했다.

파팟!

다음 순간, 네 사람이 토벌대 전방 백 미터 지점에 나타났다.

“아군이다! 궁병과 마법사는 실수하지 마라!”

예정되어 있던 등장에 혹여라도 오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사가 재빨리 소리쳤다.

이드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수를 살폈다.

느긋한, 그러나 덩치 덕에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던 마수는 공간을 넘은 이드들의 등장에 조용히 멈춰 섰다.

“오늘 예약된 손님은 분명 인간인데 말이야. 정체를 밝혀라. 말도 이해 못 하는 마수라면 그냥 목을 잘라 주고.”

그러자 박제처럼 정지되어 있던 마수의 입이 열리고, 거기서 놀랍게도 인간의 말이 흘러나왔다.

“할 말도 많은데, 벌써 목이 잘려서야 곤란하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 마수의 형태가 변했다. 두 발로 일어서더니 크기가 줄었다. 뭉툭하던 발에서 길쭉한 손가락이 생기고, 흉측하던 머리는 노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일부는 옷과 로브로 변해 늘어졌다.

모든 변화가 끝나고 마수가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인상에 지혜로워 보이는 노 마법사가 서 있었다.

“미완의 마탑 탑주 키릴 베이몬이 명예 후작께 인사드리오.”

슬쩍 고개를 까딱거리는 탑주의 모습이 당당하다.

일반적으로 마탑의 탑주라 하면 아무리 그 규모가 작아도 자작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완의 마탑은 정신의 관 기준으로만 보아도 후작급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속된 나라의 인정을 받았을 때 이야기. 미완의 마탑은 허가는커녕 토벌 대상이 된 상태다.

황제로부터 명예 후작으로 임명된 이드 앞에서는 예를 보여야 하지만, 그런 걸 지킬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인체 실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드도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생각도,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아는군.”

“당연한 일이잖소. 내 집에 온 손님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보는 것이 예의. 그렇지 않소이까. 쉴라 단장. 라발 단장. 그리고 후작 부인.”

“라미아까지 알고 있다니. 토벌대 안에 첩자라도 있나 보지?”

쉴라와 라발이라는 초 유명인과 달리. 라미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허허허. 그저 본 마탑의 능력일 뿐이라오.”

당연하지만 대답을 피한 탑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한데, 언제까지 방문한 손님을 세워 둘 생각이오? 이제는 나이가 많아 오래 서 있으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오.”

“진짜 몸도 아니면서 엄살이 심한 노인이군. 그리고 불청객은 원래 불편한 법이니, 기다려라.”

“허허. 이 몸이 불청객이었구려.”

새삼 당연한 걸.

그것도 그냥 불청객도 아니고, 핵폐기물급으로 들이고 싶지 않은 최악의 불청객이다. 제국이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토벌대를 꾸린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이드가 토벌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그러자 토벌대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곧 도착하겠지만, 짧게 한두 마디는 나눌 수 있을까.

“괜찮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나도 명예 후작에게는 궁금한 것이 많으니. 물어보시오.”

“검후는 살아 있나?”

사실 물어볼 것은 많았다. 생명의 관 지하에 있던 메르시오라거나. 이 던전 지하에 있는 메르시오 전용의 개구멍이라거나, 혼돈의 파편과 연관이 있느냐라거나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검후가 어디 있는지, 왜 납치했는지, 어떻게 납치했는지도 묻고 싶다.

하지만 답을 듣기 힘든 것에 대한 질문은 에너지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답을 얻기 쉬운 것으로 고른 것이 검후의 생사였다. 물론 그조차 대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호오. 어째서 그걸 나에게 물으시오?”

다행히 관심은 보이는 것 같다. 거기다 되묻는 태도로 보아 꼭 감추겠다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검후에 대한 문제는 남의 일이라 이건가?’

납치 당시에는 조력했을지 몰라도 그 순간뿐. 그 이후에는 관계가 없다는 느낌이다.

