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64화
900화
어두운 통로는 들어오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무한의 위장처럼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통로로 만들어진 미로는 던전의 상징적인 특징 중 하나다.
어둠. 함정. 보물 상자. 몬스터. 마법, 리치 등. ‘던전’이라고 하면 번뜩 떠오르는 많은 것들.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복잡한 미로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미로는 단순하게 던전의 전통 같은 것은 아니다. 마법사들이 어떤 인종들인데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할까. 로망 속에서도 가성비를 따질 인간들이 마법사들이다.
당연히 고대의 마법사들도, 지금의 마법사들도 이런 통로 형태의 미로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미로를 이용하면 적 병력을 분산시키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넓어도 통로라는 공간의 한계가 분명한 이상, 삼 조에 속한 수백의 인원이 한 번에 이동할 수 없다.
고로 삼조의 조원들은 길게 줄지어 이동할 수밖에 없고, 그 상태로 이동 중에 앞뒤 한쪽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온전히 전력을 다할 수가 없게 된다. 또 거기에 더해 고식적인 방법으로 미리 설치한 벽을 이용해 병력을 분단시키거나, 미로를 변경해서 병력을 각각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진 병력을 각개격파한다면?
대병력을 끌고 와도 한순간 정신을 놓으면 전멸하는 건 한순간이다. 그 외에도 통로형 미로가 주는 이점은 많고도 많다. 당장 이 넓은 공간을 마법진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이러니 마법사들이 미로라는 아이템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사실 5층까지는 던전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었지.”
공간은 넓었지만, 복잡하지는 않았다. 쉴라가 앞장섰던 1층이 좀 복잡하기는 했지만, 딱 보기에도 6층과는 난이도 차가 심해 보인다.
쉬움 난이도에서 갑자기 어려움 난이도로 두 단계는 건너뛴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마탑놈들. 애초에 시작부터 토벌대를 각오하고 있었던 건가?”
“명예 후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틀 전 공략을 통해 처음 얼굴을 익힌 케일럽이 말했다.
“케일럽 경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리 대비하지 않고서야 이런 대규모의 던전을 꾸미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가능해도 돈과 시간. 그리고 인력이 몇 배로 투입되어야겠지요.”
그리고 토벌대가 조직된 시간을 생각하면 그 후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공략 방법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으신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드는 그의 물음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진입하지 않고 멈춰 서 있어서 그런가. 이전 3층 문 앞에서처럼 또 주요 인원이 모여들어 있었고, 그 중앙에는 황녀가 부하를 거느린 대장처럼 서 있었다.
“일단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정석대로 움직여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마침 많은 분이 모이셨으니. 묻겠습니다. 정예로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전원이 다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까. 봐서 알겠지만, 전원이 진입할 경우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의미 없는 질문이십니다.”
이드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토벌대에 모여든 기사들은 모두 기사단의 영광과 명예를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위험하다고 빠진다? 납득하고 물러서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겁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황제 폐하의 말씀을 듣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자들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명을 내리시지 않는 한 누구도 물러서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목소리를 내는 기사와 초인이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 집단이지만, 그 높은 자존심만큼은 정말이지 똑 닮았다.
“그렇다면 저도 막을 수 없지요.”
위험하다는 걸 알고서도 도전하겠다는데. 이드가 무슨 권리로 막겠는가.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다.
이드는 굳이 힘들게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그의 눈에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살랑살랑 젓고 있는 황녀가 들어왔다. 자신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걸 미리 표현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황녀 전하께는 물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어머나, 믿어 주시니 감사해요.”
“별말씀을.”
설마 황녀를 믿어서 그럴까. 이드는 그녀 곁에 있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믿을 뿐이다.
통로에 들어서면 황녀에 대한 보호가 약해질 수밖에 없지만, 두 사람이 있으니 상관없다. 사실 아이넬 기사단의 호위는 위장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니까.
그래도 황녀가 있음으로 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라발 경.”
“예. 말씀하십시오.”
적색 기사단장이라는 위명과 달리 정말이지 조용하게 우뚝 서 있던 라발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록마틴 후작이 6층의 위험성을 생각하여 황녀의 보호를 위해 임시로 적색 기사단을 삼 조에 투입한 것이다.
이드는 그 결정을 고맙게 써 줄 생각이었다.
“라발 경과 적색 기사단에서 토벌대 후방을 책임져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길게 늘어서다 보면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앞과 뒤쪽이기 마련. 그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드는 라발의 시원한 대답에 곧이어 허리에 해당하는 중간부의 구성도 빠르게 마쳤다. 개개인과 기사단의 실력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등하게 구성한 것이다.
혹여 중간에 치고 들어와도 피해가 크게 번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럼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삼조의 진형을 다시 꾸민 이드가 가장 앞에서 통로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와 동시에 삼 조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준비했던 라이트 마법으로 통로 안을 밝혔다.
통로는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대형 몬스터가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통로는 만드는 데 사용된 돌은 무늬는 없었지만, 반듯했다.
찰칵찰칵 따각따각.
다양한 발소리가 그런 통로 안을 채운다. 안으로 발을 들인 지 20분.
처음에는 신중하던 발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럴 만했다. 20분간 이동했다. 처음에야 신중을 기했다고 해도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는데, 함정도 공격도 없다.
하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였다.
“정지! 전방에 이상 발견!”
그와 동시에 길게 줄지어 이동 중이던 수백의 인원이 마치 한 몸인 듯 멈춰 섰다.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스폴이 입을 열었다.
