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8화
485화
“헐~”
이드는 무너진 영주성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이탈을 나서기는 틀렸구나.’
현재 하이탈의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된 상태였다. 거리에는 하이탈의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듯 몰려다니며 사방을 들쑤시고 있었다. 덕분에 도시 안의 공기는 차갑고 살벌했다.
전날 밤 영주성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이었다.
병사와 기사들이 살벌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그 폭발은 어떤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인 듯했다. 그들의 모습은 흡사 목줄이 풀린 사나운 사냥개 같았다.
당연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들의 주인이 머무르는, 하이탈의 심장인 영주성이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시의 지배자이자 도시의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영주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하이탈의 영주성은 건설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으니, 그 심리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아마, 폭발의 범인을 잡는다면 씹어 먹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휘이익. 누군지 제대로 재미 좀 봤겠는데요.”
이드의 뒤를 따라 나온 에단이 휘파람을 불며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이드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일은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물류의 흐름이 가장 중요한 국경 도시인 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 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 기간 발이 묶이게 생겼는데 정작 자신을 안내해야 할 인간이 싱글거리며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에단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글쎄, 재미를 봤을지 손해를 봤을지, 저 성의 주인이 아니면 모를 일이지.”
“에이, 마스터. 제가 명색이 트와이스 아닙니까. 이런 일에 대한 냄새는 기가 막히게 정확하다니까요. 척하면 착입니다. 당장 눈에 불을 켜고 사방으로 날뛰는 기사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니까요.”
“그래, 잘났다.”
그런 두 사람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서 영주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도 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상품을 가지고 있는 상인들의 경우, 시간이 늦는 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애타는 마음이 더했다.
그러나 영주성이 공격받은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정을 영주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에 영주 살해의 혐의를 지고 끌려갈지도 몰랐다.
“에휴~”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한숨만 쉬는 드문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곧 여관으로 들어왔다. 방에서 쉬고 있던 일리나를 불러 가벼운 메뉴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이드의 방으로 다시 모였다.
[몰래 나가는 건 역시 별로겠죠?]
이드와 에단을 통해 여관 밖의 정황을 들은 라미아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이드가 가만히 고개를 저어 주었다. 이드를 대신해 일리나가 말했다. “아마, 그렇게 한다면 아나크렌으로 향하는 동안은 조용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 하이탈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될 테고, 정황상 우리를 범인으로 수배할지도 몰라요.”
“그럼 아주 번거로워지겠지.”
[그렇죠. 이미 겪어 봤죠.]
라미아를 무릎에 태우고 있던 일라나의 설명에 이드가 한마디를 더했다. 그러자 라미아도 순순히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드레인에서 수배를 받으며 제법 곤란을 겪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드도 라미아도 그런 경험을 다시 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영주성에다 저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짓은 저희들처럼 특수한 일을 전담하는 기사단에서도 잘 하지 않는 짓인데 말입니다.”
에단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 말을 꺼냈다.
영주성에 대한 공격은 모든 귀족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생활공간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위협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귀족이 머물고 있는 성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무언의 규칙이 깨어지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귀족이나 그들의 지휘 아래에 있는 전투 인력은 범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충분히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드와 일리나,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관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여관 안을 울렸다.
“나는 하이탈의 기사 보톤 락이다. 어젯밤 영주성에 생긴 일에 대한 용의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모두 각자의 방에서 기사의 방문을 기다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혹여라도 성급한 행동은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이 여관은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드디어 이 여관 차례인가 본데, 별일 없이 넘어가야 할 텐데 말이야.”
이드는 보톤 락이라는 기사의 목소리에서 사방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그러자 에단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느긋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쿠키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에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마스터. 저희 쪽에는 일리나 님이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리나 님이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저놈들도
찍소리 못 하고 물러날 건데요, 뭐.”
에단의 장담은 반만 맞았다.
딱딱한 얼굴로이드들의 방문을 열고 들어선 젊은 기사가 일리나를 확인하고는 굳은 얼굴을 살짝 풀었다.
“이런, 엘프분이 계셨군요. 기사 텔이라고 합니다. 저희 영지를 여행하는 중에 뜻하지 않게 불편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과연 엘프에 대한 인간의 호감은 깊은 듯했다. 그것이 엘프의 특징과 지혜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외모에서 오는 것인지는 당장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 있는지는 보고,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기사 텔의 정중한 말에 일리나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엘프분의 일행들은 여기 있는 두 분이 끝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명령에 의해서 방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러자 기사와 병사들이 들어와 방안과 침대 밑, 욕실 등을 확인했다.
“확인을 마쳤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사를 내보낸 기사는 끝까지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힘든 일도 아닌걸요.”
“그래도 머물고 있는 숙소의 수색이 기분 좋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혹시 제가 엘프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역시 수컷으로서의 본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텔이라는 기사는 다급한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면서도 일리나에게 수작을 걸어왔다. 앞서 철저하게 기사다운 모습을 보인 것도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럴 수 없을 것 같네요. 남편이 있는 몸이라서요.”
텔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속뜻을 파악한 일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남편이라고 말하는 듯 이드의 팔을 품에 안았다. 그 모습에 텔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실망과 부러움의 표정이 스쳐갔고, 한심한 눈으로 텔을 보던 에단의 얼굴에도 부러움이 떠올랐다. 이드는 두 사람의 시선과 팔에서 느껴지는 말캉거리는 기분 좋은 감촉에 그저 흐뭇할 뿐이었다.