“어쩐지 알 것 같거든.”

“……그러고 보니 명예 후작이 던전을 파괴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는데, 구멍이 나긴 했지만. 뭐, 검후 정도의 강자라면 어디에선들 살아 있지 않겠소?”

순간 이드는 쉴라와 라발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진실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쩐지 사실인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록마틴 후작을 선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대처할 수 있는 실력자들과 함께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 호위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다시 뵙겠소. 록마틴 후작. 미완의 마탑 탑주 키릴 베이몬이오.”

하지만 록마틴 후작은 그 인사를 무시했다.

“토벌대에 당당히 방문을 알리다니. 간이 큰 것인지. 미친 것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경고하지. 그대는 제국의 땅에서 금기를 어기고 범죄를 저질렀다. 순순히 항복하라.”

“불청객이라도 일단 손님인데. 언제까지 여기 세워 두실 참이오?”

이번엔 탑주가 록마틴 후작의 말을 무시했다. 아예 듣지 못한 척 딴소리다.

하지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탑주의 무시에 록마틴 후작은 분해하지도 않았다.

“토벌대 안으로는 진짜 몸으로 찾아오면 구경시켜 주지.”

“훗, 그럼 천박하게 이대로 서서 이야기를 나누실 참이오?”

탑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의자와 탁자 정도는 천박하지 않은 선에서 준비했으니까.”

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흙이 퐁퐁 솟아올라 와서는 순식간에 단순한 모양의 탁자와 의자를 만들어 냈다.

“어제 불의 정령에 이어, 오늘은 대지의 정령을 보다니. 역시 생명의 관의 정복자는 무언가 달라도 다르구려. 감탄했소이다.”

미완의 마탑의 한 축을 무너트렸는데도 정복자라고 태연하게 치켜세우는 탑주다.

오히려 록마틴 후작과 함께 온 사람들 일부가 ‘생명의 관의 정복자’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에 대해 묻는 바보는 애초에 데려오지 않은 록마틴 후작이다.

혹시 몰라서 어제 성급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토리빈에게까지 대기를 명령한 그였으니까.

탁자는 컸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양측의 거리가 8미터나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특징 없는 탁자가 제법 위엄 있어 보인다.

이드들 쪽에서 의자에 착석한 사람은 백작급 이상의 귀족들을 비롯해서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처가 가능한 사람들뿐이다. 외교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선 상태로 귀를 기울였다.

“이제 말해 보라. 이 방문의 목적이 무엇이냐?”

“음? 목적은 이미 전한 것으로 기억하오만, 그대들이 보고 겪은 초인 마법에 대한 감상 말이오. 이제 당신들이 지배하는 이 대륙이 나의 초인

마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그것이 듣고 싶었다오.”

뭐랄까, 선물을 주고 감상을 기대하는 모습에 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감상을 듣기에는 보여 준 것이 너무 적지 않나? 1층에서 5층까지는 맛보기라고 하던데? 그 정도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인 마법이란 것의 깊이가 얕은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옳소. 말 그대로 맛보기라오. 하지만 그 맛보기만으로도 충분히 깊이를 짐작할 수 있어야 일류가 아니겠소. 무엇보다 6층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과연 내게 감상을 들려줄 사람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서 말이오.”

이드의 도발에 더 도발적인 답을 던진 탑주가 고개를 들어 뒤에 서 있는 외교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상을 듣고 싶은 것은 꼭 제국만이 아니라오. 귀하들도 던전에 펼쳐진 초인 마법을 보았을 터. 감상은 어떠하오? 이 힘. 가지고 싶지 않소?”

움찔. 

힘을 가지고 싶지 않느냐니.

순간 여러 사람이 동요를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은 복합했다.

‘뭐지? 초인 마법을 내놓겠다는 뜻인가?

분명 그런 뜻으로 돌렸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두공과 마찬가지로 마탑의 비결 역시 아무에게나 말려 주지 않는 그들의 보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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