“함정입니까?”
“마나 뭉침 현상인데, 열에 아홉은 좋지 않습니다.”
메이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지만 5클래스 마법사의 감각이 마나 뭉침이라고 외친다.
뭉쳤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이상 상태를 의미한다.
드물게 마나가 자연적으로 뭉쳐 마나 스폿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현 장소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
과연 그의 말은 정확했다. 마법사 셋이 달라붙자 잠시 후 번쩍이는 빛과 함께 마나가 해소된다.
“독연을 품은 함정이었습니다.”
미로 안에 독연이 차면 치명적이다.
함정을 제거한 삼조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십 분 후, 다시 메이슨이 마나 뭉침을 감지해 냈다.
“그럼 함정을 제거・・・・・・”
그리고 이번에도 마법사들이 나서려 할 때였다.
신중한 눈으로 메이슨이 가리킨 곳을 살피던 이드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에 놀란 메이슨이 나서려 하자, 스폴이 잡았다.
“왜 멈추십니까? 당장 명예 후작님을 말려야 합니다. 저러다 함정이 작동하면 크게 다치시거나, 통로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진정하시고, 일단 기다리시죠. 어지간한 마법에 당할 분도 아니고, 아까 함정을 제거하는 것도 보셨으니. 뭔가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정답이다.
“역시 다르네.”
뭉쳐진 마나를 신안을 열어 들여다보던 이드가 말했다. 당장 앞의 것과 느낌이 달라 확인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뭉침 현상과 다르다. 다른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이렇게 노출된 마나 현상은 이드의 예리한 기감을 피할 수 없다.
확인을 마친 이드가 축구공을 차듯 허공을 찼다.
풍~!
풍선에서 바람빠지는 소리랄까? 묘하게 구린 냄새를 닮은 소리와 함께 기형적으로 뭉쳐진 마나가 연기처럼 흩어진다.
“마나 뭉침이 저렇게 쉽게 해소될 리가 없는데……..”
“그렇지요. 진짜라면 말입니다.”
“가짜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왜요?”
“허허실실. 가짜와 진짜를 섞어 정신적인 혼란을 유도하겠다는 거겠지요. 사실 이 마나 뭉침, 너무 티나잖습니까. 숨기려면 충분히 더 잘 숨길 수 싶네요.”
있었을 텐데. 이 앞으로 이런 함정을 다양하게 늘어놓고, 정신이 팔린 틈을 노리려는 것이 아닐까..
그 예상은 옳았다.
그 후에도 노골적인 함정이 곳곳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함정은 이드의 신안 아래 순식간에 허실이 간파되어 제거되었다.
토벌대의 발길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이드가 없었다면 토벌대의 정신력을 제법 갉아먹었을 수법이지만, 이드의 신안을 알지 못한 저들의 실수였다.
미로 안에서 정신적 피로가 커지면 꽤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상태에서 첫 공격이 시작된 곳은 가짜 마나 뭉침 현상이 가득한 어느 갈림길 앞에서였다.
“크악!”
“공격이다!”
“적이 벽 뒤에 있다!”
길게 늘어서 있던 중앙의 허리 부근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통로다 보니 소리가 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멀쩡한 벽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와 단검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한 기사의 팔에 박힌 것.
차라리 빠르기만 한 화살이면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쏟아지는 단검은 마치 암살자의 암기처럼 교묘했다. 거기다 누가 유령처럼 벽을 뚫고 팔이 튀어나올 줄 예상이나 했겠나.
그나마 사이사이 강력한 기사들이 포진해 있어 이차 공격을 막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 사태를 예견한 이드의 병력 배치의 승리랄까?
쾅! 콰쾅!
터터텅!
“젠장,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의 검이 벽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두꺼운 석벽 뒤에는 검은 흙이 있을 뿐. 빈 공간이 없었다. 순간 사람들이 당혹해할 때였다.
슈슉! 슈슈슉!
퍽! 깡! 깡! 퍽!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다시 벽에서 튀어나온 팔이 단검과 독침 등의 무기를 쏘아 냈다. 잘 막은 기사도 있지만,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는 기사도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중앙으로 이동하던 이드는 그 모습에 즉시 명령을 내렸다.
“적은 암살자다. 밀집되어 있으면 위험하다. 토벌대는 소속 기사단별로 거리 확보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 후 공격과 방어는 각 기사단의 판단에 맡긴다.”
암살자 같은 경우 많은 인원보다 평소의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의 명령이었다.
“충!”
복명과 함께 혼란은 빠르게 잡혔다. 그러는 중에도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재정비를 마치면 자신들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것을 안다는 듯, “누구 허락받고 기습이냐!”
쩌엉!
그에 이드가 일라이져를 뽑았다. 발검과 동시에 눈을 아리게 하는 빛과 짜작 하는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뇌정화가 펼쳐졌다.
수십 줄의 뇌정화는 유령 같은 팔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석벽을 쓸고 지나갔다.
투두두둑!
끄아아아아!
다음 순간, 주인 잃은 수십 개의 팔이 통로에 떨어지며 펄떡거렸고, 유령의 그것 같은 비명이 메아리처럼 멀리 들렸다.
“우리도 반격을 시작한다! 공격!”
틈을 본 기사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황한 팔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사들의 검이 불꽃을 튀기며 석벽을 긁어 댔고, 이드보다는 못해도 수십 개의 팔을 끊어 내는 성과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