일리나의 유부녀 선언에 텔은 순순히 물러났다.
이드는 실망하고 방을 나서는 그에게 언제 하이탈을 나갈 수 있는지 물었고, 아직은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급한 직무를 수행하는 대귀족 이하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라고 했다.
자작이 ‘네 밑으로 꼼짝 마’를 시전한 것이다.
“역시, 한동안 여기 머물러야겠다. 에단이 나중에 여관 주인에게 말해서 방을 장기로 돌려.”
밖에서는 지금 갑작스러운 상황에 방을 구하기 위해서 난리도 아니었다.
“네, 마스터. 그런데 저 녀석들 아무래도 범인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특정된 사람이 없다면 저런 수색 방법은 말이 안 되지.”
보통은 용의자를 추리고 그들 사이에서 심문을 통해 증거를 확보한 뒤 범인을 찾아낸다.
“이거 어쩌면 평소 영주성을 드나들던 관계자의 짓일 수도 있겠는데요.”
이미 에단의 얼굴은 범인을 쫓는 탐정의 것이었다. 라미아가 어차피 우리 일이 아니라고 무시했지만 에단의 추리는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결국 에단은 현상금을 받아오면서 성의 분위기를 살펴보겠다고 방을 나섰다.
“어, 그럴 필요 없는데.”
이드가 말려 보았지만 에단은 이미 여관을 나선 후였다. 몇 번째 생각하는 일이지만 저 성격으로 어떻게 트와이스처럼 은밀함을 중요시 여기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에단이 여관을 나간 후, 이드를 찾아온 대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한 번씩 벌떡 일어나서 이불을 찹니다. 지금처럼 망둥이마냥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뛴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좀 편하게 녀석하고 다니시려면 고삐를 단단히 당겨 두셔야 할 겁니다!”
이야기 중에 에단 때문에 고생한 일들이 생각났는지 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대장이었다.
삐질. 대장이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이드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지 않아도 당기려고 준비했던 에단의 고삐를 좀 더 강하게 당기기를 결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대장과 같은 꼴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에단은 밖에 나가서 없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영주성을 저렇게 만든 인물이 아무래도 이드 님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정보가 없으실 듯해서 전해 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엑? 그럴 사람 없어요!]
대장의 말에 라미아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의 뒤에서 말할 기회를 놓친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을 나와서 곧바로 하이탈로 직행한 이드에게 관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대장이 착각을 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일단 이드는 이어질 대장의 말을 기다렸다.
“물론 친분이 있는 분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인연은 있으시지 않습니까? 가령 하이탈로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초인들 말입니다.”
대장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설마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드가 봤을 때 그들에게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영주성에 침입할 깜냥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설마가 사실을 바꿔 주지는 않는다.
“설마…….”
“맞습니다. 이드 님이 잡아온 산적과 한패였던 두 산적이 영주성에 침입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과 관련하여 영주성에서 이드 님을 소환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그럼 한발 늦으셨네요. 에단이 현상금과 이번 일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러 영주성으로 나갔거든요.”
이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영주성을 바라보았다. 성급하게 까불거리다가 성으로 향한 에단의 모습이 생각났다.
“진작 두드려서 얌전히 앉혀 놓을걸.”
후회는 언제는 한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아차, 잘못 왔구나.”
에단은 이드와 마찬가지로 후회했다.
에단이 왔을 때 영주성은 살벌한 분위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무너진 벽을 보수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에단은 그 속에서 능숙한 말솜씨를 발휘하며 현상금과 영주성 습격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그것은 대장으로부터 이드가 전해들은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잘못하면 더럽게 걸릴 수가 있다.”
에단도 대장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영주성 방문이 그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단은 서둘러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두른 덕분에 에단은 어느 순간 그의 뒤에 따라붙은 그림자 하나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에단이 급하게 여관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하이탈 자작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생각지 못한 부탁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귀족가 자제로 보이는 젊은 검사 하나와 여성 엘프, 그리고 용병 하나를 찾아 달라………… 이 말씀이십니까?”
하이탈 자작은 탁자 위의 마법구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기서 많이 뭉개지고 흐트러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문을 하는 도중에 한쪽에 밀어 두었던 제법 흥미로운 내용의 보고서가 떠올랐지만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래. 중요한…… 일이니 잘 좀. 알아봐 줘.”
중간중간 늘어진 음성이지만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자작이 히쭉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제 성에 문제가 있어서 바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최대한 힘을 써 보겠습니다. 백작님.”
“그래, 그럼・・・……잘 좀 부탁하지……… 후배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밝게 빛을 품고 있던 마법구에서 빛이 사라졌다.
“일단, 제가 챙길 만한 것이 있으면 챙기고 연락을 드리죠, 선배님. 크크큭.”
하이탈 자작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집사를 불러들였다.
“벤 그놈의 현상금이 지급되었는지 한번 알아봐. 지급되지 않았으면 현상금을 받으러 오는 자를 내게 데려오고.”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자작의 명령에 충성스러운 집사가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하이탈 자작은 수정구가 놓여 있는 비밀 방을 닫고 푹신한 의자에 앉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의 한쪽에 부서진 성벽의 조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좀 전과 같은 짜증이 올라오지 않았다.
“멍청한 사냥개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생각도 못 한 곳에서 손해를 보충하게 될지 모르겠군. 엘프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