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86화
922화
그와 같은 이유로 초인을 싫어하는 기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저 서로를 향해 조롱하고, 술김에 치고받는 정도다.
기회가 된다고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검왕이기 때문에 혐오와 분노가 더 큰 것일까.’
그럼 그런 기사들과 존 워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힘이다. 무공의 경지.
어쩌면 검왕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흘린 피와 땀이, 수련생이 기사가 되기 위해 쏟은 노력보다 수십, 수백 배 많기에 존 워스의 혐오와 분노도 수백 배 큰 것일지도.
쉽게 말해 이런 거다.
두 집에서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을 지하실에 숨겨 뒀다. 한 집은 백만 원이고, 한 집은 일억 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화폐 개혁을 해서 하루아침에 구권이 쓸모없어졌다면?
백만 원과 일억 원. 어느 쪽의 허탈함과 짜증이 클까? 당연히 일억이지 않겠나.
모이엔과 게일로서는 그렇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후후.”
그들은 검을 쓰다듬는 존 워스의 눈 속 깊은 곳에서 맥동하는 은은한 황금빛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조 복귀 후.
적색 기사단의 오조 합류가 발표되었다.
이에 오 조의 전력이 너무 강하다고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력은 곧 전공으로 이어지는 민감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모이엔이 오 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쌍심지를 켜고 나서니, 오 조에 반대 의견을 내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지금 오 조야말로 모이엔이 기를 쓰고 만들려고 하던 최고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좌우간 그런 모이엔의 정성에 반대 의견은 급격히 힘을 잃었고, 록마틴 후작은 합류 허가를 통과시켰다.
“푸하하하하. 모이엔 단장 말에 반대하던 분들 표정 보셨어요? 꼭 애인에게 배신당한 사람 같았어요.”
막사에 돌아온 황녀가 참았던 폭소를 터트렸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배꼽을 잡는 모습이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이엔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용기 있게 위기를 돌파하는 초인들을 방해하지 못해 안달인 귀족들 역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제국의 황녀 입장에선 오 조의 초인들도 귀중한 인재들이었으니까. 그들을 잃게 되는 건 제국의 큰 손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이엔의 목적을 모르니까요. 그런데 애인에게 배신당한 사람의 같다는 건 혹시 게일…..”
“에헴! 그런 것보다 우리 삼 조는 공략은 언제 시작하나요?”
이드는 노골적으로 못 들은 척하는 황녀의 모습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 오전 출발입니다.”
계획대로라면 이 조에 이어 바로 진입해야 했지만, 회의로 인해 진입 시간이 밀렸다. 거기에 이번 회의에서 진입 시간이 다시 조정되었는데, 앞으로 다섯 개 층이 남은 만큼 서두르지 않고 하루에 하나의 조가 진입해서 공략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보다 조금 걱정이네요. 13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어쩔 수 없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이 조가 전한 13층에 대한 정보는 미미했다. 그렇다고 이 조가 심술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13층의 문을 열었지만, 그 안이 어둠으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던 것.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도 어둠에 먹힌 듯 빛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에 정해진 공략 시간을 다 되어 가니.
이 조 입장에서도 더 자세히 살펴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둠이라.’
이드는 모이엔이 전한 정보를 되새겼다. 흉악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모이엔이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목표는 초인파와 적색 기사단.
굳이 목표가 아닌 이드와 황녀에게 거짓 정보를 넘길 이유가 없다. 거기에 라이트 마법이 통하지 않는 어둠이라는 그 정보에 거짓이 담겨 봤자 얼마나 담겼을까.
내려가는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명예 후작께선 그 어둠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곰곰이 생각에 빠진 이드를 본 쉴라가 물었다.
“별건 아닙니다만.”
“별것 아니라도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쉴라의 말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황녀와 스폴, 일리나와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섯 여성이 어서 속에 든 말을 토해 놓으라는 듯 이드를 압박했다.
이드는 최근 주변 남녀 성비에 심각한 불균형을 재차 인식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별것 없습니다. 어둠이라고 하기에 마탑에서 초인기를 부여해서 만들어 낸 마수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아, 저도 보고서로 읽었어요. 피와 살이 아니라 마나에 가까운 검은 기운으로 만들어진 마수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짝, 하고 박수를 치며 말하는 황녀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기에 형태도 바뀌지요. 문득 그놈들의 육신을 넓게 퍼트려 놓으면 라이트 마법의 빛도 맥을 추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명예 후작님의 추측이 맞다면, 13층 공략은 매우 위험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제 발로 마수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수의 배 속이요?”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진짜 검은 기운이 마수의 육신이라면 그 안은 마수의 배 속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바로 호흡입니다. 숨 쉬는 공기에도 마수의 육신이 섞여 있을 테니. 경우에 따라서는 마수가 들이마신 이의 몸 안에서 육신을 만들어 뚫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쉴라의 말을 듣고 있던 황녀가 뱃가죽을 뚫고 나올 마수를 상상한 듯 창백해진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우우.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게 가능한가요?”
