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82화
918화
전투는 치열했다. 전장 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선 암살자를 향해 수백의 초인들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또 동시에 일방적이기도 했다. 그렇게 달려든 초인 기사들을 존 워스가 일 검에 썰어 버렸으니까.
“커억!”
그저 비겁한 암살자가 단장을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초인들은 그 모습에 순간 그대로 멈춰 버렸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미친, 암살자가 뭐 저렇게 강해!”
“눈이 뻤냐? 잘 봐! 저건 암살자 따위가 아니라고!”
저 무자비한 검은 도저히 암살자 따위가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 검에 수십의 초인 기사를 썰어 버리는 암살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그런 재주가 있으면 장군을 하고, 귀족을 하지. 왜 힘들게 암살자를 하나? 아무리 정신세계가 특이하고 피를 좋아해도 사람인 이상, 더 나은 삶의 질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발터, 발터 단장님께 지원을 요청해!”
크고 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단장들이 많아서일까. 이들은 단순히 숫자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는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지체 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이드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 좋네. 괜히 상사 눈치 본다고 피해만 키우는 바보들은 아니군.”
“그러면 뭐 해요. 원군이 아무리 빨라도 휘두르는 검보다 빠를 수는 없는데.”
라미아가 혀를 찼다.
“후후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존 워스가 살기 어린 미소를 날리며 미친 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싸움에 있어 숫자는 물론 절대적이지만, 압도적으로 실력이 차이 나면 숫자로도 쉽게 감당이 힘들다.
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현장이 이드의 발아래 펼쳐졌다.
갖가지 초인기들이 번뜩이고, 땅이 일어서고, 불길이 춤을 췄다. 하지만 어느 것도 존 워스의 앞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그는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처럼, 지금까지 왜 몰래 암살하고 다녔나 싶을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금방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존 워스의 모습에 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누가 보면 피에 미쳐 입마에 든 줄 알겠네.”
그때 중간중간 길을 막는 샌드웜과 바위를 날려 버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한 무리가 나타났다.
“발터 단장과 기사단이네요. 막을 수 있을까요?”
“가능하겠지. 발터 단장과 청색 깃털 기사단은 뛰어나니까. 거기에 존 워스도 자신의 정체를 까발릴 진신절기를 드러내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초인파의 오 조를 흔들 생각이라면 이미 충분히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상태.
“난 적당히 틈을 봐서 물러설 것 같아.”
물론 그것도 발터와 청색 깃털이 순순히 놓아줄 때의 이야기다. 발터는 정체불명의 적을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온몸에 끌어 올린 초인기로 마치 대신전을 장식한 거인 조각상처럼 변해 무자비한 공격을 날렸다.
청색 깃털은 그런 단장에 대한 보조를 완벽히 했다.
존 워스는 이드의 추측처럼 슬슬 물러설 타이밍을 보는 듯, 발터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발터와 청색 깃털은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도망갈 수 없다. 어디의 기사인지 알 수 없으나, 조금만 기다리면 그 복면과 함께 얼굴 가죽을 벗겨 주마!”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발터는 초중기로 자신과 존 워스 주변에 고중력을 발생시켰다. 마법으로 중력장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랐다. 마법이 위에서 누른다면, 발터의 초중기는 아래에서 끌어당겨 상대의 이동 능력을 떨어트린다.
“암살자도, 기사도 발이 묶이면 무력해지는 법이지.”
이미 암살자의 정체를 기사로 단정 짓고 있는 발터다.
스팟.
그에 잠시 멈춰 선 존 워스가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이어 발을 쿵쿵 찍어 보인다.
“과연, 이것이 그 유명한 발터 단장의 초중기인가. 듣던 것 이상으로 움직이기 힘들군.”
“…….”
말로는 대단하다 하면서 태연한 모습에 발터는 대답 없이 초중기의 출력을 높였다. 그에 따라 존 워스의 몸을 적시고 있던 핏물이 투두둑 빠르게
떨어졌다. 마치 학살의 증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그 모습을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존 워스가 주변의 초인 기사들을 훑어본 후 발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한데 과연 내게도 기사들에게 사용할 때처럼 효과가 있을까 싶군. 아쉬워.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즐겼을 텐데.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보지.”
말과 함께 까닥 손을 흔드는 존 워스.
다음 순간 그는 촤아악! 하는 물소리와 함께 지면을 적시며 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에 과연 그가 무슨 짓을 하는가 지켜보고 있던 발터와 오 조의 초인들. 그리고 이드와 라미아까지. 숨이 멎을 듯 놀라고 말았다.
특히 이드와 라미아의 놀람은 매우 컸다.
“……허!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저거 마법 아니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비비는 이드다. 상황이 끝나가는 듯해 돌아가려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보자 싶어 앉아 있던 것인데, 정말 생각지 못한 굉장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 존 워스가. 초인을 개돼지 잡듯 도살하던 존 워스가.
“믿기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초인기 같은데요?” 초인기를 사용하다니!
“저거 혹시 미완의 마탑에서 만든 아티팩트는 아닐까?”
초인을 갈아 넣어 초인기를 사용하게 만드는 아티팩트. 그것이라면 초인이 아니라도 초인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가능성은 없지 않지만, 저런 물건까지 주고받을 사이일까 싶은데요.”
그렇다고 아니라도 단정할 수도 없다.
“일단 돌아가자. 이번이 끝일 것 같지도 않고. 이후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지. 참, 돌아가면 바로 모이엔의 막사를 감시해 줘.” “알았어요. 그럼 이동할게요.”
스팟.
라미아의 말과 함께 공간 이동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아래.
한발 늦게 도망친 존 워스를 잡아 보려 땅의 일부를 돌려 낸 발터가 있었지만, 결국 수백의 초인들은 눈앞에서 적을 놓치고 말았다.
“뿌드득.”
푹 파인 땅을 내려다보며 발터가 이를 갈았다. 그 옆으로 칸과 시플론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발터의 눈치를 보았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오 조의 모든 초인들이 발터를 바라보았다. 아직 10층의 공략이 온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 피해는 컸다.
발터의 결정이 필요한 때였다. 발터 역시 그런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타오르는 마음과 차가운 머리를 분리시킬 줄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냥 청색 깃털 기사단의 단장이 된 것이 아니다.
“……10층 공략을 이어 간다. 일부는 남아 동료들의 시신을 챙겨 10층 입구로 옮겨라. 적색 기사단의 기사들도 도와주길 바라오.”
“명령에 따릅니다.”
발터는 움직이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10층의 공략을 위해서는 그가 가장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10층 공략을 마치고 복귀하실 겁니까?”
그때 그의 뒤로 따라붙은 시플론이 물었다. 원래 계획은 11층까지 공략을 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확인한 것이다.
“아니, 12층을 연다. 이대로 복귀할 수는 없어.”
“놈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올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다.”
어두운 동굴 안쪽을 향한 발터의 눈이 노랗게 번들거렸다. 그 기세에 시플론이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가 떨어져 나가자 칸이 발터에게 한 발 다가서며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복면의 적.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후…….”
짧은 말이지만 그 속에 든 의미는 깊고 깊었다. 발터 역시 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보고를 듣고 적의 검강을 확인한 순간 이미 발터를 비롯한 모두는 놈을 기사로 여기고 있었다.
마탑에서 고용한 인간일 수도 있지만, 공략전의 상황을 보면 소드 팰러스일 수 있다 여겼다. 어떤 이는 누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이냐며 의심에 의심을 더할 수 있겠지만.
전장은, 이 던전이라는 닫힌 공간에선 그런 일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당장 그 알 수 없는 기사가 누구냐고 물으면 발터조차 답할 수 없으니까. 설마 모이엔이 직접 복면을 하고 나타나지는 않았을 터. 그럼에도 기사라 의심했다.
그런데 그 의심이 근본에서 흔들렸다. 바로 눈앞에서 초인기를 사용해서 사라진 복면인.
물로 변해 탈출하는 그런 재주는 초인들의 특기였다.
괴짜가 많은 마법사들도 그런 이동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물로 변해 사라지는 순간 리트머스 검사지의 붉은 선처럼 피어오른 초인력은 정말이지.
복면인이 초인이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물론 그 초인기 하나로 적이 기사가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다.
기사들 중에 초인으로 각성하는 자도 있고, 초인 중에 검강을 능숙히 사용하는 자도 있으니까.
“가능성은 많다.”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가능성이 너무 많아 문제다.
발터가 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물들이던 살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바위처럼 무겁고, 땅처럼 단단한 남자.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발터였다.
“우선은 공략이 먼저다. 모이엔과 마탑, 그리고 복면인에 대한 문제는 복귀한 후 처리한다.”
“라울 님과 상의하려고 하십니까?”
“복면인이 아니라도 라울은 봐야 한다. 이 꼴로 오 조를 해산할 수는 없다. 절대로.”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는 듯, 조용한 말과 함께 발터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이드의 막사. 그 안의 침실에 설치된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고 이드와 라미아가 나타났다. 라미아는 이동이 끝남과 동시에 가면으로 변해 아공간에서 꺼낸 골렘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방문을 열고 나오자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쉴라가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오 조에게 배정된 시간이 아직 절반 넘게 남았기 때문이다.
“쉴라 경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제가 있는 쪽이 오는 사람을 막기 편할 것 같아서요. 참, 일리나 님은 황녀 폐하의 막사에 함께 계십니다.”
따로 묻지 않아도 일리나의 행방을 전하는 쉴라다. 기사단장이라기보다는 꼼꼼한 하녀장 같은 모습이다.
아마 지척에서 검후를 보좌하던 버릇이 나온 것일 테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보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걸 보면 아무 일이 없거나, 아주 큰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힐끔. 이드와 라미아의 뒤를 살피며 말하는 쉴라다.
당연하다. 사람을 납치하러 간다고 해 놓고 맨손으로 빠르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잘 보셨네요. 아주 쇼킹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애써 궁금함을 누르며 차분히 묻는 쉴라.
이드는 그 모습에 눈을 한 바퀴 굴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몰랐는데, 존 워스 그 양반. 초인인 모양입니다. 초인기를 사용하더라고요.”
“……네?”
순간 바보가 된 듯 멍청하게 반응하고 만 쉴라다.
평생 남을 흑역사의 한 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