“꼭 같지는 않지만 크루레인 왕국 남쪽 해안에 그와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사시사철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곳인데. 그 안개를 오랫동안 흡입하면 내장이 녹아내립니다. 안개가 일종의 독이거든요.”
스폴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겁을 주려는 뜻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다.
창백하던 황녀의 표정이 오히려 풀어져 버렸다.
“스폴 경은 정말 연기가 서툰 것 알아요?”
“……황녀 전하께서 눈치가 빠르신 겁니다.”
“아니죠. 그렇게 악명 높은 위험지라면 내가 지금까지 모를 이유가 없죠.”
들어가면 죽는 곳이다. 그런 장소라면 전설 한두 개는 끼고서 대륙에 널리 알려졌어야 할 테지만, 황녀는 지금까지 그런 곳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때 쉴라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스폴 경이 부풀리긴 했지만, 비슷한 곳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다만, 하루 종일 있더라도 눈이 따갑고, 속이 울렁이는 정도의 약한 독이라 크게 유명하진 않을 뿐입니다.”
“헤에. 진짜 있군요. 그럼 13층이 진짜 그런 곳이라면 어떻게 공략하나요?”
쉴라가 편을 들어 주자 살짝 우쭐한 스폴을 무시하고 황녀가 물었다.
그러자 이드와 라미아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안개라면 문제지만 마수라면 간단합니다. 아무리 넓게 퍼져 있어도 마수이니, 죽여 버리면 잿더미로 흩어질 뿐이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불로 태워 버리거나, 트위스트 윈드를 사용해 던전 밖으로 날려 버리는 방법도 있죠.”
두 사람의 말만 들어서는 하나도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아니, 차라리 진짜 독 안개나, 마수라면 차라리 편하겠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맛보기 층을 한참 지나온 13층이다.
그렇기 쉬울 턱이 없었다.
“마수의 육신을 이루던 기운과 비슷하지만, 마수는 아닙니다.”
“독 안개도 아니에요.”
다음 날 13층 입구에 선 이드와 라미아의 말이었다. 두 사람 얼굴에 살짝 실망의 표정이 떠오른 것은 착각은 아닐 것이다.
“블라인드니스 마법을 검은 안개로 유형화시켰어요. 이렇게 하면 라이트 마법을 아무리 사용해도 밝힐 수 없는 것이 당연하죠.”
그것도 잠시. 라미아가 어둠의 정체를 해석해 냈다.
“그럼 이 안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거네?”
“맞아요. 아무리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예요. 이건 대상에게 거는 마법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마법이니까요.”
“나도?”
문득 궁금해진 이드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라미아다.
그에 이드는 시험하듯 어둠 속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러자 정말 눈을 감은 듯 눈앞이 온통 검어졌다.
아무리 안력을 높여도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몸에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호호탕탕 거침없이 전신을 누비는 내력의 흐름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그 이전에 거대한 내력의 흐름을 뚫고 마법을 거는 것은 이드가 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특히 도가에 근본을 둔 무극진기의 특성상 저주 계열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블라인드니스는 저주 계열의 마법이다.
당연히 이드에게 마법을 걸려 있다면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만 몸 안이 아니라 밖은 달랐다.
“칙칙하네.”
마치 공기에 귀기와 함께 악의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이 축축했다. 라미아의 블라인드니스 마법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눈이 안 보인다고 볼 수 없는 건 아니지.”
뚜벅뚜벅.
시야를 잃었지만 이드는 어둠 속을 거침없이 거닐었다. 넓게 퍼진 기감을 통해 마치 3차원 레이더처럼, 보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어둠 속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십여 분 정도 어둠 속을 돌아본 이드가 입구에서 나왔다.
“확실히 일반 기사들에겐 위험하겠네.”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란 말이 있다. 특히 싸움에 있어서 눈의 중요성은 구백구십 냥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드처럼 기감이 뛰어난 기사, 혹은 그와 비슷한 초인기를 가진 초인이나 마법사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안은 어땠어요?”
“별거 없던데? 입구에서 백 미터 정도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없어. 대신 엄청나게 넓어.”
“어둠 속에 숨어서 공격할 생각일까요?”
일리나의 말이다.
가장 간단한 답이기도 했다.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서니까. 그리고 확실히 위력적일 것이다.
시야를 잃으면 당장 삼조 전력의 80%가 감소된다.
“아무래도 조를 나눠야겠는데?”
“하아~”
이드의 말과 동시에 숨죽이고 있던 조원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삼조가 안전하고, 든든한 것은 좋지만 이럴 때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거기다 이드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한두 번인가.
이래서야 삼조의 전공을 자신의 것이라고 자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자존심이 있다면 그렇게는 못 한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힘들었다.
어둠이 주는 두려움은 기사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암살자가 괜히 어둠 속에 숨는 것이 아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잠깐 살펴본 바로는 모두 활약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까. 우선, 어둠이 두렵지 않은 자원자만 앞으로 나서도록.”